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패배
누추한 하숙방. 셋째 딸, 노동자1, 2, 3, 4.
셋째 딸 아아, 난, 더는 살고 싶지 않아. 이대로 내버려 둬, 좀.
노동자1 아가씨, 그래도 남편을 저렇게 뒀다가는, 아버님도 위험하구요.
노동자2 다시 여기까지 왔군.
셋째 딸 뭐라고요?
노동자2 다시, 여기까지 왔다구.
셋째 딸 그래요, 다시 이런 하숙방까지 왔군요. 그나마 다행이지.
노동자2 그게 아니고.
셋째 딸 또, 뭘?
노동자2 자넨 항상 이런 식이야, 변한 게 없어.
노동자1 이 사람, 말 삼가게.
셋째 딸 놔두세요. 옛날에도 그랬을 테니까. 또, 너무 쉽게 포기한단 말인가요?
노동자2 그래.
셋째 딸 그럼 어떡해? 이런 사람들과 뭘 하란 말야? 그 놈들하고 내통해서 음모나 꾸미던 자들하구.
노동자3 죄송합니다, 아가씨.
노동자4 잘못했어요.
노동자1 이 불한당 같은 놈들!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럴 수가.
노동자2 그건 이 친구들이 충심으로 사과했어요. 본인들도 뉘우치느라 더 열심히 활동했고, 어쨌든 지금 쫓기는 몸이잖소. 내가 다시 백배 사죄하리다.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겠소.
노동자3 형님,
노동자4 용서해주세요, 아씨.
노동자1 아씨, 지금 옛날 일 갖고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셋째 딸 지금 그 얘길 하는 게 아니란 말예요, 저는.
노동자2 그 일도 알아, 하지만 그것은…
셋째 딸 ‘그것은’이라니요? 그건 별 문제가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노동자2 그 일도 물론 혼쭐을 냈어, 완전히 끝냈고. 그 당시로 벌써 끊어졌다고, 울산에 내려간 뒤부터, 벌써. 이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셋째 딸 끊다니? 그럼 이어졌어야 한단 말이에요, 선배 말은?
노동자1 아가씨, 옛날 일은.
셋째 딸 난, 그게 훨씬 더 중요해요. 도대체 언니들을 겁탈한 사람들하구…
노동자2 겁탈이라니,
노동자1 아이구, 아가씨, 제발.
셋째 딸 겁탈이나, 능멸이나.
노동자3 그건 그분들이 적극적으로 원해서.
노동자2 입 닥치고 있어, 임마! 뭘 잘했다고 그래.
노동자3 어이 씨팔, 나도 그거 잊느라구 고생께나 했우. 몸무게가 15킬로나 빠졌는데…
노동자4 난, 완전 노리갯감이었는데.
노동자2 아니 이 새끼들이? 그래 잘했다는 게야?
셋째 딸 이 사람들, 아직도 날 그런 축축한 눈으로 보고 있을 거예요. 으, 소름 돋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노동자1 아가씨, 제발 좀 그만하세요, 제발!
노동자2 그래, 당신은 운동했다는 사람이, 겨우 집안 자존심, 그리고 당신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못 하겠다고, 나자빠지고, 우린 이렇게 모조리 수배자 신세고, 그래야 한단 말이지? 우리가 지금 당신 위해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천만에!
셋째 딸 그게 왜 내 탓이에요? 난, 당신들한테, 될 수 있으면 잘 해주려고 노력했는데, 그리고 옛날에 같이 일했던 선배라니까 더더욱…
노동자2 그게 문제였다면?
노동자1 자네 또 왜 이러나? 제발, 흥분 좀 가라앉히고 의논을 하세, 의논을.
셋째 딸 잘 해준 것도 문젠가요?
노동자2 어정쩡한 게,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
셋째 딸 흥,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노동자2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 아니지. 바로 그게 문제였어. 당신은, 지금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냐. 그저, 대충 해보다가, 가장 엉성하게 일을 하다가, 가장 먼저 좌절하는 쪽이랄까.
셋째 딸 무슨 소리예요, 난 가장 맹렬한 활동가였어요.
노동자2 그게 그 소리지. 난, 자네가 빈민가 출신인 줄 알았어.
셋째 딸 그게 뭐가 잘못됐어요, 존재 이전한 건데?
노동자2 그걸 너무 쉽게 했다는 얘기지, 고민이라곤 전혀 없이. 사실은 그 고민이 전부 운동 에너지가 되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뭐가 그리 소소하게 각박했는지 몰라, 거대한 것들이 무너져가고 있었구만.
셋째 딸 옛날 얘기 하자는 거예요, 지금?
노동자2 그게 왜 옛날 얘기야, 바로 지금 얘기지.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멀쩡한 사장 따님으로 돌아와서 집안 걱정 하고 계신 거 아냐?
노동자1 아가씨, 가십시다요, 이 눔하고는 도저히.
셋째 딸 아저씬 가만 계셔요. 그래 그래서요?
노동자2 시비 걸자는 게 아냐, 딱해서 그래. 도대체 뭐가 어찌됐다는 게야? 뭐 뭐가 그리 아픈 거야? 무너진 게 어디 집안인가, 자네 억장이겠지. 하지만 그 정도 무너진 거 갖고 뭘 그래? 소련이 와장창 넘어가도 다시 힘을 추슬러서 일어나야 하는 이 판국에. 그 정도 갖고 뭘 그리 패배 의식에 벌써부터 물들어 있냔 말이야? 패배 의식이 겉멋이야? 자넨 항상 그런 식이었어.
셋째 딸 자네, 자네, 하지 말아요! 난 지금은 조직원이 아니라구.
노동자2 미안하게 됐군.
노동자3 형, 우리 얘기를, 어떻게.
노동자4 안 되면, 우리끼리 가는 거구.
셋째 딸 아니, 우리 집안 무너진 게 그게 작은 일이예요? 운동 목적이라면 집안을 싸그리 작살내도 괜찮은 거예요?
노동자3 그게 아니라…
노동자2 아니긴 뭐가 아냐. 그래, 그게 소련 망한 것 보다 더 큰일이야? 작살을 내긴 누가 냈다 그래? 속으로 이미 망한 거지.
셋째 딸 소련, 소련 하지 말아요. 소련은 안 그랬나요?
노동자2 그럼 소련 망한 거 하구 같애?
셋째 딸 우리가 소련 바라고 운동했던 거 아녜요. 우린 우리 이유 때문에, 내부적으로 망하고 있는 거예요.
노동자2 거봐, 운동만 해도 객관적으로 보고 있으면서, 자기 집안일에 대해선 판단이 속수무책이군.
셋째 딸 아니, 도대체. 자기 집안일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게 말이 돼요?
노동자2 그럼 운동은, 운동도 당파적으로 봐야 된다는 게 그런 말 아냐? 물론 혈연적 관계보다 더 우월한 사회적 관계로서 말이야.
셋째 딸 흥, 말로는 뭘 뭣해.
노동자2 좋아, 그럼. 그게 골리앗 투쟁 패배한 것보다 더 큰 일이야?
셋째 딸 그걸 그렇게 비교할 수 있나요? 제발, 내 고민도 좀 받아주세요. 선배가 당해보질 않아서 그런 거라구.
노동자2 알아, 알아요. 그걸 내가 왜 모를까.
셋째 딸 그리고 도대체 선배는 요즘 부쩍 대공장 콤플렉스가 있는지, 옛날엔 정반대라서 좀 찜찜하더만.
노동자2 그래, 그게 내게 변화라면 변화지. 엄청난 변화야, 변화가 오고, 패배가 온 거야. 옛날엔 꿈도 못 꾸던 거대한 변화, 그리고 거대한 패배가, 왔단 말이야. 난, 그게 사회주의권 멸망보다 더 크게 느껴져. 흡사, 우리의 패배가 소련 멸망으로 외화되는 것 같은.
셋째 딸 흥. 거대해지고, 관념론화되셨군.
노동자2 그래, 그런 지도 모르지. 하긴 변증법적 유물론이, 관념론을 많이 받아들였던 것 아닌가.
노동자3 이거, 도대체 끼어들 틈이 없네. 아니, 그런데, 골리앗 투쟁이 패배했다구 보슈, 형님은?
노동자4 그럼 패배 아니고, 다 잡혀갔다 왔는데도, 승리유, 형은?
노동자2 그건 일시적인 열세로…
노동자4 그 뒤로 나아진 게 뭔데.
노동자2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냐, 그보다 더 큰 게 있어.
셋째 딸 그게 뭔데요?
노동자2 응, 뭐랄까. 그게 말이야, 난 요즘 운동판이, 공개 노동운동판이 말이야, 그래도 경제주의자는 된다고 봤는데…
노동자3 그래도 경제주의자?
노동자4 경제주의는 나쁜 거 아냐?
노동자2 그래, 그래도 노동운동이고, 경제주의는 된다고 봤는데, 그걸 극복하면 될 거라고 봤는데 말이야…
셋째 딸 그런데요?
노동자2 그게 아냐, 70년대 마르쿠제 읽은 거 그대로야, 아직. 이 거대한 패배가 벌어지는 판에, 아직 운동판은 70년대가, 마르쿠제의 쨉-연타론이 지배하고 있는 거야.
노동자4 마르쿠제? 마르크스가 아니고?
셋째 딸 마르쿠제, 마르크스가 아니고. 아니, 마르크스는 알면서 마르쿠제를 몰라요?
노동자4 모르겠는데요.
노동자3 모르겠시다, 나도.
노동자2 요즘 노동자들은 마르쿠제 모르지, 우리나, 칠자 학번이니까. 옛날 학번이나 그런 거 읽지.
노동자3 아저씬 알아요?
노동자1 마, 실없긴.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나? 묵묵히 일만 해온 사람이.
셋째 딸 노동자들은, 이제 가망이 없고, 지배 체제를 뒤엎으려면, 그냥 끈질기게, 여기저기서, 소규모적으로 저항을 벌이면 된다는 거예요. 그럼 권력이 허약해지고 급기야는 무너진다는 거죠.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죠.
노동자3 그기, 언제 사람인데요?
노동자2 1970년대 사람이지, 아님 신좌파니까 60년댄가?
노동자4 그럼 그 마르크스보다도 한참 뒤네?
셋째 딸 그렇죠.
노동자3 그런데, 왜 그런, 마르크스 때 이미 깨진, 아나키스트론을.
노동자2 그땐 너무 암울한 시절이라, 그렇게라도 진보 사상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지. 해방신학도 그렇고.
셋째 딸 뭘, 그때 이미 노동자계급에 대해선 자신이 없고, 쁘띠적이니까 그랬지. 지금도 그런 거구.
노동자2 아냐, 그게. 그땐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면, 아니 술 안 먹으면 데모도 안 하는 그런 열악한 시절이었잖아. 과거를 좀 따듯하게 감싸야지.
셋째 딸 사실, 그때 술 안 먹고 데모 안하고 공부만 한 사람이 더 똑똑했던 거 아녜요, 운동적으로도?
노동자2 그게 지금, 운동했다는 사람이 할 얘기야?
노동자4 아니, 둘만 얘기하지 마시고. 저 형 얘기는, 백년이나 더 늦게 어떻게 그런 형편없는 이론이 나왔냐, 그럴 수가 있느냐 그걸 묻는 게 아녜요? 안 그러우, 형?
노동자3 그래, 그런 것 같으다.
셋째 딸 그 얘기예요, 바로. 그 백 년 동안 마르크스가 말했던 대로 노동자 해방이 안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따지기 시작했죠. 처음엔 뭔가 잘못해서 그럴 거라구, 이런 저런 이유를 댔는데, 그러다가, 급기야는 노동자계급에게 희망을 두어선 혁명이 안 된다, 다시 학생이나 지식인에게 희망을 둬야 한다, 그리로 간 거죠.
노동자4 소련에선 성공했잖아?
노동자1 거기도 이젠 곧 망한다, 거긴 사람 살 세상이 아닌 갑드라.
셋째 딸 저러시니까요, 바로 노동자들이 저런 소리를 하시니까.
노동자3 우리 같은 노동자도 있잖소, 형님 같은 분도 있고.
셋째 딸 글쎄, 선배님도, 이제까지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쿠제주의자였던 것 아녜요. 그거 남 얘기 한 거 아니잖아요?
노동자2 그렇지.
노동자3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제일 활발하게 운동을 하는데.
노동자2 그래, 그게 우리나라가 혁명 가능성이 제일 많다는, 가능성이 제일 많다는 소린데, 그걸 마르쿠제 식으로 끌어왔다 이 말이야, 내 말은. 마르쿠제는 사실 절망의 표현인데, 말이야. 경제주의가 아니고, 마르쿠제주의란 말이지.
셋째 딸 하지만, 그게 현실이잖아요?
노동자3 뭐가 현실이우? 아, 내 처지에서 보니까, 노동자한테 희망이 없고, 지식인-학생한테로 중심이 옮겨가야 한다는 소리가, 정말 너무도 한심한 소리로 들리는데.
노동자4 나한테두.
셋째 딸 글쎄, 우리나란 좀 다르죠. 그게, 운동할 때 내 희망이었는데.
노동자2 말로만, 분석만 했지, 실천을 안 해서 그래.
셋째 딸 이번엔 또 마오주의잔가요?
노동자2 마오주의나 마르쿠제나. 유격전이나 가두 투쟁이나, 국민대회나 대통령 유세전이나! 다 그게 그거지.
셋째 딸 그럼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노동자4 노동자들을 너무 몰라요, 변혁 이론 한다는 사람들은.
셋째 딸 뭐, 시시콜콜 다 알아야 되나요? 전체를 보고 본질을 보는 건데.
노동자4 뭐, 밥숟갈이 어떻고, 양말이 몇 개 있고 그걸 알라는 게 아니고, 나도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걸 얘기하는 건데요.
셋째 딸 그런데요?
노동자4 난, 그 사람들이 대중적이라고, 대중한테 얘기하자고 하는 소릴 들어봐도 영, 대중인 나한테 그게 대중적이라고 들리질 않거든요. 선진 노동자라고 추켜세우지만, 내 생각에, 선진 노동자가 되려면 아가씨 회사로 다시 돌아와서 쇳물 부어야 될 것 같거든요.
노동자2 생산 사회화 수준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얘기겠지.
노동자4 아, 형. 난 그렇게 어려운 애기는 몰라. 단지, 배 하나 만드는데 드는 쇳덩어리며, 기계며, 그 복잡한 공정에 비하면 걔들 얘기하는 게 꼭 애들 장난감 블록 쌓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혁명이 무슨 소꿉장난이요? 게다가 남루하기 짝이 없는?
셋째 딸 그걸 다, 알아야 하나요?
노동자3 알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거에도 못 미치는 소릴 갖고 대중적이라 그런 단 말이우. 아, 노동자가 자기 사는 걸로 이해하지, 논리로 이해하나? 아니, 그런데도, 그 논리라는 게, 괜히 복잡하기만 했지, 정작 주장은 배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천박하다, 이런 얘기 아니냐? 안 맞어?
노동자4 맞어. 난, 지식인들이 노동자를 너무 알아서가 아니라, 노동자보다 몰라서 문제라고 생각해. 아주 구식이거든.
셋째 딸 당신네들이 다 하시죠, 왜.
노동자2 거봐, 당신은 꼭 그런 식이야. 노동자들이 어찌 또 다 알겠소. 배 만드는 사람한테는 배가 세상이고 텔레비전 만드는 사람한테는 그게 또 세상이고, 공장일 하는 사람은 공장이, 밭일하는 사람은 밭이 세상인 거 아냐, 문제는, 지식인들이, 노동자계급이란 거를, 그 현실적 발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옛날 구식 노동자만 생각하구, 그걸 기다리고, 어쨌거나 자신의 소임을 다할 생각을 안 하구, 즉 현실에 자신을 투여시킬 생각을 안 하구, 그게, 거꾸로도 말이 되지만, 노동자는 자랄 뿐 아니라 자라게도 만드는 존재지만, 현실에 투신하지 않으니까, 옛날식 노동자 관념만 있는 거지만, 그게, 그 옛날이 나올 리 없으니까, 절망하고, 현실은 그것과 무관하게 발전하고, 그러나 운동은 매번 패배하고, 그러니까,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놈들은 이중적으로 패배하고, 그런 것 아니겠소? 지식인들이 제 혼자 관념하다가, 제 혼자 절망하는 거 아니겠소? 그런데, 우리나라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게끔 노동자들이 매일 들고 일어나는 거구, 그런 얘기 아냐, 자네?
노동자4 맞아요.
노동자3 그런 것 같아.
셋째 딸 양 쪽 얘기가 다 맞아요?
노동자4 뭐 별로 다른 얘기 아닌 것 같구만.
노동자2 그래. 크게 다를 것은 없는 얘기지. 현실에 뛰어드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백지장 차이니까. 노동자의 현실에 뛰어들어서, 목적의식적으로 그 수준을 높이는 것.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끊임없이, 현실 속으로 상승시키는 것.
노동자4 목적의식이란 게 그런 거죠?
노동자2 어디 이것뿐인가, 총체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세계의 법칙을 보는 것, 그 법칙에 맞게 자신을 투여시키면서 세상을 법칙에 맞게 변혁시킬 뿐 아니라, 자신과 법칙 자체를 더 드높은 것으로 끊임없이, 변혁시키는 것. 이게 다 목적의식성이지.
노동자3 난, 그게 다 말장난 같애. 다, 잘 해보자는 얘기 아냐?
노동자4 아니, 난 대충 알 것도 같애, 무슨 말인지.
셋째 딸 그러니까 난 현실 기피자고, 선배는 현실 참여자고. 내가 보기엔, 패배한 자의 단말마 같은데요?
노동자2 패배의 교훈이지. 더 당파적으로 돼야 한다는. 그리고 참여라는 말 난 이제 싫어, 마르쿠제 냄새가 나. 아님 사르트르나.
노동자4 이거 오늘, 유식한 얘기 많이 듣네.
셋째 딸 난, 민주주의 운동이나 더 잘할 생각이 들던데요?
노동자2 그건 나도 동감이야. 민주주의가 문제야. 이젠, 노동자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게 강조되기보다는, 노동자야말로 가장 민주주의적인 자라는 게 강조되어야지.
노동자3 형, 또 무슨 노태우 타도 투쟁 하자는 거 아뇨? 그거, 지 놈들이 다 망쳐 먹고, 싸우긴 우리더러 싸우라는 꼴 아냐?
노동자2 그게 아니고, 그건 정치 투쟁이 아니고 정권 투쟁이지. 민주주의 투쟁이란, 이것도 다 운동권 얘기다만, 현실주의 훈련이지. 그게 다 부르주아지의 성과인 건데, 우린 그것만도 못한 대안으로 그걸 우습게 본단 말이야. 부르주아지의 진보적인 면을 받아들여야,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건데. 사실 부르주아의 유산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노동자계급이라는 걸 피부로 체득하고, 그래야만 노동자계급은 물론 다른 계급도 대열에 세울 수 있는 건데. 우린 너무 단절적으로 살았어. 가진 게 좆도 없으면서.
노동자1 맞아요, 옛날부터 내려온 건 일단 지켜야. 그래야 더 나은 세상도…
셋째 딸 꼭 그런 얘긴 아니구요,
노동자3 어이 씨팔, 그만하면 다 알아들었을 것 같으니까, 본론 얘기 합시다. 도대체 토론하다가 본론은 얘기도 못해. 이러니 망하지 젠장.
노동자1 그래, 그래. 이 일을 어찌 할 텐가? 사장님은?
노동자3 어떻게 할 거유, 형?
노동자2 이 분 뜻에 달렸지.
셋째 딸 글쎄요… 애당초 이렇게 시작하는 게 아닌데.
노동자1 뭘요, 아가씨?
셋째 딸 이 분 말씀대로 말이에요, 아저씨… 이렇게 어정쩡하게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
노동자2 나도 그때, 그런 식으로 왕창 밀어붙이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지.
노동자4 우리 얘기요?
노동자2 아니, 우리 얘기야.
노동자4 저분, 아니 이분들 계속 자기 생각만 하시는군.
노동자1 아가씨, 빨리 결정을.
노동자4 그 회장 제안을 받아들입시다.
노동자2 뭐라?
노동자1 그건 좀…
셋째 딸 안 돼요, 그건. 절대로 그쪽도 적이에요.
노동자4 적이 둘이라? 적은 항상 하나뿐이에요.
셋째 딸 그, 그건. 그렇지만.
노동자3 그러죠, 형님.
노동자2 그건 나도 안 된다. 작은 그물 걷어내려고 큰 그물 속으로 들어갈 순 없어. 잡힌 것도 모르고 파닥거리게 될 거다.
노동자4 어차피 해보는 거 아니우? 독자적으로 하든지, 아님 협동 작전을 하든지, 둘 중 하난데. 그 첩 자식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는데, 경찰까지 끼고. 딴 도리가 없어요. 음모엔 음모로…
노동자2 그건 부르주아지의 음모야, 우리들의 음모랑 달라.
노동자3 뭘 그래?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으면서? 이리 질질 끌면 낫나? 딴 방법이 뭐가 있다고 그래? 독자적으로? 아, 법이 우리 편이야 경찰이 우리 편이야? 변호사? 걔들한테 가기 전에 우린 맞아 죽을 거라구. 아니면 이런 일에, 노동자들을 떼로 모아올까?
노동자4 그래도 질 거야.
셋째 딸 싫어요, 전.
노동자1 아가씨, 대체 어쩌시려구.
셋째 딸 이대로 그냥 사는 한이 있어도. 당신들이 알아서 하세요.
셋째 딸 퇴장.
노동자2 거봐, 당신은 아직도 여전하다구. 이게 우리 일이야?
셋째 딸 (음성) 미안해요. 전, 도저히 못 앉아 있겠어요. 결정에 따를게요.
노동자2 이봐요, 잠깐만. 허허. 내, 저 사람 만나는 게 아닌데.
노동자3 이거, 괜히 남의 집안일에 껴들어 갖고.
노동자1 뭣이 어쪄, 이 불상놈아?
노동자4 형, 이거 애당초 역부족 아닐까?
노동자2 승산이 없어. 난 또다시 패배할 수는 없는데. 이젠 더 패배할 여력이 남아 있질 않은데.
노동자3 우리가 있잖우. 뭐 기껏 징역 살 텐데, 뭘 그렇게 무겁게 생각해?
노동자2 아냐, 난, 이 싸움에, 뭔가 내가 살아온 모든 게 집약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서 또 지면, 더는 못 일어날 것 같아.
노동자4 형도, 역시 셋째 따님과 같은 세대 같으우.
노동자2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노동자1 이 싸움은 안 지네.
노동자2, 3, 4 예?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노동자1 자네들은 정말 재벌을 잘 모르는군. 아, 이 집안이야 코딱지만 한 회사 하나 꾸리느라 보니까 집안이 이리 개판이고 하극상이지, 재벌 집안은, 거긴 어림도 없어. 회장이 못 이기는 체 가만 있다면 모를까, 뒤를 밀고 나설 정도면, 서자는 이미 끝장난 거지.
노동자4 코딱지만 한 회사?
노동자1 그래. 그러나 난, 거기다 청춘을 바쳤고, 그만큼 애지중지하네, 그게 자네들과 다른 점이지. 거기 어마어마한 거 자네들보다야 내가 더 잘 알지 않겠나.
노동자2 잘 될까요?
노동자1 잘 될 걸세. 물론, 자네들한테야 산 너머 산이라는 얘기겠네만.
노동자3, 4 아저씨!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