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반복
재벌 1 초상집, 방 술좌석. 의사, 사장, 재벌2, 셋째 딸.
재벌2 그러니까 아이들이 지 애비 상심할까 봐 속여 왔단 말이지, 어허 효도로세. 사람이 따지고 보면 깨끗이 죽기 위해 산다는데, 자기가 죽을 줄 모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은 것도 큰 복이야, 안 그런가.
사장 큰 복이지. 누가 죽었어?
재벌2 형님, 그 형님이 죽었어요. 형님이 그렇게 아끼시던.
사장 잘 죽었다. 큰 복이지.
의사 하여튼 간에 괜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진찰했을 때는 이미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재벌2 그렇겠지. 자네도 그 방면에는 인제 귀신이 다 됐을 텐데. 그건 그렇고 허어, 효자로세.
사장 어쩔 도리가 없었어.
셋째 딸 아이, 아버지. 제가 모시고 나갔다 올게요.
재벌2 아냐, 그냥 계시게 해. 뭔가 그래도 통하시는 게 있는 모양이로군.
의사 그러믄요. 돌아가셨다니까 오시겠다구 하도 고집을 피우셔서 모시고 온 건데요.
사장 통하는 게 아니라, 완전 내통이지. 잘 죽었어.
셋째 딸 아이, 아버지. 이러시면 집으로 모시고 갈 거예요!
사장 싫어, 싫어. 거긴 싫어.
의사 좀 눕혀 드려.
셋째 딸 그래요. 아버지, 좀 누우세요.
사장 싫어, 이거 놔. 누가 나를 관 속에 집어넣는 거야?
셋째 딸 아이, 참. 아버지!
재벌2 허허, 형님. 저예요. 제가 지켜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염려 마시고 한숨 주무세요.
의사 그래두, 이 집은, 형제가 많은 데두 용케.
재벌2 으응? 어, 그거! 그래, 집안 문제는 없는가 봐. 참, 대단한 형님이야. 족탈불급이로군. 형님에 비하면 난 아직 원시적이라니까. 회사도, 집안도.
의사 회장님 집안이 어때서요?
재벌2 으응, 그게. 뭐, 별다른 큰 일이 있는 게 아니고.
셋째 딸 그건 어떻게 돼가세요.
재벌2 잘 돼가, 조금만 있으라구. 내가 한목에, 이 집은…
의사 예.
재벌2 셋째 딸이 억척이라메. 으찌, 딸까지 그렇게 모두 경영 교육을 시켰을까.
의사 회장님네보다도, 나눠줄 게 많았나 보죠, 뭐.
재벌2 그런가? 하긴 그래. 기업이 일정 정도 오르면 사람이 모자라지, 자리가 모자라진 않지.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기는 하지만.
셋째 딸 돈 있는데 위기가 있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 아녜요?
재벌2 그렇지. 하지만, 그 돈이 엄청나다 보면 기업 위기가 나라 위기로 돼버리니까, 뭐랄까 위기도 너무 크면 눈에 안 보인달까. 하하 다 그런 거 아닌가, 속으로 골병이 들망정, 일단 기업은 크고 봐야 돼. 그쯤 되면, 골병이 골병이 아니지. 그 골병이 몇 백 년 이어지니까, 말이야. 허허.
의사 채무자도 쪼잔하게 꾼 놈이 고소당하지. 몇 천 억 사기 쳐 먹으면 빚쟁이들이 그 돈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더 꿔줄망정 감히 고소는 못한다, 이 말씀 아닙니까?
재벌2 허허,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셋째 딸 왜, 그 대만 같은 데는, 중소기업을 살려서 저만큼 성공했다던데요? 특히 컴퓨터 산업 같은 거요.
재벌2 하하, 문어발 재벌이라구 욕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그래. 남편은 잘 있다드나? 면회했지?
셋째 딸 예. 금방 되던데요.
재벌2 허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으니까. 지내긴 괜찮다 하구?
셋째 딸 예. 적잖이 신경 써주셨더군요.
의사 어이구, 그런 수고까지.
재벌2 허허, 보나마나 또 싫다구 펄펄 뛰었겠지, 안 그런가?
셋째 딸 천만에요. 별 말씀을.
재벌2 괜찮아, 괜찮아. 재벌이란 게 좋은 일 해주고 욕 먹는 데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니까.
의사 그 점은 의사랑 같군요,
재벌2 무슨 소릴. 의사는 그래도 명예가 남잖아?
의사 별 말씀을. 의사는 겨우 갈빗대 몇 개 주물락거릴 뿐이지만, 회장님이야 전 국토를 주무르시지 않으십니까?
재벌2 으흠. 부동산 투기를 비꼬는 말이렷다?
의사 아이구, 천만에요. 그건 오해십니다. 그만큼 통이 크시고 건설적이다, 이 말씀이지요, 하하.
재벌2 괜찮아, 괜찮아요. 아, 부동산 투기 안 하는 재벌이 어딨어? 그걸 숨기는 놈이 또 어딨어? 아, 신문 보니까, 부동산 투기 하지 말라는 말은 맞는데, 하지만 우리가 뭐 아주 야비하게 숨어서 그 짓을 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건 잘못이야. 아, 컴퓨터로 조회하면 나오는 거 우리가 더 잘 알지.
셋째 딸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하세요?
재벌2 허허. 이거 봐요. 금방 고맙다던 사람이 이렇게 목에 칼을 세우잖소?
셋째 딸 아이, 참.
재벌2 정부가 부동산 투기야 막을 모양이지만, 이젠 노골적인 시대가 됐어. 아, 수서 비리다, 페놀 오염이다, 그게 다 뭐유? 노골적으루다, 니기미 우리 아니면 어떡할래? 대안 있어? 내놔 봐, 구구루 잠자쿠 있어, 잠자쿠 있다가 생활이래두 좀 나아지든지, 싫으면 관두던지, 뭐 그런 식 아니우? 그래도 몇 년 전엔, 거 뭣이냐, 목동 아파트 단지 지을 때 얼마나 골치가 아팠어? 하지만 요즘 분당, 일산이 어디 그래. 아, 물론 농민들이 말썽을 좀 부리지만, 그거야 조상 묘 지키겠다는 썩을 놈 몇하구, 돈 좀 더 받으려는 놈 몇뿐인데.
셋째 딸 그거야, 빈민운동이 약화됐으니까.
재벌2 허? 빈민운동까지 하시나?
셋째 딸 아뇨, 그냥 제 생각엔.
재벌2 하여간 대단한 따님이야. 이런 따님을 두고 어떻게 실성까지 하셨을꼬? 후대가 이리 든든한데?
셋째 딸 비꼬시지 마세요.
재벌2 세상이 그렇게 된 거야. 노골적으로, 사회주의까지 돈 놓고 돈 먹기로 된 건데, 없는 놈들이야 더욱 그러는 거라구. 한탕주의? 그게 우리만 그런가? 노조 놈들은 안 그래? 그냥, 날로 한 입에 처먹을라 그러구, 싸가지 없는 놈들. 아니, 미련한 놈들이지. 배우려면 제대로 배우든가, 소련 거기도 가보니까, 완전 돈 밭입디다. 사람들은 억수 어수룩하고. 아,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러면 얼마나 좋아. 걔네들은 우리들 엄청 부러워해요. 어떻게 그렇게 잘 살 수 있냐고. 나도 이젠, 깨놓고 돈 벌 거야. 말이 재벌이지, 속으론 항상 등을 꾸부정하게 굽히고 살아왔는데, 이제 등을 좀 펴야겠어,
의사 허허. 여러 가지로…
재벌2 왜? 의사 할 일이 또 생기셨다?
의사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허허.
적자 등장.
적자 아버님.
재벌2 응, 왜. 전에, 그 의사 선생님 알지?
적자 전에 몇 번 뵀지요. 안녕하십니까.
의사 허허. 이렇게 번듯한 아들을 두시고, 엄살이 꽤 심하시단 말이야. 말년에 아무 걱정이 없으시겠습니다.
사장 아냐, 아냐. 돈이 아니구, 정성.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야. 그려. 눈물로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인생을 논할 수 있으랴.
의사 허허. 이런 초상집에 와서 저런 말씀을 하시니, 의사가 책임이 크군요. 제가 모시고 나갔다 오죠. 하실 말씀도 있으신 것 같고.
재벌2 아니, 그게 아닌데?
셋째 딸 그래 주세요, 선생님. 죄송해요.
의사 죄송할 것 없네. 자넨 자네 일이 있고, 난, 내 일이 있는 거니까. 환자 모시는 거야, 의사의 팔자지. 자, 사장님, 나가시죠.
사장 그럼 내가 환자라는 거야? 내가 환자야?
의사 하하, 나가세요, 글쎄.
사장 어디서 많이 본 놈들인데?
재벌2 허허. 형님 접니다.
사장 난 동생 둔 적 없다. 난 딸이 셋이구, 사위가 셋이구, 손자가…
재벌2 하하, 저도 형님이 키우셨지요.
셋째 딸 아버지. 나갔다 오셔요 의사 선생님하구.
사장 난 니 같은 딸 없다. 응, 셋째는 날 의사한테 맡기지는 않을 텐데. 으이구, 얘가 죽었나, 살았나.
셋째 딸 흑. 나가세요, 아버지, 제발.
재벌2 저자가 필시 나를 두고 환자라 그러는 거렸다? 고연 놈. 의사 주제에.
적자 아버님, 저.
재벌2 응? 괜찮다, 말해 봐라. 저 따님이야, 우리 편 아니냐.
적자 기밀 장부 빼 간 건 밝혀냈는데, 저 집안도 들어 있더라구요.
재벌2 응, 걔들도 집어넣어.
적자 걔들은 피래미들인데.
재벌2 피래미들한테 그리 당했더냐? 집어넣어.
셋째 딸 무슨 얘기예요, 아저씨?
재벌2 응, 자네 남편 곧 나와. 어서 가거라, 시간이 없다. 경찰국에 그 사람 찾아가면 돼, 내가 얘기 다 해놨으니까.
셋째 딸 아저씨?
재벌2 염려 놓거라. 내가 하기로 작정했으면 그 정도 일이야 벌써 끝난 거지. 내가 그리 허술한 사람 같나? 그냥, 집어 여.
적자 그래두, 뒷일이 골치 아플 텐데.
재벌2 아, 걔들이 다 한 짓인데, 구구루 영치금이나 많이 넣어주면 감지덕질 게다. 걱정할 것 없어. 식수를 오염시키고도, 멀쩡한 세상인데, 이것쯤이야. 그놈 참 손은 잘 쓴단 말이야, 탄복했어. 요번엔 넘어가는 줄 알았드만. 회사는 셋째 따님에게 맡기면 돼.
셋째 딸 아, 전 회사 안 맡을래요.
재벌2 왜?
셋째 딸 그냥, 남편 만 나오게 해주시면 돼요. 아버지 모시고 시골에서 살겠어요. 회사 경험도 없구요.
재벌2 호오, 아직도 때 묻히기 싫으시다?
적자 그러니까, 회사는 그냥 지금 이대로 두고…
재벌2 네 이놈!
적자 네?
재벌2 내가 연루된 짓이 뒤가 켕겨서 그러렷다? 그 기밀 서류건?
적자 아, 아버님이 어떻게 그걸?
재벌2 멍청한 놈. 내가 너처럼 어수룩할 줄 알았더냐? 내가 니들 하나라도 믿는 줄 알았더냐? 멍청한 놈. 넌, 니 동생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내가 있으니 너를 택하는 게야, 안 그랬다면, 넌 동생을 이길 수 없었을 게야. 세상이, 회사 사람들이 모두 니 동생을 택했을 게야.
적자 아버님, 용, 용서를.
재벌2 용서 빌 것 없다. 어차피 너는 내가 키운 자식이니까. 빨리 처리해.
적자 예.
적자 퇴장.
재벌2 저리 멍청한 놈이, 음모는 무슨. 아이구, 내 앞길도, 기업 앞길도 눈앞이 깜깜하군.
셋째 딸 아저씨도, 행복한 분은 아니로군요.
재벌2 그래도 난,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지. 그게 자네 아버님과 다른 점이야. 자네!
셋째 딸 예?
재벌2 내 수양딸이 되 줄 수 없겠나? 평소, 난 자네 같은 딸 하나만 있어도 여한이 없다구 생각했는데.
셋째 딸 참 대단한 분이세요, 아저씬? 이 판에 저까지 끌어들이시려구요?
재벌2 끌어들이려는 게 아냐. 이건 진심이야. 하긴 욕심이다, 이건 너무 욕심이 큰 거다, 그런 생각이 들어 입 밖에 내지 않고 간직하고만 있을라고 그랬지만…
셋째 딸 지금의 아저씨보다 욕심이 더 클 수도 있나요?
재벌2 그래. 그렇게 생각하겠지. 욕심으로 살거죽만 남은 추한 늙은이로 보이겠지, 그래.
셋째 딸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런 뜻까진 아니었는데.
재벌2 아냐, 아냐. 자네 말이 맞어. 마음이 허해서 좋은 일 좀 해보려 해도, 그게 또 돈벌이로 보인단 말이야. 문화 사업에다 뭐다 하는 게. 그럴수록 마음은 더 허하고, 그래서 난초다 뭐다 쳐봐도, 또 그게 돈으로 보이고. 도대체 어디 가서 그런 하소연도 못하고. 이런 인생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셋째 딸 진정하세요. 아저씨 삶이 아주 무의미했던 것만은 아니잖아요.
재벌2 그래, 나도 나라가 발전하는 데 기여는 했지. 그건 아무도 부인 못해. 하지만 말이야, 그게 내가 원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면? 나와 상관없이,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거라면? 내 본의하고는 상관없이 세상이 더 나아졌다? 나는 말년에 인생이 이렇게 무상하다? 그런데도 허한 걸 좀 메울라치면 그게, 아무리 도리질을 쳐도 황금처럼 보인다? 그려, 의사 말이 맞아. 내가 환자는 환자지. 황금만 먹고 어떻게 살겠냐, 도무지 따스한 살맛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데. 어어, 여자 얘기가 아니다. 난 여자들을 많이 거느려봤지만, 그게 또 뒤죽박죽이야, 난 지금 걔들이 모다 손을 내밀고 있는 보살처럼 보이지, 허허. 내가 환자는 환자야.
셋째 딸 그건, 아저씨가 이 집만큼 못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허함 아니던가요? 집안도, 재산도?
재벌2 그것도 내가 알지, 그러니 얼마나 내 자신이 허하겠니? 그러나, 이 집도 내가 원했던 온화함은 없어.
셋째 딸 왜요? 이 집은 유산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었다면서요?
재벌2 으음, 원만히 해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을 뿐이야. 더 잔혹하지, 강철처럼. 지금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질게다. 그러나 두고 봐라, 이 집 사람 하나도, 눈 깜짝 안 할 거다. 오히려, 아직도 저런 한심한 재벌이 있었나, 그럴 거야. 자, 제발. 난, 너를 마음속의 희망으로 생각해왔다.
셋째 딸 아저씨가, 노동운동을요?
재벌2 아니, 아니 천만에. 걔들이야, 아직은 나보다도 못하지. 나만도 못해.
셋째 딸 그럼 저는요?
재벌2 네 그 순정함에다가, 내 경영 전략을 합치면…
셋째 딸 프훗. 농담 마세요.
재벌2 이렇게 간절하게 농담하는 사람 봤니, 더군다나 그룹 회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마지막 소원으로 간청하마. 네 아버님 문제도, 정말 성심으로 보살펴드리고.
셋째 딸 아님, 아직 그룹이 못 되셨다는 소리겠지요. 프훗, 아저씨, 아저씨도 유토피아 기질이 있으시네요, 이상주의적인?
재벌2 그기 뭐가?
셋째 딸 뭐, 이를테면 꿈 같은 거죠. 이룰 수 없는.
재벌2 그래. 난 꿈이 있지. 넌 그 꿈을 이뤄줄 수 있어, 제발.
셋째 딸 아저씨. 전 아저씨보다, 노동자보다 못한 사람이에요. 전 아저씨보다 못해서, 그리고 노동자들보다 못해서, 아저씨보다, 노동자들보다 더 현실적이지 못해서, 이미 깨진 유토피아주의자예요. 아저씬 승리한 유토피아주의자지만.
재벌2 거꾸로 아니겠니? 승리한 사람이 이리 허하고, 실패한 너한테 미래가 있는 것 아니겠니? 아니, 그러니까 내가 너와 이렇게 잇고 싶은 것 아니겠니?
셋째 딸 노동자들하고 이으세요.
재벌2 그, 그건 안 돼. 그놈들은 너무 미개해.
셋째 딸 제가 그 사람들과 같이 있다면요?
재벌2 노동자들 세상은 끝났다. 너도 그랬지 않니?
셋째 딸 아니, 제 세상이 끝났다는 거예요. 저는 다행히도, 노동자들에게서, 막연하게나마 희망을 볼 만큼만 실패했거든요. 그게 제가 아저씨를 그나마 인정해주는 이유지요. 노동자들을 키워내셨으니까. 물론, 아저씨 본의가 아니었죠. 물론 저는 아무것도 기여 못 하지만.
재벌2 어차피 세상은 둘 밖에 없다. 노동자들 세상과 우리들 세상. 난 내 길을 통해, 똑같이 좋은 세상으로, 그러나 무리 없이, 천박하지 않게, 피 흘리지 않고 가고 싶은 거야.
셋째 딸 피 흘리지 않고? 프훗. 아저씨가 흘린 피가 얼마나 엄청났는데요.
재벌2 그, 그건 다르다. 그건 세상을 건설하려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흘린 피야.
셋째 딸 그래요, 어차피. 또 투쟁에 피를 흘려야 한다는 사고는, 그 시대는 이미 갔죠. 더는 피를 흘려서도, 또 흘릴 수도 없을 거예요. 땀을 흘려야죠. 하지만, 아저씨가 흘린 것은 땀이 아니라 분명 피였어요. 그것도 개인의 야욕을 채우느라, 불필요한. 아마도, 우리나라 재벌들이 흘린 피가 이미 러시아혁명을 넘어섰을 걸요. 아니면 전세계 재벌들이 흘린 피가. 우리 가족도, 아저씨 가족도 다 그 죗값 아닌가요? 그 피가 몇 백 년 동안 굳어, 이렇게 철면피가 된 거 아녜요?
재벌2 그래, 그러니까. 네가 그 피를 좀…
셋째 딸 저도 죗값을 치러야 한단 말인가요? 좋아요. 그건 제가 치르죠. 남은 일이 그것 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아니, 아냐. 두 번씩 비극을 겪을 순 없어요. 안돼요, 절대로.
재벌2 그래, 맞아. 이걸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해, 최소한. 이걸, 이 비극을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편에.
‘우당탕’ 소리 나며 서자, 적자 등장.
서자 아버지. 저 혼자 한 짓이 아니에요. 형도 같이 했다구요.
재벌2 다 처리했느냐?
적자 다른 놈은, 놓쳤습니다.
재벌2 빙신 같은 놈. 얘는 여기 왜 왔어.
서자 아버지, 형이 시켜서 한 짓이에요. 제 잘못이 아니라구요.
재벌2 니는?
적자 죄송합니다.
재벌2 끼놈! 그러니까 동생한테 맨날 당하지. 데려가거라.
서자 이러지 마, 이거. 다 불겠어.
재벌2 데려가라니까.
적자 나가자.
서자 흥, 그예 어여쁜 따님을 꼬시셨군. 하지만, 소용없을 걸!
셋째 딸 꼬시긴 누굴 꼬셔요.
서자 흥, 꼴에 새침 떼기는. 하지만, 다 틀렸을 걸?
셋째 딸 무슨 소리예요, 그게?
서자 니 남편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닐 걸?
셋째 딸 뭐예요?
재벌2 뭐하는 게야, 빨리 데려가. 빨리, 구치소에 가봐라. 이런, 죽일 놈.
셋째 딸 여보, 여보! 으흐흑.
재벌2 얘야, 얘야.
셋째 딸 퇴장, 재벌2 따라 나가려다가 서자에게 가로막힘.
재벌2 이놈, 비키지 못해. 뭐해, 빨리 데리고 나가지 않구!
서자 두고 봅시다. 내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을 거유.
적자 빨리 나와!
서자 넌, 가만있어. 이건 우리끼리 얘기야. 니가 나설 데가 못돼.
적자 아니, 이 자식이.
서자 그래, 니도 독이 오를 때가 있군. 안 그렇수, 아버지? 이제야 제대로 후계자 키우셨네.
재벌2 니들은 내 맘 모른다. 죽었다 깨나도 내 맘 몰라.
서자 어이구? 이제사, 본연의 아버지 자세로 돌아가시겠다, 이건가?
재벌2 그래, 이놈아. 내가 너에게 못해준 게 뭐 있니?
서자 그래서, 아버지를 완벽히 빼다 박은 내게 이런 대접이슈?
재벌2 넌, 내가 보기에도 끔찍한 놈이야.
서자 아버지가 원래 그렇게 끔찍했던 게 아니구? 나를 보는 게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 보는 거라서 끔찍한 게 아니구?
재벌2 이, 이. 육시를 헐 놈! 너는 살아남지 못하도록 만들겠다, 이놈.
서자 나도 만만치 않을 걸? 아버지한테 다 배운 솜씨 아니우?
재벌2 미련한 놈. 배웠다는 놈이 이 일에 누가 이길 줄 몰라? 넌 아직 내 상대가 못 돼.
적자 가, 이제.
적자와 서자 퇴장.
재벌2 난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어. 다리가, 이렇게, 후들후들 떨려서야. 이러면 안 되는데, 형님. 큰 형님, 작은 형님. 난, 잘못 살았어. 날 좀 일으켜 줘, 제발. 잘못했어.
사장 (음성) 얘야, 얘야. 내 딸아. 어딨니? 이제 집에 가자. 나도 이젠 집에 가고 싶어.
의사 (음성) 그래요. 이제 쉬셔야 해요.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