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거리
종로의 어느 음식점, 바깥에서는 대규모 시위 중. 서자와 적자, 첫째 부부, 둘째 부부, 비서.
서자 강남 쪽으로 갔어야 하는데, 남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대충 정했더니 역시나군. 누추한 거야 그러려니 했지만, 하필 정통으로 데모 한복판에 있게 됐잖아.
첫째 사위 제가 좀 물정 어둡게 장소를 잡았습니다. 아늑하고 은밀한 데가 영 마땅찮아서.
둘째 사위 여기까지야 뭐 괜찮겠지요. 아무리 저래도 고급 건물은 함부로 못 건드리더라고요.
서자 그래도 알아요? 일부러 그런데만 까부수는 미친놈들이 더러 있기 마련이지.
첫째 딸 사장님 말씀이 맞아요. 반상회 얘기가, 전쟁 나면 특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숯검댕 칠하고 거지같이 변장을 하고 빨리 동네를 빠져나와야 한다 그러더라구요. 천한 것들은 부자만 보면 이성을 잃고 죽인다나요.
둘째 딸 어머, 언니는 반상회까지 다녀?
첫째 딸 으응, 그냥 한번 나가봤어.
둘째 사위 모범 시민이시네요. 거 표창 받으셔야겠네, 하하.
첫째 딸 예, 전엔 안 다녔는데. 요샌 하도 불안해서, 호호.
적자 뭐가 그리 불안해요?
첫째 딸 아니, 뭐. 불안하다기보다는. 어수선하니까, 궁금도 하고.
적자 여전히 미인이십니다. 제 집사람이 질투하겠어요.
첫째 딸 아이, 별 말씀을, 호호.
둘째 딸 언닌 참 청춘이에요. 피부가 어쩜 그렇게 화장을 잘 받우? 형부가 너무 잘 해주시는 것 같아.
서자 이 새끼들, 또 남의 차 부수는 거 아냐? 어이, 비서, 비서?
비서 등장(수시로 들락거림).
비서 예? 부르셨습니까?
적자 아니, 자네 말고. 우리 사람.
첫째 사위 아녜요, 괜찮습니다. 거 실장님 사장님 차 잘 좀 돌보라구. 혹시 기쓰 나면 안 되니까. 우리 차도 좀 보고, 응?
비서 예, 알았습니다.
둘째 사위 그럼 오늘 얘기는,
서자 아, 좀더 하죠. 예민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
적자 아, 그 얘기는 차차…
서자 아니 형, 오늘 얘기해야 돼. 아무리 작은 회사라지만 그래도 말이야. 아니 기존 관계를 바꾼다는 게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니라구. 더군다나, 아무리 나이 70에 노환이라지만, 아주 죽은 것도 아니고. 대표는 엄연히 아직, 그분이니까.
첫째 사위 아니, 명의 바꾸는 게 그렇게,
서자 어허.
둘째 사위 당신 좀 나가 있지.
첫째 딸 명의요? 회사 명의를 바꾸려구요? 당신 이름으로요?
첫째 사위 당신은 나가 있구료.
첫째 딸 왜요? 사장님, 아니, 기획실장님, 제가 있으면 안돼요?
둘째 딸 언니, 나가 있습시다.
서자 잠깐이면 됩니다.
적자 이거 죄송해서.
둘째 딸 괜찮아요, 밖에 있을게요.
첫째 딸, 둘째 딸 퇴장.
서자 아직 얘기 안한 거야?
둘째 사위 글쎄, 그냥 눈치만 줬는데, 알 거예요. 전부터 얘기하던 거니까.
적자 형님은요?
첫째 사위 안했어요. 허허, 워낙 자기 아버지한테 꼼짝 못하는데다가, 입이 좀 경해서요. 뭐, 한 거나 진배없습니다. 암만 울고불고 그래도, 제가 결정을 내리면 따를 거예요.
적자 그래도, 최소한 두 따님 동의는 사전에 얻기로 했잖은가.
서자 됐어, 어차피 셋째가 문제지. 그 남편이란 놈도 겉은 허약해 보여도, 독종 같은 데가 있단 말이지. 그건 내가 잘 알지. 나도 독종이니까. 이 자가, 눈 한번 피하는 적이 없다구.
둘째 사위 처제가 더 문제예요. 혈족이니까.
첫째 사위 처제는 그래도 착해서, 욕심은 없는 편이야.
서자 정신 차려요. 지금 집안 식구 평가해서 상 주자는 자리요? 착해서 안됐다는 소리요, 뭐요?
적자 됐다, 그렇잖아도 심란하실 텐데 너무 몰아세우지 말거라.
서자 아니, 형님은? 이거 잘못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그러슈? 아, 이 사람들이야 그깟 코딱지만 한 회사 날리면 그만이지만, 우린 걸렸다 하면 그룹이 몽땅 날아가는 거예요. 이 사람들하고 똑같이 보조 맞추면 절대 안 된다구요. 이 사람들 주판 튀길 때 우린 슈퍼컴퓨터를 조종해도 모자랄 판이란 말이요.
첫째 사위 그렇게 크게 염려하실 일은…
둘째 사위 사장님 말씀이 백 번 옳아요. 좀더 빡빡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제 집사람한테 확실한 다짐을 받아놓지요.
적자 아니, 그럼. 슈퍼컴퓨터를 운용해서, 니가 그룹을 다 말아먹겠다는 소리 하는 거냐, 너?
서자 그게 아니라, 잃을 것이 더 많은 우리가 어차피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이거유.
첫째 사위 사람이 크게 다칠 일은 없겠죠?
둘째 사위 지금 그거 따지게 됐어, 나 참. 장인 회사 말아먹겠다는 사람이, 사람 다치는 걸 걱정해?
첫째 사위 이 사람, 자네 말이 너무 과해. 이게 나 혼자 좋자구 이러는 겐가.
둘째 사위 형님은 제발 처형 단속이나 잘 하세요.
적자 사람이 다쳐선 안 되지. 더군다나 집안일인데.
서자 다치지 않아도 되게끔 계획을 잘 짜야죠. 아, 하품 나네. 우리도 그 파업을 써먹을 수 없을까?
적자 그게 뭔 소리냐, 너?
서자 아뇨. 그냥 해본 소리유. 왜, 그, 파업을 유도해서 정부가 위기를 넘긴다는 말 있잖우.
적자 뚱딴지같이 그 얘기는 왜.
둘째 사위 그러니까, 요번 일에, 파업까지 끌어들여 일을 성사시키자는?
서자 내가 언제 그랬나. 당신은 항상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내뱉어서 탈이야. 아, 지금 이 난리판에 우리가 파업하는 놈 걱정까지 하게 됐어?
첫째 사위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군.
서자 자자, 한잔들 드시고. 뭐야, 왜 이리 소란해?
‘우당탕’ 소리 나고, 첫째 딸, 둘째 딸, 노동자4, 노동자3에 업혀 등장, 그 뒤로 비서 등장.
첫째 사위 아니, 여보?
둘째 사위 어, 자네들 어쩐 일이야?
서자 야, 무슨 일이야?
비서 예, 저. 폭도들이…
적자 맞았어?
비서 예, 아니. 유리에,
서자 이 새끼가, 왜 말을 더듬어 더듬길. 누가, 쳐들어왔어?
비서 아, 아니요. 그냥 좀 기절하신 거예요. 거리에 구경 나가신다고 하길래.
둘째 사위 구경? 누가 그리 가랬어?
비서 제가, 말렸는데. 막무가내라서, 어.
노동자4 맞아 죽을 걸 모셔왔시다.
서자 어, 자넨 어디서 본 친군데? 어, 그렇군. 야, 비서! 니가 모셔오지 않고 왜 이런 것들한테, 어. 수고했어.
노동자3 왜, 이런 꼴이라 겁나슈? 부인 단속들 잘 해요. 아, 데모는 못할망정, 니기미.
노동자4 데모 구경하다가, 지 혼자 꽥꽥 사람들 욕하다가, 뭐라는지도 모르겠어요. 왼갖 욕을 다하고. 입 걸드만.
둘째 사위 고맙군.
노동자4 고맙긴, 난 웬 미친년이 요란하게 치맛바람을 날리나 했지.
노동자3 야, 나가자.
첫째 사위 고맙네, 큰일 날 뻔했구먼.
노동자4 고맙긴요, 그래도 당신 같은 멀건이보다는 독하고 맵디다.
둘째 사위 이 사람이, 지금 미쳤어? 어느 안전이라구.
노동자4 니기미, 안전이고 산업재해고 간에, 이거 안 받을 거유?
첫째 사위 그래, 아 여보. 많이 다쳤어?
노동자4 거, 되게 무겁네, 역시 부잣집 딸은 속으로 살이 찌는가 보지. 우와, 진수성찬이네, 난 음식 이름도 모르것다.
노동자3 야, 나가자. 씨팔, 언놈은 맛난 음식에 배때기 터지고, 언놈은 뙤약볕에 몽둥이 세례고. 이런 거 업어다준 우리가 속창시 빠진 놈이지.
둘째 사위 야, 비서! 저쪽으로 눕혀드리지 않고 뭐 해?
비서 예? 예!
첫째 사위 얼빠진 놈 같으니라구.
적자 그래, 수고했소. 어떻게 보답을.
노동자4 보답? 그래, 백지수표 한 장 주시려우?
서자 못 줄 것도 없지.
노동자4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자리에서 술 한잔 사주시려우?
첫째 사위 그건 좀.
노동자3 야, 새끼야! 나가자니까, 이런 부류하고는 어차피 상종 않는 게 속 편해. 우리 팀이 벌써 한참 갔겠다.
노동자4 가만있어 봐, 가 봐야 그렇지. 그건 뭐 우리하고 딱히 상관있는 싸움이우? 그래, 전무 양반? 나야 해고된 몸이지만, 그래. 왜 백지수표는 줘도 술 한잔은 못 사주시것다?
첫째 사위 그건, 자리가 좀 그래서… 의논 중이고.
노동자3 와하하, 먹는 데도 24시간 넘게 걸리겠구만, 의논 중이래. 한솥밥은 죽어도 못 먹겠다 이거지. 야, 나가자니까!
적자 그럼 이거라두.
서자 아냐, 그러세. 앉게.
둘째 사위 사장님 그건 좀.
적자 아니, 왜 그래?
노동자4 오, 그래. 당신 첩 자식이라메. 같은 처지라 이건가?
첫째 사위 이 사람, 그만두고 나가게.
둘째 사위 아니, 이 새끼들이!
서자 아냐, 놔둬. 괜찮아. 그래 맞아. 난 첩 자식이야. 그래도 니들하고야 엄청 다른 처지지. 일류 대학 야간하고, 국졸하고 같겠나? 사무직하고 생산직만 해도 엄청난 차인데, 안 그래? 니들은 겨우 그런 차이 해소하자고 농성이다 단식 하는 거 아냐? 안 그래?
노동자4 이, 이, 개자식이!
노동자3 당신, 만만한 사람이 아니군. 하긴, 사장 놈치고 만만한 놈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다른 똥개보다는 좀 성깔이 있는 것 같아.
서자 자, 자. 우리, 이것도 인연인데, 터놓고 술 한잔 마시세.
적자 난, 그럼 이만 갈란다.
서자 왜, 한잔 더하지 않고. 그래, 그게 좋겠네. 가세요.
적자 퇴장.
첫째 사위 에?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획실장님.
서자 마누라는 데리고 가셔야지.
첫째 사위 에? 예! 여보, 일어나 봐. 이런 옷에 피가 흥건하구먼, 아이구 매워.
노동자4 니기미, 언제 파편이 팔뚝에 박혔네? 재수 옴 붙었구만.
노동자3 하두 악악대니까. 경찰이 데모하는 줄 알고 그쪽으로 지랄탄을 날립디다. 원, 데모 때보다 더 많이 맞았네.
서자 자, 이걸로 피를 좀 닦지.
첫째 딸 여기가 어디예요? 여보, 당신이에요?
첫째 딸, 첫째 사위 퇴장.
둘째 사위 어이 비서. 좀 깨워봐.
서자 왜 가시게?
둘째 사위 그럴… 까요? 뭐, 있어도 괜찮구요.
노동자3 있으슈. 옛날 상무님하고 합석하는 기분도 괜찮을 테니까.
서자 앉아 계시죠.
둘째 딸 아이, 응, 여보? 으응. 그래. 그 분들은 어디 있죠?
노동자4 여기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둘째 사위 일어나 똑바로 앉지. 당신 정말 어떻게 된 거야?
둘째 딸 아이, 뭐.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아, 머리야.
노동자3 좀 더 누워계셔요. 뭐, 어차피 업히기까지 했는데.
서자 허허, 이 사람 짓궂네.
둘째 딸 댁이, 절 업고 왔지요? 아, 그래. 그 개자식들.
노동자4 그 개자식들 속에 우리가 있었우.
노동자3 이 사람, 그만해.
둘째 사위 옷매무새 좀 고쳐요, 여보. 아무리 트인 여자라지만.
둘째 딸 네. 오늘은, 신세 좀 졌네요. 다음에 꼭 갚죠.
노동자3 뭘로요, 해고된 사람 또 만날 일 있을라구요.
둘째 딸 아니면 지금 갚지 뭐. 아니, 그게 아니고. 정말 고마워요. 죽는 줄 알았어요. 무서워서 혼났어요. 기절하고도 악몽을 꾼 것 같네.
둘째 사위 그러게 거길 뭐 하러 가?
둘째 딸 아, 가고 싶어 갔어요? 당신이 나가 있으라니까, 심심해서 그냥, 구경 나간다는게… 우리 차한테 돌을 던지잖아요.
둘째 사위 뭐, 차에다 돌을, 어떤 새끼가?
둘째 딸 그래서 나도, 당신처럼 어떤 새끼야 돌 던진 게, 그랬죠. 그랬더니, 와, 저년 죽여라, 때려 죽여라, 막 그러구 달려들더라구요.
노동자3 거짓말도 잘 하시네. 아, 댁이 해댄 욕에 비하면 사람들 쪽은 채 반도 안 되겠소. 그리구, 댁이 욕을 하도 해대니까, 차를 부쉈지, 차를 부숴서 댁이 욕을 했소, 어디?
둘째 사위 뭐, 차가 부서졌어? 어디?
둘째 사위 퇴장.
노동자3 아주 깡그리 탔소, 잊으슈.
둘째 딸 어머, 차가 탔어요?
노동자4 아줌마는 실오라기 하나 안 탔으니까, 걱정 마슈.
둘째 딸 흐음. 정신없는 중에도, 등이 아주 딴딴하데요?
노동자3 에? 에.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사니까.
노동자4 아냐, 돌을 던지긴 했지.
노동자3 돌 던진 거 하고 부순 거 하고 다르잖아.
서자 둘째 따님은 그 와중에, 여유 만만이시군.
둘째 딸 어머, 호호. 저야 제 이름이 여유 아니겠어요?
서자 농담도 잘 하시고.
둘째 딸 사장님은 뼈 있는 농담을 잘 하시고요.
서자 으흠.
노동자4 그게 그거지. 돌 던진 놈이 차 불 안 지르것어?
둘째 딸 호호. 노동자들도 툭하면 싸우시는가 부죠?
노동자3, 4 예? 에, 그게 아니고.
서자 비서! 상무님 안 오시나?
비서 예, 제가 찾아볼까요?
서자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둘째 딸 제가 나가 보죠.
노동자3 밖엔 아직 소란한데?
둘째 딸 괜찮아요. 전 죽어도 두 번 실수는 안 하니까. 사장님께서도 그걸 바라시는 것 같고.
서자 제가요? 아니, 아닙니다.
둘째 딸 뭘요, 그렇게 얼굴에 그렇게 써 있는데. 괜찮아요.
서자 으흠.
둘째 딸 퇴장. 잠시 침묵. 조명 반쯤 그려짐, 그림자.
서자 자 자네들, 내 말 잘 들어보게. 자네들이 원하는 건 더 많은 임금 아니겠나. 자네들이 무슨 정치를 하려는 건 아니잖아? 아까 저 친구도 얘길 하드라마는, 이래 갖곤 죽도 밥도 안 돼. 하긴 이따우로 차나 부수는 걸 정치라 그럴 수도 없겠네마는, 자네들도 이제 고급 기술도 배우고, 공장도 큰물에서 놀아야 되지 않겠나? 아니면 좀 있다 관리직으로 올라가든지. 그게 다 교육을 받아야 되는 일이야. 난 잘 알어. 이건 자네들에 대한 대접이 아니지. 자네들은 최소한 이것보다는 더 성장했어. 이런 가투 따위는, 이런 천박한 ‘배고파서 못 살겠다’ 같은 구호 따위는, 자네들에게 영화에 나오는 거지 옷일 뿐이야. 자네들도 이런 식에다가 운명을 맡길 생각은 없을 것일세. 자자, 내가 우리 회사로 선처해줌세. 블랙리스트 문제는 내가 해결하면 돼. 그 대신, 아 그 얘기는 차차 해도 되네. 그럼 난, 이만. 아, 괜찮아. 더 시켜 들게. 상무는 오지 않을 거야. 혹 못 만났으면, 둘째 따님은 올지 모르지. 잘들 해보시게, 허허. 나도 그런데는 트인 놈이라구.
서자 퇴장, 조명 약간 더 흐려짐.
노동자4 뭔 헷소리야, 저 새끼?
노동자3 가만있어 봐, 그러니까.
노동자4 왜 갑자기 해골을 굴리고 그래? 형답지 않게.
노동자3 그러니까, 그게. 하여튼, 이 꼴 갖고는 안 돼.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