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가 따로 얘기할 것도 없이 기요코는 긴자의 주점을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어 했다. 마루 빌딩 이층에 있던 화장품 메이커 <클레오 연구소>의 홍보부원이라는 직장을 찾아내준 것은 스기였다. 제품의 판로를 도호쿠와 홋카이도 방면까지 확장하기 위한 홍보부원, 이라기보다 마네킹 세 명을 모집하고 있는 것을 발행부수가 얼마 안 되는 패션잡지의 소식란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도저히 안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요코는 금세 의욕을 보이며 응모했다.
면접 날, 오십 명 남짓한 젊은 여자들이 마루 빌딩 이층으로 몰려들었지만 기요코는 간단히 채용되었다. 단기 연수를 받고 곧바로 홋카이도에 출장을 나가게 될 예정인데 괜찮으냐고 여사장이 다짐을 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벼락치기 연수 끝에 선배 여성 홍보부원과 둘이서 9월 말, 기요코는 홋카이도를 향해 출발했다. 하코다테의 트라피스트 천사원 그림엽서에 빽빽이 글씨를 써넣은 서신이 히가시나카노의 스기 게이스케에게로 날아온 것은 10월 2일의 일이었다.
‘…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바깥은 캄캄하고 바람의 신음소리가 으스스하게 들려옵니다. 어제는 큰 천둥소리가 대지를 울렸지만 나는 도리어 속이 후련했어요. 비도 아예 내릴 거라면 대지가 내려앉을 만큼 내렸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삿포로, 아사히카와에 갑니다만, 좀더 머나먼 벽지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요코의 육성이 들려올 것 같은 어조로 면면히 써내려간 엽서였다. 수없이 읽고 또 읽는 사이에 스기의 마음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홋카이도가 바로 저 앞의 땅인 것처럼 아파트를 뛰쳐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코다테를 향해 가겠다는 내용으로 기요코에게 전보를 치고, 그다음 날인 3일 밤에 우에노를 출발했다.
노선을 잘못 선택해서 차표를 샀는지 아오모리까지 유난히 오래 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오모리 역의 플랫폼에 내려 채 십 미터도 못 간 사이에 형사에게 마크를 당해 붙잡혔다.
“당신, 직업이 뭐야?”
“아뇨, 학생인데요.”
“양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까 학생이 아닌데?”
스기는 발을 멈추고 보스턴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호주머니에서 꺼낸 도쿄대 학생증을 내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흘끔 쳐다볼 뿐이었다.
“센다이 이북에서 도쿄대학 학생증이 통할 거 같아?”
“일본 전국에서 통하는 거 아닌가요?”
“흥, 경찰을 우습게 아는군. 자네, 어떻게 될지 알고나 있어? 당신은 거동수상자야. 나하고 함께 가자고.”
“연락선이 벌써 개찰을 하고 있어요. 어지간히 하고 풀어주시죠.”
“어차피 홋카이도에 놀러가는 거잖아. 급할 것도 없지.”
다음 날, 연락선이 하코다테에 도착할 즈음에 분명 기요코가 부두에 나올 텐데, 라고 스기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말하고 싶은 한심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홋카이도에서 육군 대연습이 거행되고 있어서 대원사인 천황이 시찰을 위해 홋카이도에 체류 중이라는 게 연락선 승객을 엄중하게 검문하는 이유였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아오모리 역에 연일 삼십여 명의 사복 경찰이 쫘악 깔려 있었다는 것도 체포된 뒤에 묘하게 친해져버린 미나카미 경찰서 사법주임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그래서 최소한 삼십여 명의 거동 수상자를 잡아들여 경찰서에 유치해두지 않으면 잠복하던 형사들의 체면이 서지 않는 상황이라고 사법주임인 경감이 웃으며 말해주었던 것이다.
준 유치장 시설인 보호실에서 햇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바세계와 완전히 격리된 일주일의 생활은 정말 힘들었지만, 힘겨운 게 때로는 즐거운 추억이 되는 걸까. 그곳에서 함께 지낸 정체불명의, 대부분 노동자로 보이던 열두세 명의 남자들이 스기 가이스케의 기억 속에 지금도 그리움이라는 정념으로 색칠되어 있는 건 대체 무슨 연유일까. 아마도 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여지없이 고독감을 품은 채 응축된 며칠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동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스기처럼 감수성의 주요한 배양토를 자신의 고독감에서 얻어오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아오모리 역에서 도쿄로 돌아가는 우에노 행 상행열차를 타겠다면 여기서 나가게 해주겠다는 사법주임의 말에도 스기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고, 며칠씩이나 땅 밑을 연상시키는 감방 안의 고통스런 생활에서 도망치지 않았던 것은 틀림없이 티 없이 순수한 기요코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 그 사랑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요코는 10월 7일까지 하코다테에서 머물다가 8일부터는 삿포로의 백화점에서 클레오 화장품의 홍보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삿포로에서 묵기로 한 여관의 이름조차 스기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