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무사시마루는 그런 조건 속에서 전기 카펫의 온기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 있었다.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무사 짱, 어때, 괜찮아?”라면서 밥상 밑의 소쿠리 안을 들여다봤다.
그러면 어떤 날은 배를 내보이며 뒤집어져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소변도 보지 않고 소쿠리 구석에 가만히 엎드려 있기도 했다. 소변이 나오지 않는 건 신진대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위기감은 점점 더해만 갔다. 하지만 아침의 냉기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나도 솜저고리를 걸치게 되었다.
게다가 멜론이 사라졌다. 아내가 근처 야채 가게, 과일 가게에 수박과 멜론을 찾으러 나갔다. 하지만 수박은 어디에도 없고 멜론은 어떤 가게나 3천5백 엔, 5천 엔이나 하는지라 아내의 말에 따르자면 “장수풍뎅이에게 먹이기에는 좀……”이라고 생각해서 다바타 긴자의 야채 가게에 가서 유바리 멜론을 사왔다. 이거라면 한 개에 5백 엔이다. 속이 주황빛인 것이다. 내가 시식해보니 맛이 없었다. “이런 멜론은 무사시마루 짱에게는 못 먹여”라고 부르짖으며 지갑에서 1만 엔짜리를 꺼내 그걸로 마땅한 멜론을 사오라고 했다. 아내는 사러 갔다. 하지만 4천 엔에 사온 멜론을 잘라서 시식해보니 이게 전혀 익지를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내가 사온 유바리 멜론을 무사시마루에게 먹이기로 했다. 그런데 내 입에는 전혀 맛이 없던 유바리 멜론을 무사시마루는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우리는 안도했다.
11월 19일 아침은 그해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거실의 가스스토브를 켜자고 했다. 하지만 오후에는 그다지 춥지 않았다. 아내가 무사시마루에게 유바리 멜론을 잘라서 넣어주자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이 양쪽 뒷다리를 버둥버둥해가며 기뻐했다. 물론 양쪽 모두 끝마디가 없는 다리였지만.
다음날인 11월 20일 아침, 여느 때처럼 아내가 나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무사 짱, 어때, 괜찮아?”라고 말하며 보자기와 그 위에 걸친 털 스웨터를 걷어내자 소쿠리 안의 무사시마루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쪽 앞다리를 안쪽으로 오그렸고 약간 비스듬한 자세였다. “무사 짱, 왜 그래? 왜 안 움직여?”라고 아내가 소쿠리 가에서 무사시마루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무사시마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백목련 시든 잎사귀 위에서 죽어 있었다. 무사시마루가 <충식산방>에 온 지 정확히 사 개월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나는 지난 1974년 5월 26일 아침에 반슈시카마 고향집에서 어머니가 안방에 계신 할머니를 깨우러 갔더니 그 전날 저녁까지 건강하시던 할머니가 이불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었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향년 구십 세. 나이에 부족함이 없는 호상이었다.
아내는 울어서 눈이 부은 채 거실 서랍장 위에 붉은 감잎을 깔고 그 주위에 요요기 공원에서 주워온 상수리나무 잎을 펴놓고 그 안에 무사시마루의 시해를 안치하여 제단을 마련했다. 사체는 돌 같았다. 무섭도록 평생 독신이자 동정이었다. 나는 반듯하게 서서 양손을 맞대고 부처님의 크신 가르침인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암송했다.
오전에 아내의 고향인 시모우사 구주쿠리하마의 이이오카마치에서 내 책 『금륜제(金輪際)』의 출간을 축하하며 빨갛게 삶은 큼직한 꽃게와 감주를 보내왔다. 밤에 그 꽃게로 아내와 함께 무사시마루의 초상 통야주(通夜酒)를 마셨다. 생각해보면 무사시마루가 우리 집에 온 것은 묘한 인연이었다. 아내가 “최근 네 달 동안 나는 무사시마루 덕분에 행복했어”라고 말했다. 나는 큼직하고 빨간 꽃게를 보며 “이건 무사시마루의 열반 축하야”라고 말했다. 아내가 “꽃게를 먹었더니 어쩐지 썰렁하네”라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에게 죽음의 슬픔이 덮쳐왔다.
* 다음 주부터 가와바타 야스나리 상 제29회 수상작인 「슬픈 나의 연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