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곧잘 치자나무 꽃 꿈을 꾸었다. 상아색 꽃은 왜 그런지 아몬드 파우더 냄새가 나서 그 엷은 꿀 향기 속을 태아처럼 떠돌았다. 핀으로 고정된 채 움직이지 못하는 벌과 같은 태아. 나는 그 꿈속에서 복부만 팽만하고 나머지는 바짝 말라가는 나 자신을 느꼈다. 꿈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를 감싼 달콤한 냄새가 순식간에 썩은 냄새로 변해갈 듯한 예감이 바로 옆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실제로 썩은 냄새는 콧속 가득히 떠돌았다. 세계의 종말은 치자나무 꽃과 함께 오는 거라고 꿈속의 예언자가 말했다. 모든 게 바짝 말라서 떨어져가는 거라고.
나이도 관계가 있었다. 소금물 같은 땀이 이른 아침부터 목이며 얼굴을 끈적거리게 했다. 사람을 만날 때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최악의 기분으로 굴러 떨어지게 하는 땀이다. 불면과 나른함, 입안이며 피부의 건조, 사십견(四十肩) 등 몸 상태가 계속 좋지 않았다.
“그거, 갱년기야.” 여자 친구는 말했다.
“나 아직 사십대야. 물론 아슬아슬하게 걸친 사십대지만.” 불끈해서 대들었다.
“사십대에도 최후의 만찬은 오는 거야. 몸속에 배신자가 있어.” 여자 친구는 웃었다.
그러니까 이유는 중층적으로 뒤얽혀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시마반도에 여행을 다녀온 얼마 뒤에 나는 그 땅을 샀다. 땅은 저금해둔 돈으로 살 수 있었지만 20평 남짓한 집의 건축 비용은 거의 대부분 장기 대출이었다.
1996년 오월. 나중에 나는 그해 오월의 비오는 그날을 거듭거듭 떠올리곤 했다. 새 집의 상량식을 하던 날이다. 그 며칠 전부터 날씨가 안 좋더니 그날도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다. 침침하게 무겁고 음울한 비였다. 어지간한 큰비가 내리지 않는 한 상량식은 할 거라고 해서 그 전날 신칸센을 타고 내려와 어머니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이런 비는 약이 되는 비니까 나쁠 건 없지만, 하필 이런 날에 비를 내리실 건 뭐냐” 하고 툴툴거리는 어머니를 이끌고 시마반도로 가는 기차를 탔다. 창밖은 빗물로 부옇게 흐려졌고 시야는 한없이 어두웠다. 집의 도면은 몇 차례나 도쿄의 맨션과 이 마을 건축사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그때마다 조금씩 수정을 했던 터라서 작업 현황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급한 경사지에 기초가 어떤 식으로 박히고 첫번째 기둥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낼지, 빗물에 흐려진 기차 창밖에 눈을 던지며 나는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기분으로 그날이 대안길일(大安吉日)이라는 것을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기차역에 내려서 택시를 탔다. 십여 분을 달려간 산속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풀고사리며 잡목이 깨끗이 정리되고 맨살이 드러난 산의 비탈면과 그 비탈면에 박힌 새하얀 콘크리트 기초며 철골, 바야흐로 불끈 일어서고 있는 집이었다. 새로 깎아낸 나무 향이 진하게 떠돌고 이미 토대가 닦인 집은 온통 파란 공사용 시트로 뒤덮여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피하고 있었다. 머리칼까지 흠뻑 젖어버린 직인들이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눠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아아, 하고 나는 몸 안에 넘치는 힘을 느꼈다. 소리다. 그들의 목소리에 섞여 환한 소리가 산간의 정적에 울려 퍼졌다. 기둥이 하나하나 세워지는 소리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새것인 기둥이다. 수직, 수직, 수직, 또 수직이 회색 흐린 하늘을 찌르듯이 하나둘 더해져갔다. 그리고 수직을 받쳐주는 수평 기둥도 하나 또 하나.
“아유, 생나무구나. 생나무 냄새는 참말로 좋아.” 어머니가 옆에서 폴짝 뛰어오를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 기둥이 늘어날수록 음울한 하늘과 원시의 녹음을 떨쳐내는 강력함이 그곳에 출현했다. 불끈 일어서는 동물의 첫 울음소리처럼 기둥들은 삐걱거리며 굵은 볼트와 못으로 귀틀과 철골과 대지에 연결되었다. 거칠면서도 엄숙한 의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기둥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대지를 향해 세포를 열고 함께 숨 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웅장한 외침을 올릴 것 같지 않은가. 일어선 순간부터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얻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풍경과 친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어느 것이 대들보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기둥 주(柱)라는 글자가 상징하듯이 주인인 나무를 나는 갖게 되는 것이다. 그때였다. 나는 이 기둥들과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리라고 예감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십 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경사지 아래에도, 대나무 숲이 있는 북측에도 집은 지을 수 없어서 주위의 숲이나 연못에는 어디에도 인적이 없다. 모두 나 혼자 독차지하는 우리 집의 배경이었다. 경사지 아래로 이어진 황량한 길을 불과 오 분만 걸어가면 바닷가로 내려설 수도 있다. 이곳도 나 혼자서만 지나다니는 숲 속 길이다. 부엽토가 두툼하게 쌓여 푹신푹신한 길은 겨울이면 머리 위에서 낙하하는 야생동백꽃으로 빨갛게 물들고 초여름이면 숲 여기저기에 야생 등나무의 아치가 생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나무 숲은 해마다 죽순의 숫자가 늘어나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 난 뿌리의 소재를 신발 밑에서 주장한다.
겨울의 집은 조용하다. 새해 정초, 시업식 전의 시간을 이용해 도쿄의 맨션에서 이곳으로 달려와 닷새째. 매일 아침마다 덧문을 열고 커튼을 걷는 시간이 기쁘다. 날이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비 오는 날도 이 기쁨은 달라지지 않는다. 도쿄의 맨션에도 창 너머에 빛이 있지만 질도 음영도 완전히 다르다. 조금씩 덥혀지는 공기가 소다수처럼 톡톡 터지는 것이다. 나뭇잎 한 장 한 장, 작은 나뭇가지 한 줄기 한 줄기가 또렷하게 보인다. 소음이나 배기가스가 어디에도 없다. 있는 건 부엽토 향기가 섞인 숲의 냄새와 푸른빛을 띤 나무 사이로 흘러드는 햇살뿐이다. 투명한 빛이며 숲의 냄새를 맛보기 위해 한참이나 창가 소파에서 마음껏 게으름을 피운다. 세포 하나하나가 따스해지고 땀구멍이 천천히 열려간다. 빛 속에서 살랑거리는 팔뚝의 솜털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밧줄에 연결된 채 흔들리는 작은 배처럼 느낀다.
이 시간에 도쿄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겨우 닷새 전의 도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치 멀어져간다. 허망한 것으로 변해 있다. 아마 멍하니 묵직한 몸에 커피를 부어 넣으며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체크하거나 전날 도착한 편지며 서류에 대한 답장을 쓰고 있을 것이다. 오후에는 무엇을 했던가. 도서관에 조사할 것을 찾으러 달려가거나 새로 시작하는 칼럼을 준비하며 꾸물꾸물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거리들이 지참한 노트북 속에서 밀치락달치락 북적거리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일에 대한 마음은 대충대충이 되어간다. 내내, 계속, 일을 해온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건강하지 못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살기 위해 건강하지 못한 생활을 선택한다는 건 모순이 아닌가. 그래서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의미한 생활이 좋다, 텅 빈 나날이 좋다고 항상 생각한다.
이미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일도 없어졌다. 치자나무 꽃은 가끔 생각난 것처럼 꿈속에 떨어져 내리지만 옛날처럼 썩은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악의를 품은 치자나무도 에너지를 잃으면 얼이 빠져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게으름이 몰고 온 의사(疑似) 행복이 내게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일들이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보다 훨씬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