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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오빠?”
“응?”
“아까부터 왔다 갔다 하잖아. 정신없어.”
연두가 과일을 깎다 말고 쳐다봤다.
“작업실이 아니라서 일이 손에 안 잡혀? 예전에 쓰던 구닥다리로 인화해 본다더니, 도구는 다 있었구?”
혼자 살아선지 서른하나에도 여학생처럼 앳되어 뵈는 연두가 칼 든 손으로 콧등을 문지르며 물었다.
“인화액을 새로 사다 해봤더니 쓸만하더라. 이번 전시회용 사진들은 일차 보정 끝내고 왔으니까, 여기선 장난삼아 손맛 나는 흑백 몇 장만 빼 보려구.”
방석을 끌어다 놓고 승이 털썩 앉았다.
“바쁘다더니 정말 쉬러 왔나봐? 나두 며칠만 푹 쉬었으면.”
티브이에선 여자 가수들이 떼로 나와서 와그르르 웃고 있었다. 승은 어젯밤 늦게 여기로 들이닥친 뒤 이제야 제대로 마주앉은 연두를 빤히 쳐다봤다.
“머리칼을… 튀겼냐?”
“또 시작이다. 오빤 자기 멋 부리는 덴 도가 텄으면서 표현이 왜 그렇게 무식해?”
“그거 같다야, 브로콜리. 색깔은 좋네. 그러고 나가도 회사에선 괜찮대?”
“첨부터 내가 그렇게 길들였거든. 스타일 땜에 쫓아낼 회사 아냐.”
연두는 야근을 밥 먹듯 해도 수당 한 푼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광고 일이라서 몰아칠 땐 늦어지기 예산데, 자정 넘을 때만 교통비가 제한적으로 나온다는 얘기도 했다.
티브이에서 또 요란한 폭소가 터졌다. 패널들이 웃다 넘어갈 기세로 몸을 뒤틀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둘은 콧방귀와 웃음을 섞어가며 한참 구경했다.
연두가 과도를 든 채 일어서서 아이돌 가수를 따라 막춤을 췄다. 승도 일어서서 맵시 있게 엉덩이를 흔들어 준 뒤, 사과를 아작아작 먹었다. 그리고는 작은 방으로 건너가서 박스들 사이에 누웠다.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와 허리뼈가 시었다.
혼자가 되자 승의 미간엔 또다시 불편한 주름이 패었다. 낮에 본 청년의 모습이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저녁답에 카메라를 챙겨 들고 다시 그 집에 들렀을 때 촬영을 거부당했던 일도 마음을 불쾌하게 긁었다. 사람도 아니고 웃기게 생겨먹은 닭쯤 못 찍을 게 뭔가 싶었지만, 친절하던 모습과 달리 청년의 어머니는 완강했다.
‘그럼 아드님이라도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걔가 공부 중이라서 방해하면 안 됩니다.’
‘어디서 뵌 거 같아서요. 물어볼 게 있으니까 부디 좀.’
‘방해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
할 수 없이 돌아서는데 안에서 연신 닭소리가 들렸다. 장난처럼 시작한 방문인데 정색으로 거절당하니 심사가 뒤틀렸다.
승은 요를 꺼내 제대로 누웠다. 작업실에서 대충 챙겨서 여기 온 뒤 옛날에 쓰던 짐들을 풀어서 곧바로 인화작업에 들어갔던 터라 내리 수면부족인데도 잠이 와주질 않았다.
어느새 승은 지난 몇 년 동안 파인더로 잡아냈던 오브제 중에서 잊지 못할 표정들을 뒤지고 있었다. 수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속사되었다. 상심과 분노와 씁쓸한 비애를 칼자국처럼 새긴 표정들 중에서 강한 반동을 튕기며 마음에 걸려드는 것이면 무엇이든 카메라에 담았던 그는, 사냥꾼처럼 지난 노획물들을 뒤져나갔다. 다친 짐승처럼 웅크린 산야와 얼음 같은 겨울비에 허리를 꺾고 녹슬어가던 계곡들. 달빛을 비수처럼 받아들이던 자학적인 바다와 폭풍에 울부짖는 벌판에서 속절없이 휘둘리던 인간의 모습들이 뇌리에 줄줄이 지나갔다.
라이터로 톡톡 방바닥을 두들겼다. 생수병이 비어서 입이 탔지만, 불 없는 담배를 문 채 바닥이 보일 때까지 승은 이미지 쫓는 일에 집중했다.
어떤 것이든 꽁무니에 닭의 모습이 딸려 나왔다. 뿐만 아니라 흰털을 곤두세운 괴상한 야수 그림도 펄럭이며 끌려나왔다. 세상 어디에서도, 책에서조차 본 적 없는 짐승이었다.
승은 이마를 누르고 베개에 턱을 묻었다. 부러진 늑골이 등가죽을 뚫고 나와 몸 가득 피를 뒤집어쓴 야수 따위는 과장된 상상화려니 관심 둘 필요 없었다. 문제는 그 짐승과 닭을 앞세워 시야를 꽉 채우며 나타나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미간을 좁히고 눈두덩을 눌렀다. 손끝에 눌린 안구에서 피어오른 동그라미 떼가 승의 내부에 어떤 가격을 주고 있었다. 아까 낮에 방으로 돌아가는 청년을 놓칠세라 아무 말이라도 시키려고 다급하게 그림들을 가리키며, 저건 혹시 설인이냐고 터무니없는 말을 던졌을 때 흘낏 떠오르던 청년의 미소. 그 미소를 본 순간부터 승은 심기가 불편해졌고, 청년의 팔뚝 흉터에 날아가 꽂혔던 시선은 여태도 그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잔상이 강해서 멀미가 났다. 승은 다시 거실로 나갔다.
“그 친구, 그림도 그렸다니?”
티슈로 손을 닦던 연두가 누구? 하며 돌아봤다.
“저 아래 닭 기르는 남자 말야. 우연히 봤어. 저번에 니가 얼핏 얘기했었잖아.”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던데 우연히 봐?”
“그림도 그렸냐구.”
“몰라. 공학박사였다던 걸?”
“어려 뵈던데.”
“그러니깐 유명했겠지. 스무 살에 쓴 논문이 화제가 돼서 일간지 반면을 장식했던 인물이래. 몇 년 전에 몽골에서 부상 입고 돌아왔을 때도 매스컴 탔다던데? 난 뭐 분리수거 하러 갔다가 경비아저씨랑 아줌마들 얘기만 들었는데, 닭이 자꾸 우니까 소문이 여까지 올라왔나봐. 폐인처럼 칩거라던데, 정말 잘 생겼어?”
연두가 눈웃음쳤다.
“어떻게 다쳤는데?”
“차가 굴렀대나봐. 같이 갔던 약혼녀는 부상 입은 채 실종 돼버렸구. 근데 그림 얘긴 뭐야?”
“히유. 이놈의 집구석도 엄청 답답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