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전하고 싶었던 건 몇천 몇백 몇십억 초의 시간 속에서 단 한 순간 동안 천지가 열리고 그 자리에 꿩이 나타난 우연, 그것이 몸속의 아드레날린을 단숨에 흥분시켜 엄청난 행복감을 불러들인 그 신비함이었다.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 아름다운 꿩을 보지 못한 건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어찌됐건 그때 본 꿩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꿩의 등 뒤로는 빽빽하게 무성한 오월의 풀고사리가, 경사지의 북측으로는 광대한 대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수목 사이로 영맹한 초록이 눈에 보이는 공간 모두를 뒤덮고 있었다. 사람의 허리춤까지 자란 거대한 풀고사리에도 놀랐지만 경사지에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줄기를 흔들며 하얀 잎사귀 뒷면을 내보이는 모습이 그야말로 분방하고도 평화로웠다. 대나무 숲 아래로는 여기저기 조그만 연못들이 자리 잡고 어두운 빛깔의 수면에 맑디맑은 파란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게 이 근처 산속에는 어디에나 흔하게 있는, 그리 진기할 것도 없는 풍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풀덤불 사이를 오도카니 걸어가는 꿩, 바람에 휘날리는 풀고사리와 대나무의 술렁임을 아주 오래전부터 찾고 있던, 다른 무엇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의 선물이라고 느꼈다. 과장스러운 말인지도 모르지만 그건 틀림없이 ‘광배(光背)를 지닌’ 풍경이었다.
내 직감을 매혹시킨 이유는 그밖에도 또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어머니는 나이에서 오는 마음의 병에 걸려 있었다. 외계를 스스로 닫아버린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몸이 가라앉아, 몸이 계속 가라앉아”라고 주문인지 자학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되풀이했다. 시선은 한사코 한 지점에만 못 박힌 채 하루의 대부분을 반쯤 졸면서 보냈다. 음식에도 전혀 흥미가 없어서 식탁에 앉아도 밥 한 모금, 찌개 한 숟가락, 두부 한 젓가락으로 마치 새가 모이를 쪼듯이 시원찮게 먹었다. 몸무게가 5킬로그램이나 줄어 자칫하면 30킬로그램 대까지 떨어졌다. 그런 얘기를 아이치 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남동생 부부에게서 몇 번이나 들었으면서도 도쿄에 있는 나는 얼른 달려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의 병세는 조금씩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꾸준히 복용하고, 잠을 자고 싶은 만큼 실컷 잔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 바깥에 나다녀도 된다고 의사가 권할 만큼 회복되었다. “이대로 가면 조만간 자리보전을 하게 됩니다. 계속 누워 지내는 건 싫으시지요?”라는 충고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잠깐씩 산책은 나가게 되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은 여전히 생기가 사라진 채였다.
시마반도로 떠난 여행은 그런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바깥 세계와 접하게 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황금연휴를 이용해 나와 똑같이 독신으로 도쿄에서 살면서 시간적으로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여동생과 함께 고향 아이치에 내려가, 혹시라도 몸이 안 좋으면 곧바로 돌아오자고 어머니를 달래서 출발한 그 작은 여행은 기대 이상의 해프닝을 가져다주었다. 어머니는 여행하는 동안 미역줄기 초무침이 너무 맛있다고 하면서 대합구이 하나에 굴 그라탱 3분의 1까지, 우리가 깜짝 놀랄 만큼 잘 먹었다. 길가의 꽃에 눈길을 던지며 “앗, 저거 그거야!”라고 외치고는 기억에 의지하여 꽃 이름을 입에 올리고 수목의 모양새, 바다 색깔, 바닷바람의 향기를 칭찬했다.
바깥세계에 대한 관심은 아주 사소한 자극에 의해 생겨나는 것일까. 이런 곳이라면 여동생까지 불러들여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함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방책이라는 건 일단 어머니가 “꿩이라도 만나러 나가볼까”라고 생각할 만한 장소를 찾는 것이라고 나는 그 여행을 계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히 시마반도는 어머니가 사는 아이치 현의 가까운 역에서 직통 특급이 있었다. 그걸 타고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당장 그 지역을 잘 아는 부동산중개소에 한번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더니 경사지의 가격이 예상보다 훨씬 저렴했다. 주위에 두어 집, 간사이 도시권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의 주택이 있었지만 그 땅은 면적이 어중간한 데다 모양새도 한 귀퉁이가 모자란 삼각형이고 경사가 급해서 오래도록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돈벌이가 될 만한 매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부동산중개소의 설명은 공부 못 하는 자식 얘기라도 하듯이 퉁명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분양지로서 번듯하게 정비되지 않고, 애초부터 내놓다시피 꿩이나 오락가락하게 황폐한 것이 오히려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그즈음 나는 도쿄가 좋은지 나쁜지 점점 알 수 없던 참이었다. 친구 몇 명이 지방도시나 후지 산 중턱의 호숫가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부러움과 섭섭함이 뒤섞인 마음이 엄습해오고 모두들 나만 남겨두고 떠나가는 것처럼 허전했다. 도쿄는 죽을 때까지 내가 있을 곳이라고 믿어왔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아이치 현의 친가를 떠나 도심 맨션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지 벌써 이십여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십 년 전에는 주위에 우글우글하던 친구들이 해외 근무나 결혼 생활에 뛰어들어, 한밤중에 전화로 “그놈한테 딴 여자가 있었어”라고 남자친구와의 다툼에 대해 긴 수다를 떨어주는 일도 없어졌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 친구가 두 명, 여자 친구가 한 명. 이건 정말 너무 억울하다면서 병으로 죽어간 친구도 있었다. 모두 도쿄에 올라와 일하고 도쿄를 좋아하던 친구들이었다. 모두가 아직 사십대였다.
“희망 같은 게 어디 있어? 요즘 우리 주위에는 온통 무너지는 것뿐이야.” 장례식에서 만난, 예전에 전학련(全?連)에서 활동했던 연상의 남자가 우울한 어조로 말했을 때, 나 자신의 생활도 무너지고 있다고 묘하게 공감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는 건 싫어서 오기로 밤거리를 떠돌았다. 단골 술집에서 과음한 끝에 새벽 공원에서 눈을 뜬 일도 많았다. 택시 타고 가라고들 하는데도 “괜찮아, 이 정도 술에 무슨 엄살이야”라고 잘난 척하며 자전거를 타고 흔들흔들 돌아오다 다리 난간에 그대로 들이박은 일도 있었다. 무너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멸에의 길이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밤중의 강물은 시커멓고 불감증의 바다처럼 밋밋하기만 했다. 집에 돌아오면 방은 나갈 때 그대로 옷이며 머리빗이 바닥 여기저기에 어질러져 있었다. 오래된 맨션이라 그런지 실내는 항상 배수구에서 역류하는 썩은 냄새가 고여 있어서 파이프에 유산(硫酸)이라도 들이붓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