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몇 장이 개찰구 앞 길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빗금을 그리며 내리치는 가느다란 비가 우산을 펴려고 멈칫거리는 사람들의 아랫도리를 쏴아 적시고 금세 방향을 바꾸어 이번에는 역과 맞닿은 커피숍 유리문을 한 차례 쓸고 지나간다. 거의 동그란 모양을 한 광장 주위로 키 큰 건물둘이 빙 둘러싸고 있어서 그런지 이곳에서는 도무지 예측하기 힘든 방식으로 바람이 움직인다.
해 저물녘인 데다 진한 회색 구름마저 하늘을 뒤덮고 있지만 개찰구 근처는 이상하게 환한 조명 덕분에 귀가하는 학생이며 직장인의 등에서 어딘가 들썽들썽한 분주함이 느껴진다.
우산을 비스듬히 비껴쓰고 사치코는 광장으로 발을 옮겼다. 광장을 끼고 역과 마주한 슈퍼에서 모자란 것 몇 가지를 사가지고 들어갈 생각이다. 집에서는 시어머니가 배가 잔뜩 고픈 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시어머니와 둘이서 사는 생활에도 슬슬 익숙해졌으니 오늘 저녁에는 그녀를 위해 야채와 조개를 초 된장에 무쳐 먹어볼까 하고 생각했다.
길에 달라붙은 종이에 자칫 미끄러질 거 같아 그녀는 발치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 종이에는 선명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얼굴인 듯한 것이 복사되어 있었다. 그걸 피해 발을 내딛으려고 할 때였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 같은 축축한 체취가 풍기더니 어떤 남자가 쓰윽 그녀에게 몸을 붙이며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빈손이 없어 그냥 고개만 저어 필요 없다는 뜻을 전하자 남자는 우산 밖으로 나온 어깨를 움츠리며 다른 통행인을 둘레둘레 찾고 있었다. 후줄근한 상의 주머니에 종이가 다발로 꽂혀 있었지만 오늘 날씨는 삐라를 나눠주기에는 아무래도 적당하다고 하기 어려웠다. 노인네 같은 움직임인데도 멀어지는 참에 언뜻 본 덥수룩한 수염의 옆얼굴에는 뜻밖에도 그녀의 남편과 동갑쯤이거나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몸짓이 있었다.
슈퍼 입구에서 우산을 접을 때, 왠지 마음에 걸려서 사치코는 역 앞의 잡답 속에서 남자의 모습을 찾아봤지만 개찰구에서 다시금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사람들 때문에 찾을 수 없었다.
그날도 점심때부터 날씨가 어쩐지 수상쩍었다. 오후에 한바탕 쏟아지고 이윽고 멎는가 싶더니 사치코가 저녁을 차리고 있을 때 또다시 거센 빗소리가 들려오는 식이었다.
항상 하던 대로 사치코는 아홉시까지 남편 마사오의 귀가를 기다렸다. 아홉시에서 오 분만 지나면 된장국을 데우고 밥을 떠다가 텔레비전을 상대로 혼자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 대개는 여덟시 반쯤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남편과 둘이서 식사할 때도 텔레비전은 켜놓고 있어서 드문드문 이야기는 해도 시선은 화면으로 향한 채였다. 알코올에 약한 남편은 저녁 반주 습관이 없어서 식사는 어이없을 만큼 금세 끝난다. 찻잔과 석간신문을 들고 냉큼 소파로 옮겨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사치코는 항상 식탁에 팔을 괴고 꾸물꾸물 오래도록 앉아 있곤 했다.
어쩌다 그날 밤처럼 혼자일 때는 하염없이 뭉그적거리며 재미도 없는 텔레비전에 멍하니 시선을 보내고 있기도 했다. 화면에서는 봄장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어서 날씨가 맑아져도 그리 길게 가지 않고 구름이나 비 오는 날이 더 많을 거라고 했다.
아침에 널어둔 빨래가 얼마나 말랐는지 보려고 베란다로 나간 사치코는 우선 밤공기를 깊이 들이쉬고 내쉬며 어둠을 내다보았다. 약해진 빗발 저 너머로 역전 빌딩의 불빛이 뭉쳐져서 조그맣게 반짝이고, 이렇게 간다면 한밤중 지나서는 비가 그치고 구름도 걷혀 일기예보대로 내일 날씨는 틀림없이 맑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아직 눅눅한 빨래도 내일 낮에는 바짝 마를 것이다. 높은 하늘에는 비구름의 터진 틈새로 남보랏빛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요염할 만큼 촉촉한 물기를 품은 밤공기가 살갗에 감겨들었다. 콧방울을 벌름거리며 그 내쉰 숨 같은 공기를 맡으려다가 그녀는 퍼뜩 등을 떠밀린 듯이, 어라, 지금 몇 시야,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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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이와사카 게이코(岩阪?子)
2000년 「비 때때로 비?」로 제26회 수상. 1946년 오사카 생. 간사이가쿠인 대학 문학부 졸업. 1986년 「미모사의 숲을」로 노마 문예 신인상, 1992년 평전 『화가 고이데 나라시게의 초상』으로 히라바야시 다이코 상 수상, 이 작품을 계기로 고향 오사카의 사투리가 몸에 밴 단편집 『요도가와 강과 가까운 동네에서』를 출간한 것이 작가로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일상의 깊은 부분을 어루만지는 음영 짙은 필치로 독자적인 단편소설의 세계를 구축했다. 글을 쓴다는 수작업의 온기와 치열함을 체현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1994년에 「요도가와 강과 가까운 동네에서」로 무라사키 시키부 문학상 수상. 그 밖에 『매미소리가 들리고』, 『야마키 씨, 쇼헤이 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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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양윤옥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히라노 게이치로 『일식』 번역으로 2005년 일본 고단샤의 노마문예 번역상을 수상했다. 그간 번역한 책으로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 『장송』 『센티멘털』,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 마루야마 겐지의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 『납장미』,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 『칼에 지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장미도둑』,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스무 살 도쿄』 『올림픽의 몸값』, 히가시노 게이고의 『유성의 인연』 『붉은 손가락』 『악의』 『졸업』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이치카와 다쿠지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연애사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1,2), 그 외 『도쿄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약지의 표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