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은신
셋째 딸의 집. 흐린 조명, 노동자3, 4의 목소리, 긴 그림자.
노동자4 형, 그 새끼는. 우릴 쫓아낸 놈과 한통속이라구.
노동자3 그 얘길 하는 게 아냐 임마. 그냥 얘길 들어보는 건데 어때?
노동자4 그래두, 양심상. 얘길 해야되는 거 아냐?
노동자3 양심이 밥 먹여주냐, 임마? 그리고 거기 가면 노조도 더 근사하게 할 수 있구, 또.
노동자4 또 뭐.
노동자3 어차피 우린, 좀더 잘 살아보려구 이러는 거 아냐?
노동자4 하긴 그렇지. 에이, 씨팔. 형, 그런데?
노동자3 뭐? 또 뭐야?
노동자4 그 여자 만나봤어?
노동자3 누구?
노동자4 시침 떼지 말구, 형 그 여자 사랑하는 거 아냐?
노동자3 사랑은 임마! 그냥 몇 번 놀아준 거지.
노동자4 누가, 형이?
노동자3 이 자식이?
노동자4 난, 그 첫째 딸을 만났어.
노동자3 언제?
노동자4 한 두 번. 에이 씨팔, 형. 우린 왜 이렇게 타락했지? 난 완전히 그 여자 노리갯감이야.
노동자3 하여간, 돈 많은 놈들하구 붙으면, 우리만 멍드는 거야. 그 여잔, 몸도 건강해. 날씬하구. 말이야, 내 근육질에 반했대지만, 이건 날 완전히 파김치로 만든다니까. 코피를 흘려도 내가 흘린다구.
노동자4 형, 그 여자가 형을 사랑할까?
노동자3 바라지도 않아, 임마. 어차피, 출신이 다른데.
노동자4 사랑은 국경도 초월한다던데?
노동자3 미친 놈! 그거 다 걔들끼리 하는 얘기다.
노동자4 그래두…
노동자3 하긴, 침대 속에선 날 죽자 사자 붙들고 늘어지니까. 그러다가 사랑하게 된다면 또 모르지.
노동자4 왜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없어?
노동자3 몰라, 임마.
노동자4 형, 나도 양아치지만, 걔들은 어떻게 그리, 썩었는지 몰라. 난 포르노를 봐도, 저런 세상이 설마 실제로 있으랴, 영화니까 저렇겠지, 아님 양놈들이나 그렇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
노동자3 난 솔직히 감정이 좀 묘해.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래 내가 니한테 남창 노릇 못 해주겠냐, 까짓 거, 돈 주고 오팔팔 가는 거보다야 깨끗하고 낫지, 뭐 그런 생각이다가도, 헤어지고 나면 청순하달까, 뭐, 그렇게, 삼삼하고 새근새근하게 남는 게 있더라구. 그 땀범벅에 골치가 띵할 정도였던 화장품 냄새도 코끝에 상큼하게 기억되고 말이야.
노동자4 나두 감정은 좀 복잡해. 그렇게 썩은 내가 코를 찌른다 싶어두 어떤 땐 따스한 누이 품 같은 생각이 든다니까.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하면서두,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아. 형, 우리가 개차반으로 막 나가는 것도, 타락한 척하는 것도, 반반한 년만 보면 부러 과장되게 헥헥 대는 것도 결국 걔들 흉내를 낼 뿐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노동자3 이것도 다, 그 첩 자식 사장 놈이 놓은 덫이 아닐까? 그 덫에 우리가 걸려든 게 아닐까?
노동자4 에이, 설마. 우리 같은 놈 뭐 큰 데 써먹을 게 있다구 지들 편 마누라까지 대주겠어? 그 여잔 얼핏 그러든데, 뭐, 아버지 잡아먹는 년이 남편 속이는 거야 대수냐고 하든가. 그리구 핑핑 울던데?
노동자3 이 여자도, 그놈하고 우리 일은 모르는 것 같더라. 그놈하고, 지 남편하고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알기는 아는 모양인데.
노동자4 그 여자가 더 잘 알 걸, 아마?
노동자3 글쎄, 별 얘기 없던데. 나한텐,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하는 편인데.
노동자4 그 여잔, 더 잔인한가 봐. 이 여자가 그 여자 얘기만 나오면 혀를 홰홰 내두르더라구. 독한 년이라구.
노동자3 뭐, 난 잘 모르겠던데. 하여간, 그놈이 기껏해야 뿌락치 밖에 더 시키겠냐? 취직되고 나서 못하겠다고 나자빠지면 되지 뭐.
노동자4 어디 뿌락치? 여기선 파업을 배후 조정하라고 그러든데?
노동자3 지 회사 가서도 그러랄 리는 없고. 동정 감시나 시킬 텐데, 니기미.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아이큐가 짧아서, 걔들 하는 얘기는 도무지. 쉿, 남편이 들어왔나 보다.
조명. 셋째 딸 집 건넌방, 노동자3, 4.
셋째 딸과 사위, 노동자1, 2 등장.
셋째 딸 여보, 죄송해요. 하두 급히 들이닥치시는 바람에, 그만.
노동자1 제가 막무가내로 매달렸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셋째 사위 도대체 어쩐 일이요? 영문이나 좀 압시다.
노동자2 일이 하도 급하게 돼서. 쟤들이 싹쓸이를 한다고 합니다.
노동자1 제가 이 사람들 데리고 나오자마자 해고자 사무실을 들이닥쳤습니다. 하마터면 이 사람들 모두, 아니, 죄송합니다.
셋째 사위 그건 신문에 나서 아는 일이고. 우리 집엔 웬일이오?
셋째 딸 제가 우선 이리로 오시라 그랬어요, 죄송해요.
노동자1 제가 너무 급해서, 그래도 제가 부탁드릴 데가 이곳 밖에 없어서.
셋째 사위 여보, 어쩌려고 그래?
셋째 딸 우선, 여기서 며칠 묵으시다가?
셋째 사위 당신 정신 있소?
셋째 딸 곧, 다른 데를 알아볼 거예요, 금방요. 여보, 제발.
셋째 사위 아니, 다른데 주선도 당신이 해준단 말이요?
노동자2 저희들이 찾아볼 겁니다. 뭐 하시면, 지금이라도 나가지요.
노동자1 안 돼, 이 사람아. 지금 나가면 모두 잡혀. 자네들이 하숙방 말고 서울에 아는 데라도 있나?
셋째 사위 이 친구는 뒤가 튼튼한 모양이던데.
셋째 딸 여보, 너무하세요. 어려워서 찾아온 사람들인데.
셋째 사위 당신 까마귀 고길 먹었나? 이 친구들한테 그렇게 능멸을 당하고도 그걸 벌써 잊었어?
셋째 딸 쉿, 조용히 하세요, 여보. 그건 그거구, 이 사람들은 그 뒤로 해고까지 당했잖아요. 경찰에 모질게 고문도 당하고.
셋째 사위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그 뒤로도 몇 번 만났나?
노동자2 아닙니다.
셋째 딸 그걸 꼭 만나봐야 알아요? 뻔하죠. 더군다나 노동자들이라고 인정사정 안 봐줬을 텐데요, 뭘.
셋째 사위 당신, 요새도 고문하는 줄 아나? 노태우가 그리 어수룩한 줄 알아? 그렇게 감상적이고 즉흥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니까 만날 저 모양이지. 뭐? 인간 본성에 호소해? 인간 본성이 뭔데? 될 수 있는 대로 편하게 살고 싶은 게 인간 본성인데.
노동자4 좆 나게 깨졌시다.
노동자1 자넨 좀 가만히 있어.
노동자4 아니 뭐 전두환이는 직접 패라고 해서 팼겠어요?
노동자2 자넨 좀 가만히 있지.
노동자4 예. 이 양반한테 요 말만 하고요. 다 아랫놈들이 알아서 기다가 보니까 그렇게 된 거구. 노태우가 나아봤자, 기는 놈은 있기 마련이라구요. 난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높은 놈들은 다 그러죠. 하지만 사실은 그게, 사실이거든요.
셋째 사위 그걸 구조적 폭력이라 그러는 거 아닌가.
노동자3 어쨌든지 간에, 우리한텐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전에 들어가본 건 아니지만, 들어가자마자, 이 노동자들 니들이 처지나 알구 설치지, 학생 놈들 설친다고, 주제도 모르고 설쳐, 그러면서 막 팹디다.
셋째 딸 여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구, 제발.
셋째 사위 난 모르겠소. 아버님도 편찮으신데, 이 일을 알아봐.
노동자1 쉿! 밖에 누가 온 모양인데.
셋째 딸 제가 나가볼게요. 여보, 제발. 허락하시는 거죠?
셋째 사위 나가보고나 와요.
셋째 딸 고마워요. 역시 당신이야.
노동자4 (노동자3에게) 흥, 정말로 그럴까?
노동자3 (노동자4에게) 닥쳐, 이 새끼야. 저 여자는 좀 다른 것 같으다. 남편도 그렇구. 빨갱이라 그런가?
노동자4 (노동자3에게) 그래, 빨갱이는 노동자라면 사죽을 못 쓰더라. 우리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말이야, 키킥.
노동자2 애들한테 들으니까,
셋째 사위 애들? 아, 이 분들. 아, 그 공산주의 얘기 말이요? 신경 쓰지 마슈. 화가 나서 그냥 한마디 한다는 게.
노동자2 공산주의 공부를 좀 하셨나 보죠?
셋째 사위 하하. 난, 당신네들 하는 학습하고는 무관한 사람이요, 하하.
노동자1 저희들이 무슨 학습을 하는뎁쇼?
셋째 사위 아, 아저씨는 빼고. 어, 덥네, 후.
노동자3 저희들이 무슨?
노동자2 아, 아냐. 학생들이 요새 새로운 사상이래나, 모여서 공부하는 걸 말씀하시는 거야.
노동자1 자넨 뭘 좀 아는가 보네?
노동자2 알긴요, 뭘. 학교 다닐 때 전태일 얘기 듣고 노동운동에 뛰어들고 여지껏 이 모양인데요. 뭐, 무슨 공부를 하는 줄은 알죠. 거, 왜, 신문에 자주 나잖아요? 서적 압수해가고, 판금 도서라는거.
노동자1 으응, 그게 그럴수록 더 잘 팔린다메? 우리나라 사람들 참 모를 일이야. 하지 말아라, 그러면 더 하니까. 없이 살아 그런지.
노동자2 그래도, 선거 때는 어김없이 찍으란 데로 찍잖아요?
노동자4 부정 선거니까 그랬지.
노동자1 그래도 요번엔, 아찔할 거야. 그래, 한번 뒤바뀌기도 해야 돼. 너무 오래 해먹고 있거든.
셋째 사위 아저씬 누구 찍으실 건데요?
노동자1 저요? 저야 노태우 찍지요.
셋째 사위 바뀌어야 한다면서요?
노동자1 아니 그냥 바뀌었으면 싶다는 거지, 내가 나서서 그럴 것까지야.
노동자2 선거 한 표 던지는 건데, 그것도 나서시는 거예요? 그냥 의사 표시를 간단히 하시면 되는 거지.
노동자1 허허, 이 사람들, 아니 죄송합니다, 쥔 양반은 빼고, 자네들, 김대중이 돈 먹고 선거운동하는가? 모르긴 몰라도, 김대중이는 안될 거네.
노동자3 왜요?
노동자1 우리나라 사람들, 하루 전날 여론조사 아니라 그 할애비가 나와서 야당이 우세하다고 해도, 투표장에 들어서는 순간 대부분은 여당에 표를 던지거든. 물론 착해서 돈 먹은 데로,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이건 참 우스운 소리지만, 양심의 가책이 돼서, 돈 먹은 사람을 찍어주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냐. 어른일수록 더하지. 세상이 요동치는 건 그렇게 자주 봤어도, 요동친 다음에 세상이 좋아지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말이지. 야당이 찢어지는 거, 분열되어 표가 안 나온다? 꼭 그런 것도 아냐.
셋째 사위 아저씬 꽤 현실적이시네요. 운동하는 사람들보다 정세 판단이 낫군요. 그건 야당이, 아니 운동 세력이, 무슨 뚜렷한 비전을 제시 못 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노동자1 글쎄, 난 그렇게 어려운 건 잘 모르고. 하여간, 세상이 뭐 별로 나아질 게 있으랴,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에요. 희한한 게, 어렵게 사는 사람일수록 더 그래.
셋째 사위 그게 그 소리죠. 그걸 그냥 보수 성향이라고 치부하고 말지만, 이렇게 저렇게 해서 여러분들을 잘 살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냥 지배 권력 잘못한 것 욕하느라고 혈안이고, 지들끼리는 갈라지고, 그러니 악수란 말예요. 각자 정책 대안을 내놓으면 될 것을.
노동자2 그럼 이렇게 갈라지는 게 좋단 말입니까?
셋째 사위 갈라지는 게 좋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소. 문제는, 내용도 없이 갈라진다는 거지.
노동자4 그 내용이 먼데요.
셋째 사위 글쎄, 사람들이 잘 살게 되는 경로랄까, 뭐. 정책이 그런 거지, 뭐.
노동자3 복지 정책이야 여당 쪽이 근사하죠.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빈 공약 아닐까요?
셋째 사위 바로 그런 식이다 이거지. 여당 공약이 빈 공약이라고 주장할 뿐이지. 우리의 진정하게 가능한 공약이 무언지, 그것이 내용이지.
노동자2 얼터너티브론자시군요.
노동자4 뭔 티브? 무슨 소리예요 그게?
셋째 사위 별 소리 아냐, 가만. 이 사람 왜 이리 안 들어오지?
사위 퇴장.
노동자3 저 사람 여당 아냐?
노동자2 아냐, 그런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야. 똑똑한 사람이군. 하지만 문제는, 저런 사람일수록 운동에 뛰어들지 않으려 하구, 우리 같은 무식한 사람만 혼자 방방 뜬다는 데 있는 거겠지.
노동자4 저런 사람이 노동운동을 해요?
노동자2 모르긴 몰라도, 꽤 했을 걸?
노동자1 내가 듣기론, 결혼 전에 징역까지 살았다던가, 아니면 조사만 받고 나왔다던가, 그렇던데.
노동자4 그런데 어떻게 이 집 사위가 됐죠?
노동자1 이 사람, 이집 따님은 더한 분이셔.
노동자4 그래요? 그냥 예쁘장하고 섹씨하게 생겼는데?
노동자1 허허, 그 조둥아리하고는. 그런데 이분들이.
노동자1 퇴장.
노동자2 그냥 뜰까? 아무래도 위험한데?
노동자3 괜찮아요, 그냥 개기죠, 뭐. 우리가 뭐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노동자4 그래두, 잡혀가서 또 그렇게 얻어맞어? 어이구, 끔찍해.
노동자2 이 사람, 꼭 뭔 일을 해야 걸려드나? 요즘은 특히 조심해야 돼. 선거철이라 무슨 조직 사건을 만들지도 모른다구.
노동자3 아, 노조가 다 조직이지 뭐. 조직 만드는 게 죄유? 맨날 집회·결사의 자유 보장하라, 그렇게 요구 조건은 꼬박꼬박 써넣으면서, 형님은 다 좋은데, 자기가 한 일보다 더 크게 생각하는 게 탈이야.
노동자2 후후, 그래? 내가 겁이 많다는 소리냐?
노동자3 아니, 그게 아니라. 형처럼 용감한 사람이 노조에 어디 있수?
노동자2 거 듣던 중 쑥스러운 소리다만, 그런데?
노동자3 그런데, 글쎄 잘 모르겠어. 형은 다 계획이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거고 그러지만, 어떤 때 보면, 아주 작은 일도 너무 크게 생각하는 것 같아. 영웅주의자라는 소리는 아니고. 뭐랄까, 우리들 일은 별게 아니고, 사실은 더 큰 일이, 어떤 거대한 음모가 우리 뒤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내가 형 대학 나온 것 때문에, 열등감 느끼는 건지는 모르지만.
노동자4 어쨌든, 형이 뭔가 우리하고 다른 사람인 건 분명하잖아? 난 처음엔 고까왔지만, 이젠 고마워하는 편이지.
노동자2 그렇게 생각해주니 내가 고맙고 미안하구나. 본의는 아니었어. 아직 수양이 덜 돼서 그럴 거야. 미안하다.
노동자3 아니, 신경 쓰지 말우. 노동자가 덜 된 것도 수양이 덜 된 건가, 뭐.
노동자2 물론이지. 난 정말 순수한 노동자가 되고 싶어.
노동자4 헹, 난 형 같이 대학교엘 나오고 싶은데?
노동자2 글쎄, 난 대학교 나와봤지만, 권하고 싶지 않군. 이렇게 얘기하면 기분 나쁘겠지만, 난 왜 일찍부터 노동 세계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후회가 돼. 너희들이 부러워. 너희들 앞에 놓여 있는 세계가 부럽다.
노동자4 그거, 다 가본 놈들이… 아차 실례, 가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 아뇨? 아, 장가 가본 놈이 거 갈 것 못 되더라고, 총각 놀리는 것과 뭐가 달라?
노동자3 에이, 그런 뜻은 아니시겠고. 아, 하여간 거 노동자 세상이란 말 너무 애매한 거 아니우? 그 첩 자식 하는 얘기보다 더 애매한데?
노동자2 첩 자식?
노동자4 형!
노동자3 으응, 어, 아냐. 그냥 해본 소리야.
노동자2 그 회장 아들 말이냐? 그 사람을 너 만났니?
노동자3 아니, 아냐. 내가 왜 그 사람을.
노동자2 그런 사람 만나지 마라. 니들은 상대가 못 돼.
노동자4 왜 못 돼요? 한방이면 날릴 텐데.
노동자2 농담하지 말구. 어, 웬 발자국 소리가 이리 많아. 야, 뒷문으로 튀어!
노동자3, 4 퇴장. 노동자2 퇴장. 방문이 열리고, 밖에서 셋째 딸과 형사들 음성.
셋째 딸 자, 보세요. 아무도 없잖아요. 들어가 보실래요?
형사1 아닙니다. 부군은 어디 가셨나요?
셋째 딸 아직 안 들어오셨는데요.
형사2 앞집 가게에 물어보니까, 들어왔다던데. 작업복 입은 노인네하고, 건장한 사내 셋도 들어오고요.
셋째 딸 그래요? 못 봤는데. 제가 늦게 들어와서. 하여간 지금 안 계셔요. 의심나면 찾아보시죠.
형사1 아닙니다. 이봐, 그만 가지. 그분 따님이셔.
형사2 안녕하세요? 남편 전력이 화려하시다면서요?
셋째 딸 뭐예요? 당신 지금 부녀자 희롱하는 거예요?
형사1 아니, 이 사람. 왜 그리 꼬장꼬장해. 실례했습니다. 또 연락드리죠.
셋째 딸 예. 괜찮아요. 수고하셨어요.
셋째 딸 등장. 잠시 침묵.
셋째 딸 휴우. 다 어디들 갔지. 거기 계셔요?
노동자2 등장.
셋째 딸 왜 혼자세요?
노동자2 아주 줄행랑을 놓은 모양인데.
셋째 딸 댁은 왜 안 놓으시고.
노동자2 얘들 먼저 올리느라고, 시간이 없어서. 그냥 웅크리고 있었죠.
셋째 딸 베테랑답군요.
노동자2 셋째 따님도 왕년 가락 나오시던데요.
셋째 딸 뭐예요?
노동자2 아니, 아니. 농담입니다. 그래두, 부녀자 희롱 건은 이쪽저쪽 다 써먹으시더군요, 하하.
셋째 딸 그랬던가요, 호호. 하도 습관이 돼서. 그러면 안 되는데.
노동자2 뭐, 탁효를 봤는데요, 뭐. 어쨌든,
셋째 딸 또 뭐예요?
노동자2 우린 이제 한 배를 탄 거죠?
셋째 딸 무슨 배요?
노동자2 뭐, 안 되면 제가 가서 절 숨겨줬다고 고발을 해도…
셋째 딸 저, 지금 농담할 기분 아녜요.
노동자2 그럼 뺨이라도 치시죠, 그러시구 싶었을 텐데.
셋째 딸 그땐, 생각해보니까, 저도 심했어요. 미안해요.
노동자2 아뇨, 저도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럴 만하겠더라구요. 내가 그 입장이었더라도.
셋째 딸 전, 우리 아버지 그만하면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댁은 어떻게 생각해요? 무리한 질문인가요? 제가 너무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있죠?
노동자2 글쎄요. 이제, 조직으로 돌아오시는 게 어때요?
셋째 딸 예? 무슨 소릴?
노동자2 따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조직에 계실 때부터.
셋째 딸 제가 있을 때부터요? 그럼?
노동자2 그래요.
셋째 딸 아, 남편이 오나봐요. 저, 이리 와봐요.
셋째 사위와 노동자1 등장.
셋째 사위 하하, 그러니까, 아저씨가 좋아했던 것은,
노동자1 저야, 큰애기씨를 옛날에 짝사랑했지요. 처녀 적엔 얼마나 미인이셨다구요, 정도 많으시구. 아니, 그것 때문에 숫총각으로 늙은 건 아니구요. 제가 어디 언감생심, 꿈이라도 꿨겠습니까. 하긴, 그땐 사장님과 제가 이렇게 천양지차로 신세가 갈라지진 않았지만.
셋째 사위 세월이 많은 걸 변하게 했어요.
노동자1 그렇죠. 아니, 꼭 세월 탓만은 아니지요. 제가 못난 탓도 있지요.
셋째 사위 세월 탓이 훨씬 더 크지요.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