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사람들
사장의 침대. 임종. 사장, 노동자1, 2, 3, 4, 가족(사진만 남은), 의사, 파출부.
사장 그 친군 안 온다는 게야?
의사 오고 계시답니다.
사장 벌써 오래 됐는데?
의사 오고 계십니다.
사장 내가, 죽을 모양인데, 그 친구가 안 오면 안 되지. 하긴 볼 낯이 없을 거라. 내가 지한테 해준 값에 비하면. 하지만, 지도 벌은 엄청 받았드만. 오면 좋으련만.
노동자1 사장님, 으흐흑.
사장 그래, 아득바득 키운 식구들은 저렇게 사진만 남고, 자네들이 있어주는구만. 아문 아문. 자네들이, 그렇지. 아줌마도, 고마워.
파출부 사장님, 세상이 참 이리 야속하네요. 편히 가세요, 사장님. 미련 두지 말구…
사장 허허. 아줌마도 눈물 흘릴 때가 다 있군. 그래, 정이 들었지.
파출부 드러운 정이니, 다 잊으세요, 마음 푹 놓으시구, 뒷일은 걱정 마시구요.
사장 그럼, 그럼. 돌아보면 피눈물이 나는데 무슨 미련이 있겠나.
노동자1 사장님!
사장 자네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닐세.
노동자2 아닙니다. 저희들이 너무, 심했습니다. 용서하시고, 기운을 내십시오.
사장 허허, 의사 양반?
의사 네.
사장 이 친구들 희망 하나는 끈질기구만. 그래, 거의 본능적이야. 아, 이 판에 날 보고 기운을 내라네. 역시, 노동자들이야.
의사 기운을 차리셔야죠.
사장 아냐, 아냐. 나이 든 사람이 빈말 말게. 난, 벌써 죽은 사람인데. 죽어서 너무 오래도 살았어. 그것도 내 복이지. 미치지 않고서야, 그걸 어떻게 맨 정신에 견뎠겠나.
파출부 아니, 정말 가족들은, 사장님 이러실 줄 모르고, 여행을 떠났다니까요. 오고 있습니다.
사장 허허, 여행? 아줌마, 나 죽으면 금방 나한테 거짓말한 거 내가 환히 볼 텐데, 허허. 아줌마도 어지간히 급했군.
파출부 사장님!
의사 영세는 정말 안 받으실랍니까?
사장 어, 됐어. 내 죄는 내가 치러야지. 난, 돈 많은 놈들 죽기 전에 기부하고 죽는 게 젤로 꼴 보기 싫더라. 뭔가, 뒤가 구리다는 거 아냐? 허허. 물론 죄야 나도 많지. 겁은 실실 나는군, 솔직히.
노동자4 그래두, 사장님만 한 분은 없으셨어요.
노동자1 그러믄요, 하느님 같은 분이죠.
사장 자네, 또 나 죽고 나서 이 친구들한테 핀잔 들을라 그러나. 그리고 막판에 날 물 먹여도 분수가 있지, 아, 하느님한테 불려가는 사람보고 하느님이라 그러면 난 또 어떡해? 그리고 자네…
노동자3 네.
사장 자넨 날 아직 원망하나?
노동자3 아닙니다.
사장 왠지 마음이 쓰이는군. 그래, 자네들 울산 내려갔을 때 정말 미웠네.
노동자4 잘못했습니다, 사장님.
사장 이 말 하면 믿지 않겠지만, 자식들 속 썩이는 것보다 훨씬 더 아프고 미웠어. 내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힌 것 같았으니까.
노동자3 저희도 무척 괴로웠습니다.
사장 그래, 그래. 아, 숨이 차.
파출부 (노동자1에게) 따님들 일 아시우?
노동자1 (파출부에게) 쉿! 그걸 어떻게 말씀을 드렸겠어?
사장 귓속말을 하는군. 그래. 내가 모르는 일이 훨씬 더 많을 거야. 모르는 게 차라리 속 편한 일들이.
노동자1 그게 아닙니다, 사장님.
사장 아, 괜찮아. 나무래는 게 아니구. 이 정도로도 내가 쓰러졌는데, 아무렴. 모르고 지내야지. 반이 뭐야, 나 같은 사람이면 아마 십 프로도 모르고 지내기 십상일 게야. 끄응, 그러니 미친 듯이 멀쩡한 듯이 사는 것 아니겠어? 그런 거지.
파출부 참, 그게 아니라니까요,
사장 난 말이야, 그래 자네.
노동자2 네.
사장 난, 사회주의가 왜 망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 그건 흡사 대기업이 중소기업 말아 먹는 것 같았을기라, 안 그렇게 생각하나?
노동자2 글쎄 전, 좀.
사장 그래. 난, 그래두, 자네 걱정은 안 하네. 원래 자네 걱정은 안 했어. 신념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니까.
노동자2 별 말씀을,
사장 자네, 우리 딸아이 옛날 선배랬지?
노동자2 예. 옛날에 좀.
사장 아, 그때 아예, 각시 만들어버리지 그랬어?
노동자2 예?
사장 걘 어느 쪽에도 속하질 못했어. 그게 화근이었지. 그게 젤로 가슴이 아프네, 난.
노동자2 저도 사장님과 저희 사이에 일어난 그 일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장 아냐, 아냐. 그 얘기가 아냐. 그거야 자네들 할 일을 했던 거지.
노동자2 아니, 저도 그 얘기가 아닙니다. 사장님도 말씀하셨지만, 거기서 그렇게, 그런 식으로 사장님을 대상으로 싸울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뭔가, 좀 남루하고 또, 살벌하기만 했던 게…
사장 그래 그건, 좀 누추하고 남루하긴 했었네. 앞으론 남루 자체를 무기로 삼지는 말게. 내 생각엔, 나만 그런지 모르겠네만, 노동자 세상 어쩌구 하는 애매한 말보다, 그런 냄새가 더 본능적으로 자네들을 깔보게 만들어. 위험 분자, 파괴 분자로 보게도 만들고. 뭐, 그거야 내 탓이기도 하지. 아, 운동하다 선거판에 뛰어든 사람 봐. 졸지에 머릿기름에 세수한 듯 매끈해지잖던가. 사장이 남루하니, 사장 몰아내는 투쟁도 그럴 수밖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노동자4 아니, 사장님보다 더 그랬다는 거죠.
사장 난 아직, 이가 있는 세상이 더 정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세.
노동자4 아뇨, 그게 아니고. 더 큰 문제는 사장님을 원래 사장님보다 더 남루하고 못된 분으로 짐짓 여겨버렸다는 거예요. 그거 말고는 사장님하고 싸울 명분이 없으니까. 게을렀던 거죠. 무식했고. 너무 눈에 보이는 투쟁 성과에만 급급했구요.
사장 더 깊이 보면, 왜. 싸울 이유야 충분히 있지.
노동자3 바로 그 얘깁니다. 전 그걸, 울산 내려가서 알았어요. 그리고 전, 사장님 말씀도 뭔가 이해가 가요.
사장 무슨 말?
노동자4 그, 사회주의가 망한 거 이해하시겠다는 말씀이요.
사장 아 그런가? 자네도 그런 공부를 했던가? 그렇지, 그렇지. 때가 때니까.
노동자4 텔레비전만 봐도 온통 사회주의 얘기 난리 아닙니까?
사장 자네도? 사회주의라…
노동자3 공부를 했다는 게 아니구요.
사장 아냐, 그렇지. 노동자들도 텔레비를 보지. 그 생각을 내가 왜 못했을까?
노동자1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 내가 노동자를 위한다, 위한다 하면서도, 도대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란 생각을 안 했다는 얘길세. 노태우 얘기가 아니고. 그래, 그게 따지고 보면, 완전히 일만 하는 기계로 봤다는 얘기도 되겠군. 자네 얘기가 그런 뜻이었던가?
노동자2 뭐, 그런 얘기기도 하겠고, 사장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사장님과 별반 다르지 않게 노동자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끄럽습니다.
노동자4 울산 가면 더 확 다르죠.
사장 그건 나도 모를 지경이로세.
노동자2 저도 모르고요. 그런 제가 노동운동이랍시고, 사장님 회사 같은 데를 쳤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파출부 이 사람, 잘 하면 관리자 되겠네?
사장 허허. 저 아줌마는 내가 가는 날까지 악담이야. 대단해, 정말. 아니 저 사람 어디가 관리직 할 사람이야?
파출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예요.
노동자2 아주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려면 더 많이 배우고, 더 겸손해져야죠.
사장 그렇다고 우리 딸아이처럼은 되지 말게.
노동자2 전 따님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사장 별 말씀을. 그 친군 안 온다는 게야?
의사 오고 있습니다.
사장 도대체 어디 만큼 오고 있다는 게야?
의사 제가 나가보고 오지요.
사장 됐어, 있게. 그 사람이 오겠나.
노동자4 올 수 없을 겁니다.
노동자2 이 사람!
노동자3 아냐. 아실 것은 아셔야지. 아마, 오시지 못할 겁니다.
노동자1 그만 하래두!
사장 괜찮아, 괜찮아. 나도 알아. 그 사람은 오면 온 게 당연하구, 안 오면 안 온 게 당연하구. 식구들은? 아, 식구들은, 못 온댔지.
노동자4 아뇨, 식구들은 정말 오고 있고요.
사장 자네.
노동자4 네?
사장 내가 그러면 덜 슬퍼할 것 같은가?
노동자4 아닙니다.
사장 그것보다도, 울산에 살면서. 뭐가, 다르던가?
노동자3 글쎄요, 노동자는 강철같이 강하다는 것…
의사 아, 그 쓸데없는 얘기는 왜 자꾸 해.
노동자3 예. 그렇군요.
사장 아냐, 난 그 얘기를 해야 돼.
파출부 몸에 안 좋으세요. 좀 쉬셔야지.
사장 이 사람,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지금 임종 중이야. 유언 중이라구.
파출부 얘, 사장님 성질이야 제가 잘 알죠.
사장 아줌마도 들어 봐. 그래 좋아. 거기까지는 나도 알겠네. 그렇다면 상대방은 더 강해 보이지 않던가?
노동자4 그랬습니다.
사장 그럼, 절망감이 거대한 것 말고 굳이 차이가 있던가? 자네들이 그 엄청난 것과 싸워 이길 엄두가 나던가?
노동자3 그걸 전 잘 모르겠어요.
노동자4 우린 이제 사장님과 싸우는 게 아녜요. 더 큰 사람들이 있죠, 사장님이 키웠지만 사장님을, 식구들 못잖게 잡아먹으려 했던…
노동자1 이 사람, 말이 너무 지나쳐!
사장 괜찮아. 사실인데 뭘.
노동자4 사장님의 부하였던, 지금은 방약무인인 그 재벌들…
사장 그 사람들도, 제 나름대로 사연들이 있는 사람이네, 그걸 알아야 해.
노동자4 그래요, 따지고보면 우린 사장님의 미래와 싸우는 거죠, 우리의 미래가 말입니다. 그거에 비하면 사장님께 대한 우리들의 행동은 참 유치하고 철없고 거칠었어요.
사장 그 사람들하고 싸우는 것은 더 힘들 걸세.
노동자4 알아요, 하지만 사장님이 힘든 것하고는 좀 다른 성질이란 생각이 들어요, 우리도 이젠 알겠어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분노와 대기업 노동자들의 그 거대한 힘, 그리고 사랑이 발하는 위력한 힘을.
의사 이 사람, 그만해.
사장 그걸로 재벌이 무너지겠나?
노동자4 아니죠, 문제는 그것만이 재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혼자가 아니고 우리 뒤에도 무언가가 있다는 것, 우리도 무엇의 반영일 뿐이라는 생각이 뚜렷이 든다는 거예요,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죠. 그게 엄청난 힘으로 느껴지고.
사장 아아, 도대체 언제 그 전쟁이 끝난단 말인가.
노동자4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게 사장님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유산인지 모르겠습니다, 재벌과 식구들에게는 남겨 주지 못한 그 어떤 것, 그게 가장 소중한 것 아닙니까.
사장 허허. 하긴 나도 싸워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네. 하지만 그 생각은 겨우 드는데, 도무지 이길 엄두가 안 나는 거라. 허허. 이거 내가 사장 신분에 너무 주제넘은 소린가?
노동자2 아녜요. 전, 어렴풋이, 우리가 싸우는 게, 아마도, 사장님의 희망을 정말로 확실하게 실현시켜 드리는 것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들곤 합니다.
사장 호오, 이거 강철 무지개를 선물로 받고 세상을 뜨겠네 그려. 나도 못한 걸 자네들이 말인가?
노동자3 사장님이 못하셨으니까, 우리가 말입니다.
사장 자네들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나? 자네들이 나보다 강하다는 증거가 있나?
노동자2 그러니까, 두 배로 노력해야죠.
사장 그럴 이유가 있나, 꼭? 아니, 그 이유야 얼마든지 있는 걸 테지만, 자네들이 해야, 꼭 자네들이 해야만 가능하다고 볼 이유가 있나?
노동자2 있지요. 저는 그것을 신념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사장 나도 신념은 갖고 살았네. 최소한,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는 치사한 놈은 아니었어, 나도.
노동자2 압니다, 사장님.
사장 정말 아나? 자네들이 그걸 정말 아는 게야? 아냐, 아직 모를 게야. 그리고 그걸 아직 모르면, 자네가 말한 그 신념이란 게, 여전히 애매모호하기 마련일 게야. 감히 하는 말이네만.
노동자3 맞아요. 형 말은 아직, 내 가슴에 뚜렷한 가능성으로 와 닿지는 않아. 네 말도 마찬가지고.
노동자4 난 그걸 누가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니까.
노동자2 그래, 나도 이젠 그걸 느껴. 전에는 조급하고 화만 났는데. 나도 이제 그걸 구체적으로 느껴.
사장 허허, 내가 좋은 세상 못 보고 떠나는군. 아니, 비꼬는 게 아닐세. 자네들은 정말 옛날의 나를 많이 닮았어.
노동자4 아녜요, 지금의 사장님도 저희가 많이 닮았습니다.
사장 그래선 안 되지. 나야 애당초 온 길이 달랐던 사람이니까.
노동자3 아녜요, 사장님이 이룩하신 것을 더 많이 물려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장 난 비극뿐이었네, 내 생애는, 남겨줄 것이 없어.
노동자3 바로 그 비극을 물려받아야죠. 기울였던 노력과, 모순과, 그 실패와, 그 모든 것을. 그래야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거죠. 사장님.
사장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조금 위안이 되는군.
노동자3 사장님! 저는 사장님 따님을 사랑했었습니다.
노동자1 이 사람, 기어이!
의사 허허, 그만두세요.
사장 그래, 그 일은 나만 모르고 다 아는 모양이군. 난, 저이가 내 큰아이 좋아했던 것만 아는데. 그래, 죽을 때가 돼서 그런지, 그것도 그렇게 충격적으로 안 들리는군, 그땐 그렇게 난리를 쳤구만.
노동자1 사장님. 용서해주십시오.
사장 아냐, 오히려 내가 용서를 빌어야겠네. 내가 평생 염원했던 것도 바로 사랑이었건만, 그게 그냥 애정을 주면 되는 건지 알았어. 그 애정이 배반당했다 싶으면, 나 혼자 길길이 뛰고 말이야. 그건 사랑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독재 아니었겠는가.
의사 자, 이제 그만.
사장 그래, 나도 이젠 말 할 힘이 없어. 마지막으로, 그래. 마지막 부탁이야. 자네들, 그리고 아줌마…
노동자1, 2, 3, 4, 파출부 예.
사장 내 식구들을 부탁해. 자네들한텐 꼭 그 부탁을 하고 싶네. 그 이상 사람들한테는, 염치가 없어.
파출부 예. 염려 마세요, 사장님.
사장 아직 안 죽어. 왜 울먹이는 거야, 벌써부터? 그래, 하긴 난 벌써 내 사후를 봤군. 그것도 행복인가. 그래, 아직은 내가 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건가. 내 후대들이 이렇게 서로 싸우고 있으니 말이야. 뭔가 쓸쓸하군. 추워. 난로를 좀 피워줘. 그래. 그렇게 따지면 누구나 다 그렇지. 난, 죽는 게 아니고, 자네들이 내 울타리를 빠져나가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드는군.
노동자2 그래요, 저희들은 여직, 사장님 울타리 안에 있었지요.
사장 그래, 내 바깥은 더 좋은 세상이기를 충심으로 바라네.
노동자1 아니죠, 저희들이 사장님을 모시고 가는 거죠.
사장 그래. 더 좋은 세상이 되기를, 거기 나도 있다면 좋겠지. 나와 이어진다면. 그러고 보니 자네들은 모두, 내 딸들을 사랑했군. 좋은 일이야. 내가 자네들 사랑했던 것처럼, 비뚤어진 데가 조금씩 있었겠지.
노동자4 사장님!
사장 그래. 자네도. 누군가를 사랑했군. 그래, 그때쯤 되면 그 사랑이, 이어질 수도 있겠지. 자네들, 꽤 괴로웠겠구만, 미안하이. 그 친구는 안 온대?
의사 오고 있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파출부 사장님, 식구들도 보셔야죠. 조금만 더.
사장 더 기다릴 수가 없어.
노동자1 사장님!
노동자2 사장님!
사장 어. 그런데, 춥다. 의사, 불… 좀.
파출부 사장님, 으흐흑!
사장, 죽는다.
파출부 이럴 수가 없어, 이 개새끼들!
파출부 퇴장.
의사 운명하셨네. 미안하이, 더 할 말이 없구만.
의사 퇴장.
노동자1 당연하지요, 사장님. 저희는 항상 사장님 곁에, 그 속에, 그 바깥에 있었습니다. 이젠 너무 서운해 하지 마셔요, 사장님. 으흐흑.
노동자2 무언가가, 육화되었어. 꼭, 상처만은 아닌 어떤 것이.
노동자3 무언가가 뒤집혀졌어, 꼭 멸망만은 아닌 어떤 것이.
노동자4 난 이제 알겠어. 우리가 왜 패배했는지. 어렴풋이, 알겠어. 근육이 딴딴해진다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무엇이 몰락하고, 그러나 어떤 세계가 또 앞으로 나아가는지.
노동자2 나아가야 하는지.
노동자3 그래, 나아가야 하는지.
노동자4 나아가야 하는지.
파출부 등장.
파출부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어여, 어여들 나와. 산 사람은 살아야지.
노동자2, 3, 4 퇴장.
의사 등장.
파출부 식사하셔야죠.
노동자1 그래요, 이 사진부터 치우고.
의사 빈 집이 됐군.
파출부 왜 빈 집이요? 저래 든든한 아들들이 있구만.
의사 그걸 바라실까?
노동자1 바라실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젠 정말로 드는구만요.
파출부 셋째 따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노동자1 돌아오실까?
파출부 돌아오실 거예요, 연약하셔서.
의사 아주머니는?
파출부 저요? 저야 뭐. 아가씨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재벌2 등장.
재벌2 어디, 어떻게 되셨어?
의사 조금만 일찍 오시죠.
재벌2 어이구, 형님, 형님!
의사 많이 찾으셨는데. 하긴, 이미 돌아가신 분, 안타까움에서도 해방되신 분이니. 산 자만 애달프거나, 안 그렇거나.
파출부 (방백) 이 위인이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