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유산
사장 병실, 사장이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다. 재벌 누군가가 하는 ‘자넨, 여기 있게, 이젠 나 혼자 있어도 돼’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후 의사, 재벌1, 2, 적자와 서자 등장. 적자와 서자는 계속 은밀한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의사 엉? 아무도 없나? 둘째 따님이 금방 계셨는데? 잠깐 뭐 사러 나간 모양입니다. 들어가시죠.
재벌1 에잉,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나. 그 근력 좋던 양반이, 아주 갔구만.
의사 하하, 이젠 한시름 놨습니다. 본인이 살 의지만 갖는다면, 다른 건 차제에 제가 다 마련해드렸습니다, 하하.
재벌2 오, 수술은 잘 된 거야?
의사 그럼요. 대수롭지 않은 종양인데요, 뭘. 제가 사장님 몸은 본인보다 더 잘 알 걸요.
재벌1 그럼 속도 잘 알겠군.
의사 아니, 아니죠. 맘속이야 천길만길인데요. 술을 그렇게 드시고도, 간이 보드라우시더라고요.
재벌2 워낙 연로하셨을 텐데.
의사 아녜요. 특이 체질이신지. 몸은 한 십 년 더 젊으시더라구요.
재벌1 노동을 많이 해서, 그래서 그런가?
재벌2 아녜요, 그건 거의 골병들었을 게구만.
의사 뭔가, 의욕 같은 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는 합니다. 그런데…
재벌1 의욕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 말인가?
의사 예. 그런 것 같아요.
재벌2 하긴, 요즘 정국 같아서야, 에잉.
재벌1 허허, 요즘 정국이 어때서요? 대통령 선거도 그만하면 됐고, 아 파업도 한번쯤 터질 건데, 두루두루 겸사겸사 잘 치른 것 아뇨?
의사 말씀 나누십시오. 전 다른 환자가 있어서.
의사 퇴장.
재벌2 저 사람 정치 얘기 싫어하는 건 얘나 지금이나 어찌 저리 똑같을꼬?
재벌1 하하. 저이만 그런가요, 어디. 나이 들고 명망 있는 의사란 게 다 그렇죠. 우리 같은 사람이야 투자하고 돈 벌어들이는 사람이니까 정국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마련이지만, 의사들이야 어찌 그래요. 전쟁이 나도 가장 쓸모가 있구, 이쪽 편에도 인술이요, 저쪽 편에도 인술인데. 투자 안 해도 덕 챙기고, 돈 챙기고, 나도 의사나 될 걸 그랬어.
재벌2 하여간, 회장님 입심은 여전해요. 저러니 나라님들도 대대로 갖고 놀았겠지. 나야, 애들 코 묻은 돈이나 챙기느라, 쪼잔하단 얘기만 듣고.
재벌1 어허. 또 무슨 엄살이신가. 아, 그쪽도 군수산업이 좀 탄탄해? 일본에서도 염려하는 수준이라는 거, 자기만 아는 줄 아나?
재벌2 울며 겨자 먹기죠.
재벌1 내숭은? 그런데다, 매출액이란 게 거 허장성세라서 별볼일없는 거구, 우린 은행 빚이다 외채가, 자산의 3분지 2를 넘는데, 그 쪽은 아주 실하잖수?
재벌2 그거 하나 믿고 삽니다만, 그게 탈이 되기도 하지요. 아, 우리 집안에 매년 옥사 한 번 안 일어나는 것 봤어요? 형님네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 뒤를 단단히 봐주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가 아니죠. 대대로 공동 운명체였죠.
재벌1 그래도 선거 때마다 맘 졸이지는 않잖은가, 자넨. 으이구, 쪼다들. 요번엔 얼마나 마음을 졸였든지. 군사 정권 들어서고 이렇게 손발 안 맞기는 처음이로세.
재벌2 그래도 형님이 있는데 이 나라가 어디 갈 거며, 군부가 있는데 이 나라가 어디 가겠우. 대통령도 허수아비나 진배없지. 뭐, 그 사람 마음대로 다 한답디까. 이젠 더군다나, 그런 세상도 아니구. 난, 6·25 이후 이런 난리는 안팎으로 처음이지만, 뭔가 조마조마했던 게 속 시원히 뻥 뚫렸다 싶습디다. 뭔가, 정말로 장사 한 번 해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민주화가 되긴 된 거 아녜요. 정말, 의외로 싼 값에. 이젠 돈 내라, 그래도 약간은 떵떵거리게 되더라구요.
재벌1 에이, 이 정권은 그래도 안 돼. 뭔가 화끈하지가 않아. 아, 전에야 받아가는 거, 주는 거 확실했잖아. 주는 게 더 많았고, 우리가 책임질 필요도 없었구. 그러니 자진해서 주고 싶었구.
재벌2 형님 경우는 그랬죠. 일사천리로 크셨으니까.
재벌1 자네 자꾸 그걸 강조하는데, 나도 해외에 막노동 수출해서, 애국하며 돈 번 사람이야, 너무 그러지 말게.
재벌2 하하. 암은요. 누가 그럴 모른답니까? 제가 오히려, 과자 부스러기나 만들어서 코 묻은 돈 뺏은 놈이란 거 아니겠습니까.
재벌1 난, 자네 의중을 알지. 정권과 우리 기업 사이에 슬슬 금이 가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거지?
재벌2 아이구, 아닙니다, 형님. 그런 섭섭한 말씀을.
재벌1 흠흠. 난, 자네같이 이재 능력이 밝지는 않네만, 두고 보게. 이 정권은 경제 문제엔 빵점이야. 고르바초프 줄 타서 어떻게 해보려고는 하네만. 경제 문제는 애당초 밀어붙이기 박력 없이는 안 풀리는 게야. 앙, 없는 놈들이야 워낙 그런 놈들이니까 일단 밀어붙여 놓고 나중에 잘 살게 해주면 감지덕지하는 법인데, 되도 않게 귀만 커서. 이쪽저쪽 얘기 다 듣느라 경제가 엉망이 돼가고 있잖남, 벌써부터.
재벌2 아참, 소련 경협 문제는 강 회장한테 넘어갔다면서요?
재벌1 자네도 그 회장단에 끼었다믄? 아니, 그래서 내가 이러는 게 아냐! 난 지금, 국가의 경제 전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네.
재벌2 하하, 형님도, 화를 내시기는. 누가 그래서 그렇다고 했어요? 그리구, 대기업 경제가 나라 경제죠 뭐, 다를 게 있나요?
재벌1 으음. 괘씸한 사람. 꼬박꼬박 이의를 단다니까. 난, 북한쪽 루트를 뚫을 거야. 같은 민족끼리 장사를 해도 해야지. 인력도 제일 싸고.
재벌2 그러셔야죠. 참 잘 생각하신 겁니다. 소련 쪽은 워낙 거대해서, 우선 멕이는 게 힘에 벅찰 겁니다.
재벌1 그래서 미국 놈들 유럽 놈들 달라붙고도 우리 같은 약한 나라도 뜯어먹을 게 있는 것 아니겠나.
재벌2 하여간, 그런저런 얘기를 마구 할 수 있는 게, 민주화가 됐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사 해먹기에는 어느 정도 자유민주주의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게 진짜 자본주의고. 그 꼴사나운 노동조합만 없으면.
재벌1 왜 대학생 놈들한테 표창장이라도 주지. 경제 발전 공로루다가. 그리고 그 꼴사나운 노동조합이 그 민주주의란 거와 별개로 생긴 건가? 그리고 공산권 경협이란 게, 꼭 이렇게 공개 입찰하듯이 해서야, 그놈들한테 남겨 먹을 게 있을 성싶은가?
재벌2 아이구, 형님. 그렇게 마구 쏴대듯이 말씀하지 마시고.
재벌1 내가 보기엔, 이 나라는 튼튼한 독재 정권 아니면, 금방 빨갱이 나라 돼. 자유민주주의란 없어. 말짱 거짓말이지.
재벌2 빨갱이 나라들이 저렇게 허약한데두요?
재벌1 글쎄, 그 나라가 몽창 망해버리면 또 다르겠지, 하지만, 그 빨갱이 운동이란 게, 빈부 차가 있는 한, 늘상 있게 마련이지. 없는 이들에게 마약 같은 거니까.
재벌2 이제야, 개명 천지에, 그 미친 짓거리가 또 나오겠습니까.
재벌1 미치지 않은 모습으로 나오것지, 이 사람아. 보라구, 김대중이가 지는 빨갱이 아니라구, 자유민주주의자라구 그러잖아 벌써부터. 그래야 2등도 못했지만.
재벌2 형님 같은 분이 밀어주시면야, 이번엔 됐을 법도 했잖습니까?
재벌1 택도 없어, 그 사람. 이제 영영 글렀어.
재벌2 그래두, 형님께선 돈 좀 집어주셨던 걸로 아는데.
재벌1 아, 야당 돈 집어주는 게 어디 집권하라고 그러는 거야? 그냥…
재벌2 그냥?
재벌1 아니, 이 사람이? 그건 자기도 뻔히 나랑 한통속이면서 그래. 아, 우리가 여당 주는 돈 10분지 일이라도 주나? 여당 백 억이면 기껏 야당 10억 미만인데. 하긴 여당이야, 지 돈 지가 갖고 가는 거지만. 몇 푼 만 더 줘도, 안기부에서 득달같이 전화가 오는데. 이 새끼들, 회장실 전화까지 도청을 한다구. 아, 저번에 그 윤 회장 무너진 거 야당한테 돈을 뭐, 엄청 많이 줘서 그런 줄 아나? 그냥 조금 더 얹어줬을 뿐이야. 다 알면서 왜 그래? 김대중이가 대통령이 돼? 어림도 없는 일이지.
재벌2 암은요, 암은요.
재벌1 그런데, 자넨 역시 젊구만, 부러워.
재벌2 왜요, 민주화라구 해서요? 기업이라구 안 하구 아직도 장사라 해서요?
재벌1 아니, 그게 아니구. 난, 저 형님 앞에서 안됐지만, 나이 드니 인생이 허망해. 뭘 그리 아등바등했나 싶기도 하구.
재벌2 형님도 정치나 해보시지 그래요?
재벌1 예끼, 이 사람. 말년에 누구 증말 똥구정물 씌울 일 있나? 난 죽을 때까지 경제인이야, 그렇게 남고 싶어. 그런데…
재벌2 형님이야 벌써 존경받는 경제인 아니십니까?
재벌1 존경은 뭘. 그런데, 죽는 날이 가까이 오니까.
재벌2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러시다 이거죠?
재벌1 그래. 종교에나 귀의해볼까 그래. 불교가 특히 심오한 종교더구만. 이거, 둘째 딸이 안 오나? 난 가봐야겠는데, 요즘 몸이 신통치 않아.
재벌2 종합 진단을 받아보시죠, 왜.
재벌1 그거야 매년 받지. 병원을 좀 옮겨봐야겠어.
재벌2 왜요?
재벌1 아니, 그냥, 아들놈들이 영 신통찮아서. 말하는 게 영 더부룩하고 언짢은 내색이란 말이야.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가네.
재벌1 퇴장.
재벌2 그러면 그렇지, 곧 죽어도 종교 귀의해서 다음 세상 챙길라 그러지, 아무리 허망해도 근로자들 월급 올려주겠다는 소린 없구만. 그렇게 살아왔으니, 말년에 아들놈까지 의심이 될 수밖에. 허망킨 허망컸다. 아, 내가 남 얘기 하고 있네, 내 아들놈들은 정말, 독이빨을 감춘 뱀 같은 놈들이니까. 그래도 큰아들 놈은, 좀.
적자 예,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재벌2 아니다. 오, 이제 오는군.
둘째 딸과 둘째 사위 등장.
재벌2 내외지간에 정답게 뭘 하다 오시나?
둘째 딸 어머, 오셨어요, 회장님?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이렇게까지.
재벌2 그게 무슨 소리냐, 와 봐야지. 그 어른은 뵀냐? 금방 나가셨는데.
둘째 사위 못 뵀는데요? 여보 나가 봐.
재벌2 아니, 됐다. 허허, 그 양반, 귀신같기는, 그러니 그만큼 난세를 견디고도 끄떡없지.
서자 (둘째 사위에게) 얘기 확실히 했어요?
둘째 사위 (서자에게) 예, 분명히.
적자 아버님, 좀 앉으시죠.
재벌2 괜찮다. 나도 이제 가야지. (적자에게) 그래 일은 잘 돼가냐?
적자 (재벌2에게)네. 착착 진행되어갑니다만, 저렇게 또 쓰러지셔서, 그게 좀.
재벌2 (적자에게) 뭐, 어차피 아들들한테 높은 자리 주는 건데. 좋아하겠지. 그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겠다만.
적자 (재벌2에게) 그래도요, 워낙 유서 깊은 회사라서, 물의가.
재벌2 (적자에게) 그게 무슨 소리야? 아, 하청 회사란 게 다 재벌이 키우는 거지. 살리는 거나, 합병시켜서 내선일체 만드는 거나. 으흠. 죽이는 게 살리는 거고, 살리는 게 죽이는 거고. 저 양반 저승 가면, 내 옛날 죄까지 훤히 들여다볼 테니, 더 서운할 건 없을 테고.
적자 (방백) 이런 성질은 꼭 저놈한테 물려주셨군. 내가 적잔 적잔가.
서자 뭐, 긴한 말씀 있으시면 저희가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재벌2 아, 아니다. 이제 가야지.
서자 그럼 형님이 좀 모셔다 드리세요.
재벌2 아니, 괜찮아. 밖에 비서 있는데 뭘.
서자 그래도, 하실 말씀은 있으신 것 같고.
적자 나가시죠, 아버님.
재벌2 그, 그래? 나갈까?
재벌2 (방백) 휴, 난 저놈하고 말이 부딪치면 식은땀이 난단 말이야. (적자에게) 저 아이 하고도 말을 잘 맞춘 게냐?
적자 (재벌2) 그럼요, 아버님. 하여간, 나가서 말씀드릴게요.
재벌2 그래, 그래. 휴우. 비서, 비서!
재벌2, 적자 퇴장.
서자 젠장, 아, 사생아가 더 똑똑한 것 몰라. 개국 신화 주인공이 본처 자식인 것 봤어, 하다못해 예수까지 첩 아들 아닌가. 지들끼리 좋아서 낳았을 테니 씨가 얼마나 좋겠어, 더군다나 아들이면 끝내 줄 거 아냐? 본처 아들만 아들인가? 꼭 끼고 다녀, 끼고 다니기를. 그러니까 저렇게 사내가 저렇게 여자처럼 뺀질뺀질하지.
둘째 딸 여자가 다 그렇게 뺀질뺀질한가요?
둘째 사위 여보, 무슨 그런 말투가.
서자 아냐, 아냐. 괜찮아요. 여자가 좀 팩팩 튀는 데가 있어야지. 우리 마누란 영, 벌써부터 풀빵 같은 게. 맛이 안나.
둘째 딸 입이 좀 거신 편이군요.
서자 아, 예. 우리 집사람 얘기라 편히 하느라고, 그만.
둘째 딸 괜찮아요. 나도 음담패설 좋아하니까.
둘째 사위 여보!
둘째 딸 어차피 우린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된 거 아녜요, 여보?
둘째 사위 그건 그렇지만,
둘째 딸 아, 아버지 치우자고 같이 모의한 사인데, 허물될 게 뭐 있겠어요, 안 그래요?
서자 그럼요. 역시 그 집안은 사위들보다 따님들이 더 여걸이셔.
둘째 딸 난 언니하고 달라요, 셋째하고도 다르고. 언니는 겉으로는 교만해 보여도, 속은 연약하기 짝이 없죠. 셋째야, 기실은 눈물뿐인 게… 운동한답시고 나섰지만, 다 반작용 아니겠어요. 전 강하고, 좀 잔인한 편이죠.
서자 남편도 그런 편 아니신가? 천상배필이로군.
둘째 사위 별 말씀을.
서자 그런데, 난 첫째 따님과 둘째 따님의 공통점도 알고 있죠?
둘째 사위 그게 뭔데요?
서자 남편이 알면 기분 나쁠 일이지, 안 그래요?
둘째 딸 당신이 어떻게, 설마, 그걸?
서자 아니, 아니. 누가 고자질한 건 아니고. 내 정보망은 일찌감치 일본 기업을 본떠 만들어진 거죠. 미국 CIA보다, 소련의 KGB보다, 더 치밀하다는.
둘째 사위 여보, 당신 나한테는 땀을 삘삘 흘리게 만들고, 당신 언니랑, 무슨 음모를 꾸민 거야?
서자 염려 마시오. 우리 일에는 아주 도움이 되는 거니까. 그리고 자기 인생은 각자 챙겨서 즐기는 것 아니겠우, 아가씨?
둘째 딸 좋아요. 당신 말대로 백 프로 따르죠.
둘째 사위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앙?
둘째 딸 왜 이리,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나중에 얘기해요.
서자 아, 뭐 별일 아니오. 뭐, 주식을 좀 사놓으신 게 있으신 모양인데.
둘째 딸 예? 아, 예. 그래요. 돈 있는 걸로 주식 좀 샀어요. 회사 주가가 올라갈 것 같아서요. 왜, 잘못됐나요?
둘째 사위 왜 평생 안 해보던 짓을?
서자 아, 그거야 뭐, 어차피 우린 다 난생처음 하는 일에 뛰어든 거니까. 자, 자, 사랑싸움은 집에 가서 하시고.
둘째 딸 그래요, 여보.
둘째 사위 나, 바람 좀 쐬고 오리다.
둘째 딸 아, 여보. 화 푸세요.
서자 아니, 복도에서 바람 쐬고 오세요. 바람이라, 바람, 바람, 바람.
둘째 사위 퇴장.
둘째 딸 어떻게 하실 건가요.
서자 뭐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요. 내가 댁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니까.
둘째 딸 유혹하시는 거예요?
서자 유혹? 내가요? 아, 내 이런 꼴이 내가 보기에도 끔찍해서, 혹시 말년에 뒤통수 잡힐까 봐 애도 안 키우는데, 내가 사랑을?
둘째 딸 사랑이 아니면, 섹스는요?
서자 오호, 나를 유혹하시는군. 그거야 좋지. 당신, 몸매도 괜찮구만.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 친구를 내 말하는 대로 잘만 조정해주면, 내 오히려 보답을 하리다.
둘째 딸 그놈이야, 순진한 놈이고. 저랑 사귀어보시면, 통하는 데가 많아서 꽤 괜찮을 텐데요?
서자 통하는 거야, 그거만 통하면 돼지, 여자하구야 뭐.
둘째 딸 여자 우습게 보다 큰코다쳐요.
서자 그럴까, 제 욕정 하나 통제하지 못하고 몽둥이 큰 놈한테 무릎 꿇고,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고 통사정을 해대는 여자라는 동물이, 그렇게?
둘째 딸 당신도, 그렇게 표현하는 걸 보니, 불쌍한 데가 있는 사람이군요? 당신 엄마가 그랬다던가요?
서자 이 쌍년이, 어따 대고 말을 함부로 해! 메가지를 콱!
둘째 딸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하죠. 이러지 말아요! 남편 곧 들어온단 말예요. 왜 이래요, 아아. 있다가, 응?
서자 거봐, 이 년아, 좆도 아닌 게. 헉, 건방을 떨어 떨기를. 헉, 넌, 이제 덫에 걸린 거야.
둘째 딸 얼마든지 좋으니까, 이거, 놔요, 제발. 후우. 아이, 옷이 다 흩어졌네. 있다 보면 되잖아요. 난, 얼마든지 좋아요. 별 것도 아니고. 즐기는 건 언제나 찬성이니까.
서자 미국 공부한 티를 내는 건가. 아니면, 나를 말아먹으시겠다? 안 되지, 안 돼. 어림없어.
둘째 딸 당신은, 남녀 문제만큼은 현대적이지 못하군요. 다른 건 다 남보다 십 년을 앞서 가는데.
서자 한 십 년을 먼저 타락했지. 여자까지 십 년 먼저 타락시킬 것 있나?
둘째 딸 어머, 의외로 순정파인 데가 있네요. 고루하기도 하고.
서자 그것만큼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게 아냐.
둘째 딸 첫사랑인가요?
서자 첫사랑? 흥, 다 옛날 얘기지. 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아나?
둘째 딸 제 알몸 생각? 호호, 농담이에요.
서자 두 가지 생각. 하나는, 아버지가 매몰차게 우리 어머니를 버린 거,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신 언니가, 저 영감 다치게 하는 건 절대 반대라고 했는데, 입을 막을 약점을 잡았다는 거.
둘째 딸 언니도 약점이 있나요? 아, 언니도?
서자 그 피가 그 피일 텐데, 어디 가겠어? 더군다나 그 쪽은 배도 같을 거구.
둘째 딸 아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당신은 당신 아버지도 해코지하실 건가요? 그 말은 못 들었는데?
서자 호오. 내가 이거 아가씨한테 넋이 나갔기는 나갔군. 당신도 당신 남편한테 모든 걸 다 말하지는 않잖소? 그런데 왜 내가? 어쨌거나, 이거 있다가 만나긴 만나야겠군, 나도 한통수 걸렸으니. 좋아요?
둘째 딸 좋아요. 있다가 그 음식점에서. 아, 남편이 와요.
남편 등장.
둘째 딸 어디 갔다, 오셨어요?
둘째 사위 복도 끝에 있었는데? 당신 옷차림이 왜 그래?
서자 에? 아, 아버님이 뒤척거리셔서, 제대로 뉘어 드리느라구.
둘째 사위 그래요? 이제 좀 깨시려는 건가?
서자 깨어난들 뭐하겠소. 괴롭기만 하겠지. 난, 갑니다.
서자 퇴장.
둘째 사위 개자식 같으니라구.
둘째 딸 그래두 당신보단 훨씬 난 사람 아녜요? 당신이 꼼짝도 못하는 게 사실이고. 왜 꼭 뒷구멍에서 욕을 해요?
둘째 사위 여보.
둘째 딸 왜요.
둘째 사위 이리 와봐.
둘째 딸 잠깐만요, 아버지 침구 좀 봐 드리고.
둘째 사위 당신 안 하든 짓 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둘째 딸 무슨 소리예요. 이래 뵈도 난 효녀라구요. 그래, 옳지, 우리 아버지.
둘째 사위 정말 주식일 밖에 없는 거야? 정말?
둘째 딸 아니 그럼, 내가 그 자식하고 연애라도 했을까 봐요?
둘째 사위 그랬다만 봐, 죽여버릴 거야, 콱.
의사 (목소리) 그래, 무자식이 상팔자지. 애를 꼭 낳아야 하나?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