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막 노동자-골리앗-크레인
1장 불침번
골리앗 크레인 위, 동틀 무렵. 노동자3, 노동자4.
노동자4 엇, 이거 5월인데 이렇게 으실으실해. 엇, 추.
노동자3 쇳바닥 아니냐, 바닷바람이 한꺼번에 오고. 엇, 추.
노동자4 형?
노동자3 왜?
노동자4 우리 왜 이렇게 됐지?
노동자3 짜아식, 마, 다 네가 원했던 것 아니냐?
노동자4 난, 형한테 강요한 적 없는데?
노동자3 꼭 씹어봐야 그걸 아냐, 자식. 그래도 너 많이 컸니라.
노동자4 형?
노동자3 그래.
노동자4 여기 이렇게 있으니까, 뭔가 차갑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그치?
노동자3 그래, 우린 죄가 많았어.
노동자4 백프로 우리 탓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개운한 걸 보니, 뭔가 뱃속에 꾸룩꾸룩한 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야, 그치?
노동자3 엇, 추워. 거, 옛날 얘기 하지 마라. 눈물 난다.
노동자4 형은 참 그런 거 보면 감상적이야. 아, 헬리콥터하고 그 난리 전쟁을 치르고도, 쪼께 춥고 배고프니까, 눈물이 나?
노동자3 힘들수록, 옛날 생각은 바늘로 콕콕 쑤시듯이 새록새록 하고, 아픈 것이다. 니는 그래도 젊어서, 안 그런가 보다, 잉?
노동자4 칫!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노동자3 야, 넌 그 눈에 삼삼하지 않냐?
노동자4 뭐가?
노동자3 아, 그, 기집들 살 말이야.
노동자4 형은 아직두, 그 여잘 못 잊었우?
노동자3 잊었지, 깡그리. 그러니 얼굴은 생각 안 나고, 살 속만 생각나는 거 아니냐.
노동자4 힘들었겠우.
노동자3 말도 마라. 누구한테 하소연할 일도 아니고. 그래두 나, 잊으려구, 또 죗값을 치르느라 이를 악물고 일했다. 작업도 억척스레 했고, 조합 일도 열심히 하구.
노동자4 형 정도면 최고 열성 조합원이지.
노동자3 니한테도, 그 놈한테서 연락 안 왔제?
노동자4 안 오던데, 정말, 그 새끼 왜 연락이 없지? 꼭 본전 뽑을라 그럴 텐데? 깨졌나?
노동자3 그런 놈이 어디 쉽게 깨지나. 더 악착스럽게 오래 살끼다. 명줄이 길어, 관상을 보면. 아, 우리 회사 말아 먹고도 배탈이 없잖니. 니, 그 자식한테 뭔 연락 오면 꼭 나하고 의논해야 한데이?
노동자4 형이나 그러지 마소. 난, 사랑한 것은 아닌께.
노동자3 그기 무슨 소리가, 잊었다카이. 그냥, 새벽이라 이리 가슴이 시럽어서, 그냥 얘기 한마디 해본 긴데.
노동자4 알아요, 알아. 형 눈에서 광기 사라진 지 한 1년 됐어, 벌써.
노동자3 광기라니?
노동자4 아, 뭘 잊으려고 자신을 육체적으로 지독하게 자학할 때 눈에 번득이는, 그런 광기 말이야.
노동자3 엇따, 이 눔아 자석. 문자 많이 늘었네.
노동자4 형.
노동자3 …
노동자4 그리 살아도, 살 기분이 날까?
노동자3 뭐가 말이가?
노동자4 그래두, 셋째 딸은 안됐어.
노동자3 야야, 그 얘기는 이제 그마해라.
노동자4 형?
노동자3 와, 형, 형 해쌌노? 니 형 안 죽었다.
노동자4 그 형이, 말은 이해한다고 했지만, 속으로 우릴 얼마나 욕했으까.
노동자3 지금이사, 더 잘 됐다고 안하겠냐. 근디, 계속 노동운동을 하까?
노동자4 전노협에 어딘가 틀어박혀 있지 않겠어?
노동자3 글씨, 그 사람 성향이라면 거기가 어울리기는 할 텐디. 그치만 그 사람 조합주읜가 뭔가를 그토록 비난해 쌌튼디.
노동자4 원, 조합주의가 문젠가. 조합원 생각만도 못한 조합 지도부가 문제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어, 나 참.
노동자3 뭐를?
노동자4 목적의식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그 형 입에 붙어 있던 소리가 그거였는데, 그게 무슨, 목표를 정해 갖고 이판사판으로 앞뒤 보지 말고 그것을 향해서 곧장 가라, 뭐 그런 뜻은 아닐 거 아냐? 전체를 보고, 전체의 단계와 순서를 보고, 역사적으로 여기까지 온 경로와, 거기까지 가는 경로를 총체적으로 보라는 뜻일 텐데. 우리가 배 한 척 나오는 과정을 훤히 한눈에 보고, 가슴에 담아놓듯이 말야.
노동자3 그런데?
노동자4 그런데 우린 목전의 목표만 보고 달려가 죽는 부나비 인생 같단 말이야. 그건 목적의식적인 게 아닌데.
노동자3 지금 말이가?
노동자4 아니 지금은 꼭 그렇진 않지만. 뭐, 크게 보면 지금도.
노동자3 그래두, 여기 와선 좀 나아졌지 않나?
노동자4 그래, 나두 그렇게 생각해. 참 잘 왔다구 말야. 와, 크더만. 처음 공장엘 들어서는데, 엄청나더만. 노동자들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정말 잘 살고 말이야. 막말로 중소기업 노동자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한눈에, 한가슴에 확 들어오더만.
노동자3 그럼 소원 풀었네.
노동자4 그래, 난 그렇게 생각했어. 배때기가 불러 싸움하긴 글렀구나 생각도 들긴 들었지. 아냐, 그건 애시당초 아주 사소한 대목이었어. 크레인이니, 갑판 도크니, 보는 것마다 거대한 게, 뭔가 거대한 투쟁이 벌어질 거다, 정말 투쟁다운 투쟁이 벌어질 거다. 그런 생각이 정말 거대하게 나를 덮쳤으니까.
노동자3 나도 그랬어, 뭔가에 짓눌리는 느낌이면서도, 괜한 긍지가 생기더라구. 내 것도 아닌데 건물이나 기계들 보면 뿌듯하고 말이야.
노동자4 정말 노동자가 됐구나, 자랑스러운 노동자가. 난 그런 생각이었어.
노동자3 그런데,
노동자4 그런데, 이 노조라는 게 말이야. 꼭 옛날에 우리가 거기서 하던 짓들을 반복한단 말이야. 말로는 전노협한테 큰소리 뻥뻥 치면서,
노동자3 큰소리칠 만 하제.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것만 해도, 전노협 1년 치 일보다 더 큰 효과를 내겠구마.
노동자4 그거야 그렇지, 그걸 누가 모르나. 그런데, 말로는 그렇게 큰소리를 치면서도, 전노협 흉내를 내고 있단 말이야.
노동자3 그기야, 흉내라고 고깝게 말할 게 뭐 있노? 서로 상부상조하고, 좋은 거 있으면 따라가고, 그러는 기지.
노동자4 글쎄, 내 말이 그 말이야. 큰소리 칠 것도 없고, 기죽을 것도 없고, 다만 좋은 점, 이를테면 투쟁 경험 같은 거, 그런 걸 배우면 되는 건데, 내가 보기엔 거꾸로거든. 쓸데없이 큰소리치고, 배우는 거는 오히려 나쁜 거만 배우고.
노동자3 뭔 말인지 대충 알것다. 니가 느꼈던 그 긍지에 맞게 조합이 운영되지 않고 자꾸 꾀죄죄해진다 이 말이제? 전노협을 도와주고 배우고 해야 하는데, 돕지도 않고 나쁜 것만 배운다 이 말 아이가?
노동자4 그런 거지. 그건 이미 패배해왔던 길인데 말이야.
노동자3 햐, 그건 그렇고, 계속 고향 사투리 나오는 폼이 어째 우리도 좀 궁상맞구마.
노동자4 난 궁상맞은 정도가 아냐. 그 거대하고 크던 것이, 지금 이렇게 올라와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거대하게 앙상하고 황량해 보이고, 또 그것이 너무 거대해서 내가 개미 같아 보이는 거야. 우릴 버텨주는 게 아니고, 우릴 너무도 왜소하게 만들어 버린다구.
노동자3 니가 요새 시집 깨나 읽는다 싶더만, 좀 이상해졌구마.
노동자4 농담하는 게 아냐, 형. 난, 그래서 그 목적의식적이라는 게 뭘까, 그런 생각이 번뜩 든단 말이야.
노동자3 이젠, 변혁 이론이가?
노동자4 아냐, 이 거대한 것을, 누군가가 거대한 힘으로 설명해주어야 하는데. 우리가 처음 느꼈던 그 거대한 긍지가, 투쟁을 통해 더욱 강철처럼 단련되고 빛나야 하는데. 왜 조합 투쟁을 할수록 정반대 생각이 들까, 뭔가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것처럼?
노동자3 그거야, 전세가 불리하니까, 의기소침해져서.
노동자4 불리한 전세는 누가 만들었지?
노동자3 야가, 어디 미국 갔다 왔나, 잠이 들깼나? 아, 낮에 그 난리를 치고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 몰러?
노동자4 올라오기는 우리가 선택해서 올라왔잖아?
노동자3 그기야, 쫓겨서 올라왔지.
노동자4 그럼 골리앗 투쟁이 아니고, 골리앗 도피잖아, 아냐, 우린 우리가 택해서 올라온 거야,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선택했던 거라구.
노동자3 뭐, 어쩔 수 없는 건 뭐고, 선택한 건 또 뭐냐.
노동자4 글쎄 그걸 잘 모르겠다니까. 그게 우릴 이렇게 왜소하게 만드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노동자3 니, 아무래도 눈 잠깐 붙여야 쓰것다.
노동자4 형?
노동자3 와 그래?
노동자4 그 아저씬 잘 있을까?
노동자3 글쎄, 연락을 못 드렸는데.
노동자4 그 아저씬 왜 일생을 그렇게 사셨으까?
노동자3 지 좋은 대로 사신 거지. 그게 편하니까.
노동자4 형.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좋아서…
노동자3 이렇게?
노동자4 이렇게, 사는 게 좋아서… 이렇게 사는 거는 아니제?
노동자3 누가 이렇게…
노동자4 이렇게?
노동자3 어둡고 춥고, 외롭게 살고 싶겠노?
노동자4 후회하는 거야?
노동자3 후회는 않지만, 그립기는 하다. 그 따스했던 온돌방이.
노동자4 지겨워했잖아, 형도?
노동자3 글씨, 이렇게 광활하고도, 아니 광활할수록 외로울 줄은 몰랐구만.
노동자4 이 격렬한 투쟁 속에서도?
노동자3 글씨, 내가 원했던 투쟁이 아이라서 그런지.
노동자4 거봐, 형도,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거라구. 아저씨 인생은, 어쨌거나, 본인 생각에 행복하시기는 했던 거잖아?
노동자3 그기 어데, 인생이가, 한평생 남의 종살이만 하고.
노동자4 우린 뭐 안 그래? 난 이 골리앗 크레인한테 한평생 종살이를 할 것 같은데? 그것도 아주 거대하게.
노동자3 왜, 거대해서 좋았다며, 그건 니가 정말 원했던 것 아니냐?
노동자4 글쎄, 그건 그런데, 거봐. 우리 말이 계속 반복되잖아. 거기서 맥힌 거야 우린.
노동자3 우리도 아직, 그 형 말마따나, 자생적인 모양이지.
노동자4 그 형도, 이 심정은 모를 거야. 이건 살아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심정, 아닐까?
노동자3 야야, 그런 소리 마라. 경험주의라고 그 형 하는 소리가, 귀에 쩡쩡하다. 아휴, 그 형은 왜 그리, 뼈다구만 남은 말들만 모아놨는지.
노동자4 그러니까 말이야, 형, 나는 말이야. 그 형 말이, 그 형이 얘기했던 그 숱한 혁명가들이, 유령같이 느껴져.
노동자3 유령? 야, 그렇잖아도 으슬으슬한데.
노동자4 아니, 아주 따스하고 낯익은. 그러나 동시에, 유령이 대명천지에 살아 있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 어차피 산 사람들이 주인인데 말이야. 밝고 맑고, 활기찬, 그리고 옷단장이 발랄한.
노동자3 여긴 그런 게 다 꿈이지.
노동자4 글쎄 말이야. 그 유령들은 우리를 과거로 따스하게 끌어들이는 존재들이야. 난 여기 오니까 알겠어, 그것들이 유령이었다는 것, 그 유령들이 우리를 과거로, 참으로 따스하고 누추하게 끌어들였다는 것, 그러나 정말로 내 앞의 미래는, 여기 이곳처럼, 차갑고 불확실하고 그러나 거대하다는 것. 난, 이 골리앗 크레인의 강인한 골격 위에, 그 유령들이 누덕누덕 붙어 있는 것이 보여.
노동자3 자식, 마! 그래 갖고 골리앗 크레인이 덜 춥겠나?
노동자4 그래 맞아. 그 옷을 입고 우리들은 추위를 면했지만, 이젠 너무 차고 크다구.
노동자3 누가 그랬는데?
노동자4 응?
노동자3 누가 죽은 사람을 억지로 살려서, 유령을 만들었는데?
노동자4 응?
노동자3 아, 죽은 사람이 지 혼자 다시 살아나서 그 꼴사나운 유령이 되고 싶었겠노,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친 게지.
노동자4 형, 그 사람들은 무덤에 파묻혔던 게 아냐, 역사의 가슴 속에 파묻혀 있었던 거라구.
노동자3 그거나, 그거나.
노동자4 난, 그걸 잘 모르겠어. 역사의 뜨거운 가슴을 파 올린다는 게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그 뜨거운 가슴들한테서, 그 옛날의 뜨거움이 아니라, 오늘날의 냉철한 교훈을 끄집어낸다는 게 어떤 건지. 죽은 그들이 우리 대신 뜨거울 수 없는 것이거든. 유령일 뿐이지. 설령 되살아난다 하더라도, 세상이 얼마만큼 바뀌어 있는데.
노동자3 마, 아직 노예인 건 마찬가지라 안카드노?
노동자4 그 아저씨하고, 우리가 같은 노옌가?
노동자3 그럼, 거대한 노예라 이건가?
노동자4 아냐, 그거 하고도 다른 게 있잖아? 우리가 이렇게 몸으로 느끼는 거, 그걸 누가 속 시원히 말로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노동자3 흥, 이 없으면 잇몸이제.
노동자4 응!
노동자3 꼭 그걸 설명해주길 바라나, 니, 뭐 하러? 썰을 젤로 싫어하는 놈이.
노동자4 아냐, 꼭 나를 위해서가 아니구.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형, 난 말이야. 갈등을 느껴. 죽어두, 그 불확실한 미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갈수록 안간힘처럼 느껴진다구. 왜 그래야 하는 건지를 누가 속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노동자3 그 형이 말해줬잖니? 조직이, 비밀결사가 있어야 하고, 사상-행동 통일이 돼야 한다구.
노동자4 그래. 형식상으로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데, 난 그 형도 유령 같거든. 형, 그 형이 내가 말하고 있는 걸, 감당할 것 같애? 아니 그래, 그거 할라면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야 되우?
노동자3 아니 그러니까 그 형 말은, 정신을 제대로…
노동자4 정신 같은 소리 하구 자빠졌네, 아, 지금이 무슨 빨치산 하는 시절이야?
노동자3 그걸 왜 꼭 그 형이 감당해야 되노? 우리가 일치단결해서 그 형 뒤를 받쳐주면 되는 거지.
노동자4 희망이 있어야, 일치단결할 것 아냐?
노동자3 희망이야 만들어 가는 거니까.
노동자4 물론 그런 점도 있지만, 형. 지금보다 더 밝고 더 풍족한 세계를, 그리고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야만, 그것보다 못한 현실에 있는 사람이, 그 가능성을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일치단결할 마음을 갖는 것 아닐까?
노동자3 아, 노동해방이라잖드나.
노동자4 그리구 내 집 단칸방 마련이구. 난, 그걸 잘 모르겠어. 전노협 애들 하는 얘기 들으면, 더 가난해져야 된다는 소리 같구. 그래 갖고 일치단결이 될까?
노동자3 그려, 조합주의라는 게, 조합원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걸 뜻하는 게 아니지.
노동자4 응?
노동자3 아, 대중추수주의라는 게, 대중 수준을 따라만 와도 괜찮은데, 종래는 대중 수준만도 못한 내용으로 낙착된단 말여. 그러니, 그게 대중추수주의도 못 되는 기라.
노동자4 그런 점에선 노총이 차라리 낫잖아?
노동자3 이 자식이? 잘 나가다가 그래, 결론이 어용이냐?
노동자4 글쎄, 그걸 잘 모르겠어.
노동자3 마, 내가 심한 말했제. 설마 니가 어용이야 되겄나. 과거도 있는데.
노동자4 아냐. 그 자식은 더군다나 안 돼.
노동자3 누구 말이고?
노동자4 아, 그 대학 교수라는 자식.
노동자3 뭐라?
노동자4 우린 모두, 과거가 있어서, 그걸 숨기느라 허겁지겁 누가 더 과격한가 경쟁을 해왔는지도 모르지. 뭔가 자신 없다는 뜻이기도 하구. 우리가 투쟁의 역사에서 배울 건, 그 형 말마따나, 과격한 정도가 아니고 과학인데 말이야. 그 자한테는 과격만 있지, 우릴 더 잘 살게 해주려는 애정이 전혀 없어.
노동자3 그 사람도 그러잖드나?
노동자4 말이야 그렇지, 하지만 눈초리가.
노동자3 눈초리가.
노동자4 궂은일은 니들이 다 해라, 뭐 그런 식 아냐. 그 태도가. 때마다 은근히 부추기는 식이고.
노동자3 그럼, 그 연약한 사람이 나서서 여기까지 올라와야 것나?
노동자4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어차피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라고 그 자도 말을 했지만, 그 자한테는 말이야, 뭐가 보신주의고 뭐가 보안인지 난 구분이 안 된다구. 그런 자한테, 지도를 맡겨? 어림도 없지. 쇳내가 통 나질 않는데.
노동자3 그러이, 그 형이 좀 낫지. 좀 낳을 뿐이냐 어디.
노동자4 그런데 그 형은 또, 너무 좁단 말야. 나는 그 형 얘기를 들으면 그때부터 뭔가 내 육체보다 좁은 꿈에 가위눌리는 것 같은 심정이었어. 지금은 더욱 그렇지,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노동자3 마, 노동자가 다 너같이 까다로우면 누가 노동운동하겠다 하겄노? 그러니까, 거 뭣이냐, 노학연대야 얘들 장난이고, 그 과학적인 사상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얘기하는 것 아니냐.
노동자4 그니까 말야, 그 결합이라는 게 말야, 과학이 결합할 생각이 있어야 되고, 운동이 결합할 생각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겠어?
노동자3 없으면 있게 만들면 될 것 아이가?
노동자4 더 나아가서, 그 생각, 그 화살표가 없으면 과학도 과학적이 아니고, 운동도 운동적이 아니거든. 그 한 중간에, 현실이 있는데, 그 현실에 과거의 유령만 있는 거라면. 현실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현실은 그 유령이 낡은 흑백 다큐멘터리 필름에나 나오는 유령이게 만들 만큼 발전했는데, 우린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형, 난 그걸 잘 모르겠어.
노동자3 와? 내려가고 싶나?
노동자4 내려가긴, 아니 내려가긴 내려가야지. 여기 이렇게 마냥 있을 수는 없잖아? 세상을 고치던 그 속에 파묻혀 살던 내려가긴 내려가야잖아. 그런데 죽어도 내려가서 안 된단 말이야, 난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야. 형, 여기 오니까 유령들이 비로소 우리가 옛날에 벗어던진, 해진 옷들처럼 보이고, 난 참으로 얼음물에 목욕한 것처럼 순정해지는 것 같아, 투쟁도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정말 난생 처음으로 뿌듯하게 들고 말이야. 그런데 바로 눈앞에 패배가 다가와 있어, 어쩌란 말이지? 패배가 운명인 것처럼 보여, 그러나 난 미래를 택해야 해. 어째야 하는 거지. 난, 그걸 잘 모르겠어.
노동자3 패배는? 그럼 그냥 한몫에 기둥뿌리가 넘어갈 줄 알았나?
노동자4 하지만 이제, 패배라는 생각은 들지 말아야 할 것 아냐? 뭔가 착착 쌓여간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 아냐? 더군다나, 애시당초 패배할 줄 알면서 시작하는 싸움은, 늦게 시작했다고, 옛날 패배의 전철을 한 20년 고대로 밟으면 그건 정말 더 늦게 출발하는 거 아냐?
노동자3 우리가 그걸 우찌 알았겠노, 어쩌다 보니까…
노동자4 그럼 우린 아직 우리 자유의지대로 싸우고 있는 게 아냐, 형.
노동자3 그라고, 우리가 이만큼 한 것도 다 이제까지 내력이 있었으니께 가능한 거고, 뒤한테 또 그만큼 물려주는 것이다. 으때, 고리탑나?
노동자4 그래. 그 역사 중에, 어떤 것을 계승하느냐, 그리고 어떤 것을 물려주느냐, 그게 우리 자유의지대로 되고 있나, 지금?
노동자3 야, 니, 그 어려운 얘기 계속할래? 내려가서 줘터질 생각하면 아뜩하구만. 으째, 그, 너도 그 어려운 얘기하다 결론이 패배주의로 나는 거 아니냐? 그럼 너도 그 대학 교수하고 다를 게 뭐 있냐? 어차피, 우리 삶은 우리 몫이여, 씨팔, 좆도. 노동자 꼴에 근사한 연애도 해봤으면 됐제. 뭘 더 바래. 갈 때까지 가보는 거야, 죽기밖에 더 하겠냐. 죽어도 아까울 게 도대체 뭐 있냐.
노동자4 그럼, 우리 삶이 그 아저씨와 다른 게 뭐 있어?
노동자3 야야, 시끄럽다. 좆통수 불어도 동은 터온다.
노동자4 우린 내려가야 하는데, 동은 터오고, 전쟁은 시작되고, 난 그걸 잘.
노동자3 이눔아, 시방 시조 읊나? 난, 그걸 잘, 난 그걸 잘.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