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접실 문이 소리도 없이 살그머니 열렸다. 문을 등지고 손님과 마주앉아 있던 스기 게이스케는 그 기척에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 기요코가 작은 쟁반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대체 왜 저러나’ 하는 말을 꿀꺽 삼키고 스기가 의자에서 일어서려는데 그보다 먼저 기요코는 테이블 옆까지 다가왔다.
“변변치 않습니다만, 드세요.”
작은 소리로 말하며 머리를 숙인다.
“여보, 괜찮으니까 아래층에 가 있어.”
스기는 급히 테이블의 검은 칠기 쟁반을 다시 집어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내의 등을 감싸다시피 해서 문 쪽으로 데리고 갔다.
“당신이 챙기지 않아도 돼.”
“그래도 손님이 오셨는데…….”
“차는 내가 준비했잖아.”
마호 병의 뜨거운 물로 홍차를 타고 양과자를 곁들여내는 건 한참 전부터 스기가 직접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알았지?”
“네.”
문 밖의 정리함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아래층 안쪽 식당까지 아내를 데려갔다. 차를 끓여낼 생각이었는지 찻잔이며 찻솔, 찻주전자 등 저마다 모양새가 다른 것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스기는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내를 긴 의자에 앉히고 “당신, 좀 쉬고 있어”라는 말을 건네고 복도로 나왔다. 응접실에 돌아가 손님에게 말했다.
“깜짝 놀랐지?”
“사모님이 손님 대접을 해주려고 그러셨는데요, 뭘.”
여성 편집자가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문 밖의 정리함 위에 놓인 칠기 쟁반에는 연보랏빛과 흰색이 반반씩 칠해진 캡슐제 이삼십 정이 단정히 줄지어 얹혀 있었다. 비타민E 보급제였다. KC 병원 신경내과의 환자인 아내에게 처방된 ‘유베라’라는 약인데 거의 먹지를 않는지라 집 안에 잔뜩 있는 것이다. 하지만 캡슐제가 손님을 대접하는 과자로 둔갑해버리는 아내의 머릿속은 대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 걸까.
하긴 과자라고 내놓는 캡슐제 정도에 일일이 놀랄 것도 없다. 현관 신발장 선반에 화장품을 넣어놓는가 하면 식당 찬장에 구두와 슬리퍼를 몰아넣기도 하고 욕실 탈의실 선반에는 냄비와 접시, 크고 작은 식기류가 쌓여 있기도 한다. 일일이 원래의 정당한 자리에 되돌려놓아도 돌려놓는 족족 또다시 엉뚱한 자리로 이동하니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다. 현관 마루에 실내 슬리퍼와 함께 낡은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거나 벗어놓은 구두가 있어야 할 타일 바닥에는 화분이 줄줄이 와 있기도 한다.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의 두뇌가 일으키는 혼란은 우선 기억을 관장하는 기능이 붕괴하는 것부터 시작된다지만 날이 갈수록 그 붕괴의 정도가 심해져가는 것만 같다.
스기 게이스케가 에세이를 연재하는 요리 잡지의 담당 편집자 사카나카 레이코가 원고를 받으러 오기 시작한 게 일 년 전부터였다. 그즈음에는 아직 현관에 구두를 벗어놓고 복도로 올라서면 슬리퍼가 전부 짝짝이고, 그것도 꼼꼼하게 맞춰서 짝짝이여서 제 짝을 찾아 신느라 고생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계간 잡지의 연재 4회째인 지금은 주인인 스기가 집 안의 정리 정돈을 포기해버려서 자칫하면 실내 슬리퍼 없이 양말 발로 복도에 올라서는 게 차라리 편할 정도다.
“선생님 나가 계신 사이에 대충 읽어봤어요.” 조금 전에 건넨 15매짜리 원고를 가리키며 사카나카 레이코가 말했다. “이거, 실제로 있었던 얘기지요?”
“이제는 아내가 내 원고를 읽을 걱정이 없거든.” 스기는 웃으며 대답했다. “재미있지?”
여자친구와 함께 고베와 교토의 음식점을 편력하고 다닌 이야기다. 벌써 오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시니까 오히려 복선이 가득해서 스릴이 있는데요?”
“뭐, 좋을 대로 생각하셔. 당분간 이 연재는 소재가 없어서 곤란할 일은 없어.”
‘음식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어떤 것이든 써달라. 단, 양념을 잘해서’라는 것이 그쪽 잡지사의 주문이었다.
“사모님께 고자질할까 봐요.”
“어허, 편집자는 그런 짓 안 하는 거야.”
“글쎄요, 그건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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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아오야마 고지(靑山光二)
1913~2008. 고베 출생. 도쿄대학 미술사학과 졸업. 대학 재학 중에 동인지 『해풍(海風)』 창간. 『여행에의 유혹』 등 사소설 연작소설을 발표한 이후 임협소설로 방향을 바꾸어 『법 밖으로』, 『수라(修羅)의 사람』, 『치쿠부 섬의 정사』 등으로 세 차례에 걸쳐 나오키 상 후보에 올랐다. 2003년, 90세의 나이에 집필한 「슬픈 나의 연인」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상을 수상하여 큰 화제를 불렀다. 아흔 살, 인생의 기나긴 희로애락의 터널을 빠져나와 서서히 뇌의 진액도 말라갈 즈음에 마지막 가녀린 불꽃같은 창작의 감성을 조심조심 지펴가며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참으로 희귀한 작품이다. 2003년 아흔 살에 이 작품을 집필하면서 ‘나는 7년 뒤쯤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 5년 뒤인 2008년 9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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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양윤옥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히라노 게이치로 『일식』 번역으로 2005년 일본 고단샤의 노마문예 번역상을 수상했다. 그간 번역한 책으로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 『장송』 『센티멘털』,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 마루야마 겐지의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 『납장미』,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 『칼에 지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장미도둑』,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스무 살 도쿄』 『올림픽의 몸값』, 히가시노 게이고의 『유성의 인연』 『붉은 손가락』 『악의』 『졸업』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이치카와 다쿠지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연애사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1,2), 그 외 『도쿄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약지의 표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