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 좀 전에, 새마을운동을 꼭 성공시켜야 하는 박정희의 세 가지 목표로 첫째, 도농격차의 문제, 둘째, 정치적 지지율, 셋째, 유신의 기반을 말씀하셨는데, 그 세 가지가 너무 주관적인 판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기에 어떤 근거가 없지 않은지요?
김영미 | 그 부분들은 워낙 일반적 얘기니까, 별다른 데이터를 넣지 않았습니다.
이문재 | 당시에 야당과 표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으니까 정치적 지지율이나 유신의 기반, 두 개는 충분히 해석 가능한데, 과연 박정희 정권이 정말 농촌을 잘 살게 하고 싶었느냐 하는 문제에는 상당한 의구심이 듭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1972년에 3천에 마을마다 시멘트 3백 포대씩을 지원하고 나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이 역시 367쪽에). 그러다가 이재영 씨 같은 인물을 만나서 새마을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걸 보면, 박 정권이 도농격차가 심하다,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한다는 조급증은 있었으되,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벌인 새마을운동의 근본적인 모순은 농촌을 잘 살게 하겠다고 하면서 중공업 정책, 수출 우선 정책을 추진한 것이라고 봅니다. 곳곳에 산업 기지와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필요한 저임금 노동력을 다 농촌에서 뽑아왔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급격한 산업화를 위해 농업, 농촌, 농민을 ‘말살’하는 정책이었다고 봅니다. 농촌을 진정 살리고 싶었다면 급격한 산업화를 선택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선생님이 꼽으신 새마을운동의 첫 번째 목표가 의심스럽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은 언제 끝난 건가요?
김영미 | 지금도 하고 있는 거죠.
이문재 | 그런데 새마을운동 전반에 대한 시기 구분이 조금 모호해 보였습니다. 고조기와 쇠퇴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이를테면 전두환 시기에도 전두환의 동생이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회장을 하면서 별 비리를 다 저질렀습니다. 그때도 새마을운동이 있었고, 지금도 동남아시아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배우러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궁금한 것은, 책에 새마을운동의 성공적 결과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어느 시기에서 어느 시기까지, 무엇을 성공한 것인지요?
장정일 | 박정희가 죽으면서 새마을운동도 끝난 게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이문재 | 제 입장은 단순합니다. 농촌을 진정으로 잘 살게 하려면 중화학 정책, 수출 지상주의를 선택하면 안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농촌보고 ‘잘 살아라, 잘 살아라’ 그게 말이 되냐는 거예요. 잘 살아보자는 구호에 반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잘 사는 농촌, 농민은 지원하고, 잘 살지 못하는 농민은 그 원인을 농민 자신의 무능력으로 몰아가는 정책은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봅니다. 농촌과 농업을 지켜내면서 산업화를 추진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압축성장을 하지 말았어야지요. 지금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가치관이나 제도 등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저 압축 성장으로 수렴됩니다. 물론 거기에는 분단, 6?25, 식민지 등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겠지요. 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식민지와 전쟁을 우리 스스로 재의미화하면서 당당한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이 없었던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어쨌든 박정희에게 농촌에 대한 깊은 애정은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새마을운동은 완벽하게 실패한 것이라고 봅니다.
장정일 | 글쎄요. 의지는 있었다고는 봐야지요? 채찍과 당근을 들고 새마을운동을 독려했으니까. 하지만 실패한 건 맞죠. 이 책의 말미는 새마을운동의 실패와 함께 새마을운동이 끝난 시기도 자동적으로 설명하고 듯이 보입니다. 344~347쪽에서 발췌를 해 보죠. “새마을운동은 농촌 근대화를 빠른 속도로 앞당겼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을 경과하면서 농민들이 진정으로 잘살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 새마을운동을 경과하면서 농가 부채는 급증했다. (…) 새마을운동으로 한국의 농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춘 주체가 되었는가? 과연 박정희가 그렇게 강조한 스스로의 힘으로 서는 ‘자조’하는 농민이 되었는가? (…) 청년들이 사라진 농촌, 부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생력을 상실한 농촌, 자본주의체제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실패한 농촌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새마을운동이 고조되던 1970년대였다.”
김영미 |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는 달라집니다.
이문재 | 전 농민의 입장에서 봅니다.
김영미 |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성공한 운동이라고 해야겠죠. 동원에 성공한 겁니다. 완벽하게. 4·19를 겪은 나라에서 10월 유신이 10년간이나 유지됐던 것 자체가 굉장한 아이러니죠. 그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농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지표가 90% 이상 나왔던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기보다 자기를 비판하고 있었던 겁니다. ‘난 왜 이렇게 근면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고, 협동적이지 못하고…’ 즉 자신의 문제(자기가 못 사는 문제)를 국가의 농촌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게으름과 비협동심의 문제로 본 거죠. 사실 새마을운동의 핵심은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한 데 있습니다. 정부가 시멘트를 조금 내놓긴 했지만, 정부의 물질적 지원보다 농민들 자신이 내놓은 노동력과 자원과 재산의 비중이 컸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게 새마을운동이랄 수 있습니다. 농민들은 독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자기의 문제로서 농촌 가난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박정희에 대한 비판 의식은 키우지 못했죠. 그러니 주민동원의 측면에서 볼 때는 성공한 거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농민들이 정말 잘살게 되는 부분에는 실패한 측면이 큽니다. 농촌이 지붕이 바뀌고, 전기가 들어오고, 우마차가 지나기도 힘든 도로가 넓혀지는 등 생산력 증대를 위한 중요한 간접 자본들이 확보되면서, 이후에 농촌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기도 했지만, 제가 말미에 쓴 바대로, 새마을운동이 농촌을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력 있는 농촌으로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이문재 | 정일형은 박정희 대통령이 죽으면서 새마을운동은 끝났다고 했는데,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박정희 정권이 농민을 어떻게 계몽했습니까? 새마을 구호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근면·자조·협동 아니었습니까? 방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 거죠. 너희들이 못 사는 이유는 ‘너희들이 게으르고, 못 배우고, 근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꾸면 잘 살 수 있다는 거죠. 저는 그 구도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아니 더 강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청년실업의 문제에 대한 논의 구조를 봅시다.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국가 정책이나 경제 구조에 있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 자체에 있다는 겁니다. ‘눈높이를 낮춰라, 그럼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어서 스펙을 갖춰라’ 등등. 새마을운동 시기, 정권이 농민들에게 구사하던 논리와 달라진 게 없습니다. 박정희 시대 이후 농업 관련 정책은 그야말로 일관성 있게 추진되었습니다. ‘농업은 경제논리로 보면 효율성이 없으니 포기해라. 대신 우리가 반도체, 자동차, 배 많이 만들어서 그 이익으로 값싼 농산물을 들여오면 된다’ 이겁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뿌린 씨앗이 너무 큰 거죠.
장정일 | 새마을운동이 농민들의 문제를 자신의 정신 문제로 축소하면서 국가의 정책적 책임을 희석한 면도 있지만, 하늘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모든 문제의 해결 주체다’는 근대의 에토스를 심어준 것은 또 다른 자산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문재 | 모든 것이 너의 문제라고 하면서 선택의 권리와 함께 책임을 부여한다면 좋은 자산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무슨 권리를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국가와 사회가 져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고스란히 전가하지 않았나요?
김영미 | 새마을운동에서 자조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했지만, 사실 새마을운동에서 원하는 것은 자율적 농민이 아니라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농민이었죠. 자조를 강조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지도를 더 강조했어요. 지도자를 육성하고 지도자들의 지도방침에 따라서 거기에 순응하는 농민을 원했죠. 농업생산에 있어서 농민의 자율성이 지지되고 격려되기보다는 농촌지도소를 통해서 나오는 농법과 농작물 실험 등에 순응하는 주체로 길들여가고,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새마을운동을 경험하면서 농민들의 자율성이 실종됐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마을운동 시기에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 중의 하나가 농민과 국가의 마찰이기도 하죠. 농민들은 농업상의 국가의 지도를 고스란히 따르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소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발성과 자생성을 억압하고 가시적인 성과―공무원의 경우 자신의 업적에 들어가기 때문에―전시적인 사업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농민들이 빚을 끌어안게 되는 사례들도 많이 있습니다.
장정일 | 이문재 선배는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사실로서의 새마을운동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뿌린 사고방식으로서의 새마을운동은 지금까지 이어져있다고 하셨는데, 김영미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영미 | 그 부분은 제가 미흡했을 수도 있는데, 저는 그것도 누구의 새마을운동이냐에 따라 시작과 끝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한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이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마을운동이 있었다’는 것인데, 끝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농민들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지지기반 지지세력으로 확보하려고 하는 새마을운동의 정신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국가가 농촌 엘리트들을 동원해서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새마을운동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는 거죠. 농민의 관점에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서 새로운 마을로 변화’시켜 나가려는 의미의 새마을운동도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시대만 다루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은 박정희가 죽으면서 당연히 끝이 났다고 봐야겠죠.
이문재 | 새마을운동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고,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는 지금도 건재하다고 들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역사학계의 반응은 물론이고 책에서 언급되었던 분들, 그리고 일반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김영미 | 지난해 6월에 나오고 6개월 만에 재판 1000부를 찍었는데, 인문서치고는 많이 읽힌 거죠. 새마을운동 단체의 경우 새마을운동이 뭔가 의미 있는 거라는 자기마취와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그들도 새마을운동을 어떻게 정치 역사화해야 할지 의미부여를 못 하고 있는데, 이 책이 나온 거죠. 이 책에서 제가 얘기한 것은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과 민중기한의 새마을운동은 서로 교차하면서도 다른 가치지향과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였는데, 뜻밖에 그 부분을 새마을운동 단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장정일 |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인가요?
김영미 |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면 박정희 정부의 독창적 창안이고 탁월한 리더십으로만 해석해 왔는데, 실제로는 그 밑에 새마을운동을 만들어갔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와 관련해 나온 것이 요즘 새마을운동 발상지 논쟁입니다. 지금 여러 곳에서 자기 고장이 새마을운동 발상지라고 얘기하고 있죠. 포항·청도·기장·평택 등. 그렇지만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떤 고장, 누구의 영감을 받아서 이 운동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영감을 줄 수 있는 마을은 많았죠. 그런 면에서 박정희가 ‘새마을운동 이전의 자생적 새마을운동’을 국가적으로 전유하기 이전에 활동했던, 자생적 농촌지도자들이 역사적으로 전혀 자리매김되지 못 하고 평가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기회를 얻은 거죠.
장정일 | 새마을운동이 국가에 전유되기 이전에 활동했던 자생적인 새마을운동가들은 이 책을 수긍하겠지만, 국가 주도의 새마을운동을 담당했던 분들은 부정적이겠네요?
김영미 | 그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새마을연수원에서 나오신 분들(60대)이나 새마을운동아카데미 같은 데서도 이 책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역사학계의 경우, 경제학은 잘 살기 위해서 하니까 자본을 대변하지만, 원래 인문학이란 것 자체가 인간(소수자들과 약자)을 대변하는 학문이니까 거기 속해있는 역사학도 박정희 시대의 독재체제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입니다. 새마을운동을 관치적 운동으로 보고 거기에 대해 부정적인 거죠. 아마 역사학계에서 새마을운동 자체에 접근한 연구서는 이 책이 첫 번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문재 | 역사학계의 ‘새마을운동’이네요. (웃음)
장정일 | 혹시 이 책이 출간된 다음, 알려지지 않은 자생적인 새마을과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제보가 줄을 잇지는 않았나요?
김영미 | 예. 이 책이 나오고 나서 저에게 전화가 많이 와요. ‘새마을운동 지도자이기 때문에 내 얘기를 들어 달라’ 또는 ‘내가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보여주겠다’는 거죠. 그 가운데 한 통은 ‘새마을운동은 내 아이디어였다’는 제보였는데, 충주까지 달려가서 그분 인터뷰를 했어요.
장정일 | 그분 이야기를 신빙할 수 있었나요?
김영미 | 그 나이 또래에는 이상한 분들(치매)도 계십니다. 그래서 구술할 때 곧바로 집으로 방문하죠. 집으로 가야 가족들의 이야기, 집안에 가지고 있는 자료 등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분은 농대를 나오시고, 농촌과 농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신 분이셨습니다. 이분과 연결된 분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 가운데는 대통령상까지 받은 자생적 지도자도 계셨고, 그분들의 말은 자기 마을의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15년 전에 시작됐다고 증언하셨습니다.
장정일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이 책에서 착안했던 주제가 지금 여기저기서 입증되고 있는 거네요.
김영미 | 제 논리로 말하자면 발상지 논쟁은 너무 당연한 거고, 자생적 농촌지도자들의 제보도 놀랄 게 아니죠.
장정일 | 그러면 선생님께서 이 책을 쓸 때, 당시의 행정 부처에서 새마을운동 업무를 담당하던 사람 중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는 누구를 만나보셨나요?
이문재 | 고건 전 총리가 젊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새마을 정책 담당을 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시 만나보지 않으셨나요?
김영미 | 안 만나봤어요. 저는 새마을운동을 연구하려고 이 책을 쓴 게 아니라, 처음에는 농민들의 경험, 농촌 마을의 변화를 연구하러 갔다가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경험 속에서 새마을운동은 너무나 연속적인, 자신들의 농촌근대화 운동과 연속적인 흐름 속에 접합되어 있던 겁니다.
농촌 청년과 여성을 ‘국민’으로 호명하다
이문재 | 이 책에 실명實名으로 등장하신 분들 반응이 있을 거 같습니다. 당사자한테 부정적인 내용이 들어가면 실명을 사용하기가 매우 어렵잖아요? 일제시기에 이장里長을 하면서 나름의 농촌진흥운동을 하셨던 분들은, 자칫 친일로 여겨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김영미 | 이 작업 전에 이천 시지를 만들 때, 친일에 대한 부분들 같은 경우는 자손들이 고쳐서 주셨습니다. 가명 처리할까 고민을 했었는데, 왜 유명한 사람만 자기 이름을 남겨야하나? 역사 속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도 하나의 권리이고 적극적으로 이름을 남겨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분들을 실명으로 역사에 남겨주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물론 이 원칙은 연구의 사안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장정일 |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친일이다, 아니다’를 판단할 때, ‘어떤 행위를 했나’가 아니라, 그때 어느 직위와 계급이었는가를 따집니다. 제가 알기에는 행정직으로는 군수 이상, 군인으로는 소좌 이상을 친일 인사로 분류하는 게 보통인데, 이 책에서는 면장보다도 낮은 몇몇 구장에게도 친일의 책임을 묻는 듯합니다. 선생님만의 다른 기준이 있는지요?
김영미 | 친일은 인권의 관점에서 비판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이 중요한 잣대가 될 때, 친일 협력자나 반일극우거나 모두 똑같은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게 되죠. 마찬가지로 친일은 직위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한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단순히 구장이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구장 중에서도 소극적인 사람이 있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잖아요.
장정일 | 농촌에서 구장 정도를 하는 사람이 인권에 저촉될 만큼 잘못할 일이 있었는지요?
김영미 | 왜냐하면 징병, 징용 때문이죠.
장정일 | 그건 구장에게 주어진 행정적 업무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면서기를 하고, 또 누군가는 선생질을 해야 하니까요.
김영미 | 30년대에 구장 했던 사람 중에 40년대에 교체된 경우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그건 그만큼 일제의 명령을 고분이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죠. 그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하더라도, 해방이 되었을 때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마을에서 약자가 죽거나 상당한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람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당연히 비판을 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약자들의 아픔이 거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문재 | 새마을운동 초기에 마을 남성들이 군대에 갔다 와서, 그 군대 체험이 마을을 근대화하는 데, 즉 새마을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대목이 서너 군데 나옵니다. 남자들의 군대 체험을 너무 긍정적으로만 보신 건 아닌지요?
김영미 | 너무 긍정적으로 보이던가요?
장정일 | 방금 했던 선배의 질문은 군대 체험을 너무 긍정적으로 볼 뿐 아니라, 마을 남자들의 군대 체험과 새마을운동과의 연관 관계가 너무 추상적이지 않느냐는 뜻인지요? 둘 사이의 연관을 입증할 수 없을 만큼 추상적이지 않느냐를 물으신 거죠?
이문재 | 그 영향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군대 체험이 좋은 영향과 동시에 나쁜 영향도 줄 수 있었을 텐데, 나쁜 점 얘기는 거의 안 하시고 좋은 점, 곧 효율성, 집체주의, 국가로부터 호출된 주체라는 사실만 너무 강조하신 게 아닌가 싶어서요. 아까 인권 말씀이 나와서 더욱 든 생각인데, 국가로부터 호출된 주체라는 것이 얼마나 반인간적인가요?
김영미 | 긍정적이라기보다 효율적 국민화 과정을 겪었다고 봅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의 내면화와 근대적 규율을 내면화한 인간, 그들이 마을로 돌아가서도 ‘국가의 지시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운동의 선두에 선거죠. 이런 것에 대해 연구하려는 사람들도 많은데, 새마을운동이 아니더라도 마을의 청년회 회원들이 어떤 일을 할 때 군가를 부르면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한다든가 하는 이런 일이 대단히 일반적이었습니다.
장정일 | 군대가 국가의 호명과 호출에 순응적인 ‘농촌 청년’을 대량 배출했단 말이죠. 이 책을 보면, 새마을운동이 농촌 사회에 끼친 영향은 세대별로나 성별로 상당한 변화를 가지고 왔더군요. 5·16 이후 농촌에서 30대 청년 이장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70년대의 새마을운동은 청장년층이 동네의 장로長老들로부터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아 왔습니다. 또 새마을운동은 특히나 가부장에 억눌려 있던 ‘부엌데기’ 농촌 여성을 공동체에 기여하는 공적 인물로 만들어냈더군요.
김영미 | 그렇죠. 일제시기에 신여성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일제 말기에 부녀를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여성들이 일본의 정책협력자가 됩니다. 자아실현의 느낌을 받고 적극적인 협력자가 되는 거죠. 식민지시기에 이런 여성이 한둘이었다면, 박정희 시기 이후에는 굉장히 많은 여성들이 기본 교육을 받은 상태에서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기회를 통해, 예를 들어 ‘김영미’라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활동을 하면서 자아실현의 만족을 느끼는 거죠. 그들에 의해 부녀회의 수익이 창출되었으니, 새마을운동은 여성들을 동원하는데도 성공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