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몰락과 세계
1장 연극
사장 집. 파출부, 셋째 딸, 의사.
셋째 딸 그러니까, 연극으로 정신 질환을 치료해 보자는 거죠?
의사 그래요. 병원보다도 여기가 더 좋을 것 같애.
파출부 사장님이 원했던, 좋은 세상 속에 사장님을 출연시켜 보자?
셋째 딸 그럼, 남편 역할은요?
의사 내가 하지.
파출부 역시 아가씨도,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군요.
셋째 딸 예? 무슨 뜻이에요, 그게?
파출부 아, 좋은 세상이라면, 당연히 아가씨와 쥔 양반이 사장님을 모신다고 생각하시니까요.
셋째 딸 아, 그랬나? 예. 그렇네요. 꼭 그런 뜻은 아니잖아요. 더구나 지금이야…
의사 허허, 연극은 속마음을 드러나게 해주지. 그래서 치료에도 도움이 되구 말이야, 시공을 뛰어넘어서 말이야, 70년을 10년으로 줄이고, 또 10년을 단지 몇 시간으로 줄이고, 그러나 사실은 몇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 몇 십 년 동안 일어나고, 몇 십 년 일어나는 일이 몇 시간에 압축되어 일어나고, 또 한 겹으로 덧씌워지고, 그러니까 문제는 마음의 현실이야. 연극은 그게 강해. 마음의 갈등이랄까, 그런 게 더 현실 같거든. 환자의 경우는 그런 게 또 치료에 탁효를 발하지.
셋째 딸 하지만 그게 다 현실 갈등의 표현이죠.
의사 물론이지.
파출부 박사시네요, 두 분 다. 연극 박사. 치료 한다면서 무슨 갈등이야, 갈등이. 그냥 평화로운 가정을 보여드리면 되는 거지.
의사 아니, 그건 아니구, 그래 맞어. 내가 요즘 아버님 말씀하시는 거 이리저리 꿰맞추어 보니까, 셋째를 젤로 치셨더라구.
파출부 그러셨을 거예요. 다른 딸들이야 그게 어디 사람이우? 뭐, 사장님은 속도 없는 양반인가? 난,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요?
의사 그럼, 그럼. 그냥 늘상 하는 대로, 파출부야 뭐. 아차, 이거 실례했네.
파출부 당신은 늘상 그래. 일 시켜 먹으면서도 의사 못된 버릇 못 고치고 꼬박꼬박 가슴을 쇠꼬챙이로 쑤신다니까. 그래, 사장님은 날 좋아하셨으니까. 있는 듯 없는 듯한 채로. 모셔 올까요?
의사 그래, 큰언니네 들어오기 전에 빨리.
파출부 와 봐야 별 거 없우. 코가 한 자나 빠졌어. 쥔 양반은 뭔가 큰일 낼 표정이고. 그것도 세상과는 담 쌓았지.
의사 자자, 빨리.
파출부 퇴장.
셋째 딸 이게 소용이 있을까요?
의사 그 양반한테는. 이런 얘긴 뭐하지만, 어차피 실성한 분이니까, 본인이 속 편하시면 되는 거지.
셋째 딸 제정신으로 돌아오실 가망은 전혀 없는 거예요?
의사 지금으로서는. 자식들한테 받은 충격이 정말로 가셔야…
셋째 딸 예?
의사 니들 자손들이 정말로 잘 되어야, 그게 영향을 줘서 나으실 텐데, 그거야 지금 가망 없는 일 아니겠나?
셋째 딸 죄송해요.
의사 아니, 니 탓이겠니.
셋째 딸 아뇨, 제 탓도 있어요. 그냥, 나만 깨끗하면 된다고 생각한 게. 깨끗하게 만들 생각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런 면에선 저도 공범자죠.
의사 우리 세대 탓이 더 크다. 그저, 부모들이 하는 일이란, 자식들이 깨끗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련만, 말은 자식을 위한다면서도, 정작 그것 때문에 세상을 더럽혀놓으니까.
셋째 딸 선생님이야, 직업이 의사신데, 그것 자체가 좋은 일인데요, 뭐.
의사 글쎄다, 그게 목숨 팔고 사는, 가장 비인간적인 장사치가 될 수 있으니.
파출부, 사장 등장. 반암전.
파출부 보셔요. 셋째 따님하고 쥔 양반이 계시잖아요?
사장 거봐, 내가 뭐랬어.
파출부 안 믿으시더니, 그게 또 뭔 말씀이셔요?
사장 안 믿다니, 이 여편네가 나를 노인네 취급할라 그래. 아, 내가 그랬잖어. 꼭 그렇게 될 거라구. 그래,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이 와야지.
셋째 딸 아버지. 이젠 저희가 편히 모실게요.
의사 회사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장인어른.
사장 그래, 자네는 그 무능력한 게 흠이었는데, 지들이 제 풀에 무너졌군. 미친놈들. 아문, 아문.
파출부 그래, 이렇게 될 줄 아셨어요?
사장 그것은 너무도 친근하게, 도처에 편재해 있는, 거의 녹아 흐를 듯한 예감이었니라. 흠, 이놈들. 인간사 그리 단순한 줄 알어? 초복만 해도 벌써 가을이 도처에 잠복해 있다는 소린데, 하물며 인간사야 말할 것도 없지. 아문, 아문.
파출부 그럼, 이제 소원 다 성취하셨어요?
사장 아, 내가 언제부터 흑인 영가를 좋아했더라. 그 지독한 호소력 하며, 인생에 기다림 말고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기다림은 동물적인 흐느낌 같은 것.
의사 그래, 그 기다림이 이제 달성되셨습니까?
사장 그리고 기다림의 결과는, 끔찍한 것.
셋째 딸 아버지?
의사 장인어른?
사장 도대체 이 집엔 아이들 냄새가 나질 않아. 그건 미래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뜻인데.
셋째 딸 아버지. 저희 이제 자식들을 낳을 게요, 꼭.
사장 니들은 애들을 낳고 싶을 때 낳고, 낳기 싫으면 안 낳고 그러느냐? 못써, 애들은 씨가 심어졌을 때부터 생명이니라, 지들 부모 하는 소리 뱃속에서 다 알아들어. 하긴, 태교를 잘못해서 내가 그런 딸들을 낳은 건 아니지. 아문, 아문.
셋째 딸 예. 알았어요, 아버지. 아버지 맘에 쏙 드시는 애들로요.
사장 손주들까지 미웠던 것은 아니다, 걔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
파출부 제 부모 빼다 박았지요, 뭘.
사장 지 어미 같은 사람한테, 그런 딸 나온 것처럼, 뒤집힐 수도 있는 거야. 부모가 자식을 제 맘대로 백 프로 키울 수는 없는 거니까.
의사 그리고 또 뭐가?
파출부 뭐가 또 필요하시냐구요.
사장 나야, 니 엄니나 나나, 사내 하나 놓고 싶었고, 그게 안 되더라도… 으음, 아, 아냐.
파출부 그게 안 되더라도?
사장 착한 사위들 맞아서 화목한 제사상 받고 싶었지, 별거였겠느냐.
파출부 어유, 그건 꿈이 너무 크셨네요. 사장님 같은 세대에, 돈과 가족 간 화목을 다 바라셨다니.
사장 그래도 난, 사랑이면 가능하려니 생각했었다. 완벽한 사랑이면. 그래 맞아. 내가 저지른 결과에 내가 당한 거지.
파출부 어떤 완벽한 사랑? 사장님, 그건 어떤 한 사람으로 완벽하게 구현되는 게 아니고요. 사람의, 여러 사람이 진흙탕 속에 살면서도 조금씩 갖고 있는 사랑이 모여서 겨우 세상을 이만큼이나마, 유지해주는 거예요. 그건 눈에 보이지 않죠. 그걸 이 집안에 다 갖추려고 원하셨다니. 사장님, 그건 욕심이 지나치셨던 거예요.
의사 아줌마, 환자를 너무 자극하지 말아요.
사장 이눔아, 내가 환자냐. 니들이 환자지. 내가 젊었을 땐 그래도 무지개가 있었니라, 세상이 이렇게, 돈이 이렇게 추악하지는 않았어.
의사 장인어른의 꿈은 뭐였는데요?
사장 잘 사는 게 꿈이었지. 아니, 잘 사는 게 행복이고, 모든 사람한테 혜택이고 그런 세상이었지. 지금은 잘 사는 게, 죄악이야. 슬프다, 내 인생이.
셋째 딸 그래도 많은 사람이 옛날처럼 배를 곯지는 않잖아요. 그게 다 아버지가 하신 일이잖아요. 세상이 발전됐고, 또…
사장 니 언니들이, 옛날에도 이렇게 악독하지는 않았다.
셋째 딸 그래서 벌을 받은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사장 너는 그걸 내가 마땅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니?
의사 장인어른, 그들은 장인어른을 해코지하려 했어요.
사장 자네, 그렇다고 걔들이 내 딸이 아니란 말인가. 다 내 품에서 나온 사단들일세.
셋째 딸 아버지. 그래도 저는. 아버지 곁에 있잖아요.
사장 그래, 알아. 나는 너를 ‘제일’ 좋아했지. 그런데, 그 ‘제일’이 문제였어. 아, 내 딸이 너 하나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파출부 독하게 생각하셔야 돼요. 딸 하나라도 사장님 곁에 이렇게 남아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셔야 돼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사장 글쎄, 그 세상을 다름 아닌 내가 만들었단 말일세.
파출부 사장님이 하느님이우? 모든 걸 다 사장님이 책임져야 되우?
사장 최소한 내 집안은, 내가 책임져야겠지. 난, 책임감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야. 잘못된 책임감 하나로.
파출부 뭐가 잘못됐우?
사장 아 내가 키워낸 것을 봐, 내 집안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세상을 봐.
파출부 그래도 보릿고개 넘기구, 사장님한테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저만 해도 그렇구요.
사장 아, 평등하게, 행복하게, 착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은 없는 걸까?
파출부 미쳤군.
셋째 딸/의사 아줌마!
파출부 아, 이분, 정신 말짱하잖아요?
사장 미쳤지, 그래. 난, 미쳤어.
파출부 하긴 내가 미쳤을지도 모르겠군, 정신 말짱한 사람한테 미쳤다 그랬으니, 에이 난 그만할래.
셋째 딸 아줌마, 제발.
의사 놔둬요, 됐어요.
파출부 아, 듣자니, 벨이 꼴리잖아요! 사장 주제에, 뭐?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 놀고 있네.
의사 아줌마, 정말 못 됐구만, 환자한테.
파출부 예. 돌긴 완전히 돌았시다. 아니, 잘 살고 평등한 세상이 어떻게 가능해? 나 참, 학생 놈들 그런 얘기 하는 것도 꼴 보기 싫은데, 이젠 사장까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사장 그럼, 그럼.
셋째 딸 아줌마는 우리 아버지 착한 분인 거 더 잘 아시잖아요.
파출부 그러니 한심하고 복창 터질 일이지요.
파출부 퇴장.
사장 음, 음. 자네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군.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야. 무서워라. 저승사자가 날 데려왔나? 어구, 무서워라.
의사 사장님, 잠깐만.
사장 퇴장. 의사 퇴장.
셋째 딸 아줌마, 아버지가. 아버지가!
파출부 (음성) 날 왜 찾어, 지들 일인데.
셋째 딸 아버지!
셋째 딸 퇴장.
파출부 등장. 조명 밝아짐.
파출부 에구, 인생이 다 실패한 연극 아니겄어. 죽기 전에 원 없이 잘 살다 가면 되는 거지. 왜, 나같이 재물에 혈안이 된 사람한텐 이 모양이고, 저런 헷소리뿐인 사람들한테 진주가 떨어진다지? 이제까지 이만큼이라도 유지해온 게 참 기적이네. 하느님도 야박하시지. 이래저래, 양쪽 인생 다 고달픈 거 아냐? 하긴, 그게 평등인지도 모르겠다만, 에이구.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사장님이 정신이 든다면야, 내가 양보하겠지만서도. 나머지 놈들은 도무지, 자격 미달이구만.
첫째 딸과 첫째 사위 등장.
첫째 딸 여보, 제발. 차라리 절 패세요. 무서워요. 무서워서 못 살겠어요. 아니면, 조, 좋아요. 이혼을 하던가요. 아니, 제가 가진 것 다 드릴 게요. 제가, 나갈까요? 여보. 제발, 뭐라고 말씀 좀 하세요.
첫째 사위 퇴장.
첫째 딸 아줌마. 물 좀 줘요. 아니, 됐어요.
첫째 딸 퇴장.
파출부 니들은 애당초 글렀고, 에이구 병신. 오쟁이 진 것도 병신이지만, 정말 확 두들겨서 혼쭐을 내던지, 아니면 안 살고 말던지. 완전 독재다 싶더만, 별 것 아니네. 뭐 저러고 입 자꾸를 꽉 잠그고 댕긴다지? 꼴에, 충격을 된통 받은 것 보니까, 사랑은 했나보지? 아냐, 저거 지 마누라가 건장한 사내 품에서 할딱거렸을 거 생각하면 도저히 지가 지 분을 못 참아서 저럴 거야. 일종의 변태지. 하이고, 그런 거 보면 돈 많은 게 그리 행복한 것도 아닌데. 아, 없는 집 같으면 저거 아무 것도 아닌데. 며칠 뿌르퉁하다가, 살 한 번 섞고 나면 그냥저냥 사는데, 참.
의사, 셋째 딸 등장.
셋째 딸 아줌마, 너무하셨어요. 전 그래도 아줌마를 젤로 믿었는데.
파출부 이젠 믿지 말아요. 아버님도 사람 너무 믿어서 저렇게 된 것 아니우?
의사 자자, 됐어. 그만해.
셋째 딸 괜찮으실까요? 저러다 더 심해지시는 거 아녜요?
의사 어차피 사장님은 현실과 꿈속을 넘나드니까. 그중에 좋은 것만을 택하면, 맘은 편하실 거야.
셋째 딸 고마워요, 선생님.
파출부 큰언니 들어오셨우.
셋째 딸 에? 우리 온 것 알아요?
파출부 뭐, 알아도, 그럴 정신 있겠우? 냉수 한잔 달래다가 그냥 조마조마 이층으로 올라가던데.
의사 자, 갑시다. 아버지 일은 그만하면 됐어요. 남편 일이나 신경 쓰지 이제.
셋째 딸 글쎄 뭐 별 도리가 있어야죠.
의사 면회는 되나?
셋째 딸 안 돼요.
의사 허허. 이거 민주화가 됐나 싶더만, 도루묵인 것 같애.
셋째 딸 그거랑 상관있는 게 아니잖아요.
의사 상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 재벌 세상이니까, 하하.
셋째 딸 그래요. 그건 더 심해졌죠.
의사 하지만, 재벌이 민주화해주나?
셋째 딸 장사에 도움이 되면요.
의사 우리나란 그렇지도 않을 걸. 민주화해주면 남는 게 없을 테니까. 나, 이러다 반체제 되겠네, 하하.
셋째 딸 우리나라야, 따지고 보면 재벌 빼놓고 다 반체제 아녜요?
의사 그만, 그만해. 자네 실력 내가 다 아니까. 군부도 빼야지? 하하. 아줌마. 난 가요. 오늘 수고했어요. 좋은 세상은 몰라도, 사후 세계는 보여준 셈이니까, 그때쯤이면 그렇게 되겠지?
셋째 딸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돼야죠. 저도 당하구만 살아서야 되겠어요? 하여간, 선생님은 보기보다 더 희망적이시네요, 호호. 아줌마, 저도 가요. 아버님 좀 잘 부탁드려요.
셋째 딸, 의사 퇴장.
파출부 저것들도 내 상대는 못 돼, 비판만 하지. 대들 생각도, 그 안에서 둥지를 틀 생각도 못하니까 말이야. 그냥 속으로만, 한숨바가지지, 뭐. 그게, 얼핏 보면 인품 같지만, 저런 건 거품일 뿐야. 세상을 버팅기는 건, 사랑이건 증오건 간에, 뭔가 악착스러운 거라구. 나? 나야, 근사하지. 성실하고 악착같고, 목표 뚜렷하고. 다만, 혼자라는 게 문제지만. 이런 일은 또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해. 그게 문제야. 혼자서 막을 수는 있어도, 혼자서 이걸 다 슬그머니 실어 나를 수는 없단 말이야. 그러니 맨날 야금야금 쩨쩨하게 놀 수밖에 더 있나? 어라, 이게 누구야?
둘째 딸과 둘째 사위 등장.
파출부 (방백) 그래, 니놈들이 바로 내 상대지.
파출부 웬일이우?
둘째 사위 왜, 내가 아니, 우리가, 못 올 데를 왔나?
파출부 그래서 쥐새끼처럼 도망쳤다가 이제 나타나신 거유?
둘째 딸 저 쌍년이, 어따 대구 쫑알거려, 쫑알거리기를. 야, 이년아, 너 환장했니? 죽고 싶어?
파출부 식물인간 하나 못 죽인 주제에.
둘째 사위 이미 죽은 사람을 왜 또 죽이겠어?
파출부 그렇지 않을 걸.
둘째 사위 그렇게 까발리는 니가 죽어야 하는 거 아냐?
파출부 흥, 니들이 나를 죽여? 그렇게 똥배짱이 있어?
둘째 딸 지아비 죽일 사람이 너 같은 촌닭 하나 못 죽이겠어?
파출부 흥, 그건 쉽지.
둘째 사위 뭐가?
파출부 아, 너희 같은 것들 키운 게 죄지, 가족이 죽이면 감쪽같지, 아 죄 지었겠다, 감쪽같겠다, 지아비 죽이는 거야, 니들 같은 맘만 먹으면, 쉽지. 염라대왕한테 할 말도 있는 셈이겠구. 이승에선 쥐도 새도 모르고, 아주 내세까지 몽창 챙기셨군. 잘 헌다. 그러니, 저리 잘 살지.
둘째 딸 니가 죽을 때가 되긴 됐구나, 저승 얘길 하는 걸 보니.
파출부 니들보단 오래 살 걸? 난, 가진 게 없잖아?
둘째 사위 그것두 자랑이야?
파출부 가진 게 없으니까, 여차해도 손해날 게 없다 이거야.
둘째 딸 그래서?
파출부 오늘은 죽이 아주 짝짝 맞는군. 나 물고 늘어지면, 나야 밑져야 본전이지만, 니들은 손해가 클걸?
둘째 딸 그래서 널 죽이겠다는 것 아니겠어?
파출부 내가 니들 그런 생각 굴뚝같은 거 모르고 여기 있겠니?
둘째 사위 뭐야?
파출부 니들은 없는 사람이 약삭빠르게 굴 때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몰라.
둘째 딸 흥, 겁나는군.
파출부 흥, 그 주제에,
둘째 딸 뭐야?
파출부 그런 니 애비도 못 죽인 주제에, 대가리에 주판 굴리는 소리가 반들반들한 니들이 날 죽여? 여려서 못 죽이고, 대갈빡 좋아서 못 죽일걸.
둘째 사위 우리가 니 같은 거 하나 처리 못할 줄 알아? 다 봤으면서.
파출부 왜 이래, 이거? 내가 남의 집에서 죽어봐, 니 애비를 죽인 것보다 더 의심받을 걸? 니 애비는 자연사로 처리되지만, 나처럼 건장한 외간 여자가 그냥 팩 죽어? 말도 안 돼지. 꼬숩다, 꼬수워.
둘째 딸 뭐가?
파출부 나 같은 년 죽이고 니들 떼들어 살 생각하면, 되게 꼬숩다.
둘째 사위 이, 이게?
파출부 자, 죽여봐, 여기, 바로 여기 모가지를 콱 찍어. 죽여봐, 죽여봐. 죽여봐, 이 개새끼야!
둘째 딸 여보, 가요.
‘뭐야?’ 소리 나면서 사장 등장, 둘째 딸과 둘째 사위 퇴장.
사장 뭣이야? 누가 죽었어? 누구야?
파출부 아녜요. 웬 문둥이들이 적선 좀 하라 그래서.
사장 둘째 애 같았는데, 걔는 죽었을 텐데, 아이구 내 딸아. 내 딸아.
파출부 아니라니까, 그래요.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와요?
사장 그래, 날 잡으러 왔나부다, 아구 무시라. 아구 무시라.
사장 퇴장.
파출부 휴우. 진땀이 다 나네. 위층은 다 죽었나? 그래라, 제길.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