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진출과 성장
1장 집
사장 거실에 마련된 만찬용 대식탁. 노동자 넷, 파출부.
노동자4 와, 으리으리하네요. 공장하곤 딴 판이야. 그런데 우린 왜 불렀죠?
노동자1 생신 때는 꼭 부르시지. 연령별로 1명씩 말이야. 오늘은 그 회장님 두 분도 오신다더라. 각별히 조심하게.
노동자2 옛날엔 저희 사장님 밑에서 일하셨다면서요?
노동자1 쉿! 아랫사람은 그런 소리 함부로 입 밖에 내는 게 아냐. 그러니까 우리 회사를 얼마나 잘 돌봐 주시냐.
노동자3 뭐, 다 회사에서 아는 얘긴데. 사장이나, 재벌이나.
노동자4 씨벌, 그런 자리에 우린 왜 불러. 기죽일 일 있나.
파출부 으이구, 이 양반도 어지간한 인생이구먼. 내가 보는 것만도 줄잡아 20년은 됐겠수. 나 같은 년 팔자도 드세지만, 정말 질기슈 질겨.
노동자1 먹고 살라니 별 수 있나요. 목구멍에 밥 갖다 주는 기술이라곤 그것뿐인데. 작업반장이면 됐지.
노동자4 되긴, 뭐가 돼요. 단물 다 빼먹구, 겨우 반장이라니. 옛날엔 친구처럼 대해줬다면서요.
노동자1 지금은 안 그런가, 뭐. 명절 땐 가욋돈도 주시고. 난, 요즘 그 파업하는 거 사실은 맘에 안 들어. 40년 기름밥 먹은 나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야. 괜히 불안하기만 하구.
노동자3 40년 기름밥을 드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노동자1 이 사람이. 뭔 소릴 하는 게야? 자네들이 나만큼 고생을 해봤어?
노동자2 그런 얘기가 아니겠죠. … 우리 회사도 그런 기운이 있던데요?
파출부 괜히들, 몸 조심혀. 나도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노동자들 들썩거리는 게 6·25 이후 처음이라구. 그 뒤론 군인들 세상이여. 사회가 들썩댄다지만, 군인들 나서면 멍만 들지.
노동자3 아줌만 세상 보는 눈이 꽤 밝으시네요.
노동자4 난, 거 군바리고 뭐고, 노동자들이 월급 올려 달라는 건 좋은데. 대학생 년놈들이 데모하는 건 정말 못 봐주겠더라. 아, 안 그래요. 나이로 보면 동생도 막내 동생이 뻘인데 말이유. 이 좆 겉은 놈들이, 뒤집을라면 확 뒤집던지. 반반한 년 어깨동무하는 게 재미나는 건지, 짱똘 하나 제대로 날리지 못하는 주제에. 괜히 옆에 있다가, 덩달아 나까지 최루탄에 눈물이나 징징 짜고. 로타리 다니기가 겁나드라니까요.
노동자3 그래도, 노동자 얘기해주는 게 걔네들밖에 더 있나 이 사람아.
파출부 자 자, 오늘은 사장님 생신 잔치에 초대받은 어엿한 손님이신께, 이거나 우선 들어봐, 골치 아픈 토론 냅두고.
노동자1 손님들 오면 같이 들어야 할 낀데.
파출부 나 이런, 나이 오십에 눈치래도 늘었어야지, 이 양반. 동생들 걷어 먹이기는 애시 당초 틀린 사람이로세. 아 이따가 으리으리한 손님들 들이닥치면, 곧장 꿔다논 보릿자루고 찬 음식 차질 텐데, 미리미리 뜨신 것 먹어둬. 당장 이 집 마님만 나와도, 쑥 기어들어갈 사람이.
노동자1 그래, 맞아. 이러다가 불쑥 마님이라도 들어오시면 어쩔라구.
파출부 마님 좋아하시네.
노동자2 빨리 드세요, 아저씨만. 아 거 과부가 홀애비 대접 좀 하신다는데, 왜 그리 쑥맥이세요, 아저씬.
파출부 홀애비? 과부? 이 사람아, 내가 골 볐나. 인생 말년에 아새끼들 여직 치마꼬리 붙들고 줄줄 늘어지는 것도 지겨운데. 아, 돈 한 푼 못 모아논 사람하고 정분을 또 내? 난 그래도,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 하나에 대해서는 완전 또순이로 산 사람인데, 이런 무일푼에 답답한 청춘하고? 그런 소리 하덜 말어.
노동자3 재밌는 아주머니시구나. 그래도, 재산 없는 것까지 아시고, 조사 많이 하셨네요, 아주머니?
노동자1 거 실없는 소리 말어. 자, 드세.
첫째 딸과 첫째 사위 등장.
첫째 딸 아, 괜찮아요, 그냥 드세요. 아저씬 한 식구나 다름없잖아요. 다른 분들은 처음 뵙는 분 같네요. 안녕하세요? 아 일어나실 것 없어요. 그냥 드세요. 아줌마.
파출부 예?
첫째 딸 이분들 빨리 드시게 하고 식탁 깨끗이 치워놓으세요.
파출부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방백) 니도 양반되긴, 애시 당초 글러 먹었다. 해필, 요때 시간 맞춰, 튀어나오냐 튀어나오긴, 얼굴은 꼭 고양이처럼 새빨갛게 칠해갖고.
첫째 사위 여보. 당신 옷차림이 오늘 좀, 과하잖어?
첫째 딸 여보, 당신은 그게 탈이에요. 아, 요즘 이 정도가 어떻다고 그래요. 늘 고루해, 당신은. 이이는, 자기 좋은 옷만 입으라 그래서, 올이 해어질 정도라니까요, 호호. 일류 대학 나왔다는 분이 완전 파쇼예요.
첫째 사위 어허!
첫째 딸 저이는 룸살롱도 안 가실 거야, 그쵸?
첫째 사위 당신, 손님들 앞에서, 그게 무슨 망발이야?
첫째 딸 아차, 죄송. 죄송, 죄송합니다, 호호. 오, 그래. 어서들 와. 어떻게 같이 만나서 왔니?
노동자4 (방백) 손님이 아니라, 천한 노동자들 앞에서겠지, 니미럴 놈.
둘째, 셋째 딸과 사위 세 명 등장.
첫째 사위 어서들 와, 별일 없지? 신수가 훤하군.
셋째 사위 형님도 안녕하시구요? 하긴, 요새 노동자들이 저 난리니. 아, 아버님 공장 분들도 오셨군요. 고맙습니다. 매년 이렇게 와주셔서.
둘째 사위 자네도 요즘 학생들 때문에, 골치 아프지?
셋째 사위 뭐, 그냥. 허허.
셋째 딸 이인 그래두, 어용 교수로는 안 몰렸는데.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아서 걱정인가 봐요.
둘째 딸 어머, 그러다가, 감투 하나 쓰시겠네요.
셋째 딸 언니는… 그래두, 난 학생들이 이해가 가.
둘째 딸 어이구? 옛날 가락 또 나오는 거니 너?
셋째 사위 여보, 거 괜한 얘기를 왜.
셋째 딸 그렇잖아요? 학생들도 들고 일어날 때가 됐잖아요?
둘째 사위 그리고 아버님 회사 공원들도 들고 일어날 때가 되었다?
셋째 딸 그건, 음. 좀 다르죠.
노동자4 (방백) 그래, 아주 앞에 놓고 엿 먹여라. 놀아라, 놀아.
셋째 사위 여보!
셋째 딸 알았어요. 아, 아버지.
사장과 비서 등장.
사장 오, 그래. 다들 모여주었구나. 자네도 왔군. 많이들 들게. 그래도 내 생일이라고 모여주니 다행이다.
노동자1, 2, 3, 4 축하드립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첫째 사위 무슨 말씀을 그렇게, 아버님 생신 때 모이는 거야 당연하죠.
사장 으음, 그렇지는 않아. 난, 이제 시체가 다 된 몸이고. 오늘도, 애들은 안 보이지 않느냐. 그렇겠지. 팔팔한 놈들이, 늙은이 냄새가 좋을 리 없지.
첫째 딸 아녜요, 아버지. 무슨 학교 친구 약속이 있다구, 좀 늦는다고, 죄송하다고 아까 전화왔었어요.
둘째 딸 우리 애들도 곧 올 거예요. 얘들이 왜 이리 늦지?
사장 아니다. 할애비가 좀 화통한 데가 있어야지, 만날 잔소리만 늘어놓으니 걔들인들 좋을 리 있겠냐. 그래도 요즘 같은 때 데모 안 하는 것만 해도 효도니라.
둘째 사위 장인어른, 우리 애들은 고등학생들입니다.
첫째 사위 그건 그렇습니다. 가끔 자동차 사고를 일으켜서 그렇지, 데모하는 친구는 한 놈도 없는 것 같아요.
사장 그래. 셋째네는 별일 없구?
셋째 딸, 사위 네.
사장 애기 소식은 여직 없는 거냐?
셋째 딸 네.
사장 결혼한 지 2년이나 됐는데. 늦게 결혼한 거야 어쩔 수 없다 치고, 니 언니들은 벌써 자식들이 대학생 고등학생 아니냐. 결혼도 유난스레 하더니, 거 뭐냐, 일부러 안 놓는 것 아닌가, 자네?
셋째 사위 아닙니다. 빨리 애를 봐야죠.
첫째 사위 자네 그게 부실한 거 아냐?
사장 쓸데없는 소리. 으음. 좀 서늘하군. 아줌마. 보일러 껐나?
파출부 아뇨. 꺼졌나?
셋째 사위 사업은 두루두루 잘 되시지요?
사장 그렇지 뭐. 자네가 바라던 민주화가 되긴 됐군 그래. 노태우가 나긴 난 사람이야. 그런데, 민주화가 꼭 이렇게 난리를 쳐야 하는 건가? 아, 그래. 공장 사람들하고 인사는 했나?
노동자1, 2, 3, 4 예.
노동자2 (노동자3에게) 저 분이 그 교수인 모양이지?
노동자3 (노동자2에게) 그런가 보네요. 뭐, 별거 아니잖아? 앙상해갖고. 부인은 좀 차보이잖아?
노동자4 (노동자3에게) 젤로 사근사근하겠는데?
노동자3 (노동자4에게) 이 새끼가 또? 너 콩밥 먹다 맞아 죽고 싶어?
노동자4 (노동자3에게) 괜히 그래. 형도 좋으면서, 히히.
둘째 사위 공장이 좀 시끄럽다던데?
노동자1 아, 예. 뭐, 별일 없을 겁니다. 젊은 사람들이 좀 들썩거리기는 하는데. 장기 근속자들은…
첫째 사위 자넨 그 얘기를 이런 자리에서 왜.
둘째 사위 어때요 뭐. 아버님도 다 아실 텐데. 젊은 애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몰라요, 안 그래요, 아저씨?
노동자1 예? 예, 그게. 아직 어리니까.
둘째 사위 땀 흘리고, 땀 흘린 만큼 대가를 받고, 그게 사실 가장 소중한 건데. 벌써부터 힘들 일은 피하구, 여공 애들은 툭하면 돈 쉽게 벌겠다구 술집으로 튀고, 말세야 말세.
둘째 딸 여보. 그만해.
사장 자넨, 말을 함부로 하는 게 탈이야. 그런 자네는 힘든 일을 해봤나?
둘째 사위 그런 건 아니지만.
사장 그리구, 너도 그렇다. 아무리 동갑내기라지만, 남편한테 말투가 그게 뭐냐? 다 큰 애들 앞에서도 그러냐?
둘째 딸 아이, 아버지는. 또 시작이셔.
사장 아, 얘들 교육상. 애들 앞에서 부모들끼리 반말 하는 게…
둘째 딸 애들이야, 뭐, 지들이 알아서 크는 걸요.
사장 허허. 알아서 커? 니들이 다 알아서 큰 줄 아는 모양이지?
둘째 딸 아버지. 그건 옛날 말씀이고요, 요샌 안 그래요. 애들이 으찌나 약아빠졌는지. 부모의 동정을 이용해서, 뒤통수를 친다니까요. 괜히 부모가 제 혼자 정 주고 난리치다가, 말년에 섭섭하네, 배신감 느끼고 그럴 필요없다구요. 지들이 알아서 크는 거지.
둘째 사위 여보, 그만해.
사장 말하는 뽄세하고는. 그게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렸다?
둘째 딸 아버지가 언제 저한테 정주셨어요?
둘째 사위 여보. 그만하라니까.
둘째 딸 당신은 그게 탈이에요. 왜 집에 와선 입이 대자로 나와서 툴툴거리면서 정작 당사자 앞에선 아무 말도 못해요? 나만 만만해요?
둘째 사위 내가 어쨌다고 그래.
둘째 딸 아이 참. 난, 아버지가 그런 말씀 하실 때면 이제 지긋지긋해요. 청승맞은 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장 저런 못된 것.
첫째 딸 얘, 아버지한테 그러면 못써. 그래두, 좀 잘 살게 됐다구, 너도 나도 한탕주의로 빠지는 건 문제잖아요, 아버지. 둘째 사위 말씀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아요.
사장 니들은 모른다. 주물 일이 얼마나 힘든지. 첫째네만 해도, 철들기 전에 전쟁 겪고 그랬다만, 네 엄마는 니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했어. 이러구저러구 고생한 기억은 니들 머릿속에 없을 것이다. 첫째 사위나 고생을 좀 했을까. 나이 오십이거나, 지금 힘든 노동을 하거나, 그건 해보지 않은 사람이면 모르지. 난 명색이 사장이지만, 공원들하고 같이 일을 했어. 안 그런가?
노동자1 그러믄입쇼. 자네들은 모를 게야, 아마. 옛날에, 사장님이 근력 좋으실 때, 그땐 참 대단하셨지. 모르긴 몰라도 열 살 적은 사람보다 작업량이 배 반은 족히 되셨을 것이네.
노동자2 그러셨군요. 하긴 그땐 너두 나두 허리띠를 졸라맸을 때니까.
노동자1 그땐, 정말 노사라는 게 없었는데.
사장 그래서, 난 생일 때마다 공장 사람들을 초대하는 게야. 자네들은 우리 집이 처음이지?
노동자2, 3, 4 예.
사장 너무 잘 산다고 욕하지 말게. 난,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자네들보다는 잘 살 자격이 있어. 지금도 그래. 난 잠자는 것 몇 시간 말고는 온통 회사 일에 매달려. 자네들이야 어디 그런가. 잔업 약간 시켜도 허리 부러지는 소릴 하잖나. 실상, 잔업이나 해야 먹고살 거면서도 말이야.
노동자4 (방백) 그러니까, 월급 올려주면 될 것 아닌가, 제기랄. 밥알이 곤두서네.
사장 그리고 투자라는 게 모험인데, 내 돈 들여갖고 공장 지어서, 좀 남으면 내가 좀 더 먹겠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이야? 안 그래? 어떤가, 자네.
노동자3 그렇지요, 하지만.
첫째 사위 그렇지만 뭐야? 아, 똘똘 뭉쳐 합심해도 회사가 일어설까 말까 한 판에, 지 일 아니라고 일손은 판판이 놀리면서, 월급만 올려 달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이 없어요. 자기 회사를 위해 희생하고 손해 볼 생각이 털끝만치도 없단 말이야. 그리고 아주 치사해. 아니 민주화를 시킨 게 노동자들인가? 학생들 아냐? 그런데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나서?
셋째 사위 그런 건 아니고. 형님. 너무 흥분하신 것 같네요.
노동자3 전 갈랍니다.
노동자2 앉게, 축하드리러 와서 왜 그러나.
사장 그래 앉아. 아냐, 그건 우리 전무 말이 틀렸어. 그렇게 얘기해선 안 되지. 주인은 엄연히 나야. 자네들은 엄연히 주인이 아니고. 주인이 더 신명나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다만, 난 자네들을 가족보다 더 아끼고 있다는 것이네. 내가 사업을 하는 이상, 자네들은 식구보다 더한 사람들이지. 학생들이 민주화를 해? 경제는 누가 일으켰는데? 불쌍한 노동자들이 밤잠 못 자고 일으킨 거야. 난, 외래, 그 고생한 노동자들은 암말 없는데, 등 따시게 잘 지내는 놈들이 하란 공부는 안 하고 왜 저 난린가, 그런 생각일세. 내겐 자네들이 훨씬 더 소중해. 훨씬 더 착한 사람들이지. 자식들이야, 지들 키우느라 부모 이렇게 늙고 나니까, 빨리 치우고 재산 분배받을 생각밖엔 없어.
첫째 딸, 둘째 딸 아빠!
첫째 사위 아니, 장인어른.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사장 그래, 자네들은 다 일류 대학을 나왔지. 둘 다 경영학과루다가. 쟁쟁한 학과 아닌가. 딸애들도 그렇구. 물론 처음엔 열심히 일하더군. 둘짼 좀 다를까 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어. 경영은 말할 것도 없지. 그거야 꼭 배운 대로 되는 게 아니니 그렇다 칠 수 있어. 하지만 자네들은 주인 의식도 없고, 그렇다고 옛날 노동자들처럼 근면하지 않더란 말일세. 역시 사업이란 식구들한테 물려주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너무도 뒤늦게 들었어. 그러니 내겐, 마누라하고, 노동자밖에 없어. 그래도, 셋째는, 내 결혼하는 건 완강히 반대했었네만, 이제 와서 보니,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데가 있는 것 같아.
셋째 사위 별 말씀을. 저도 먹고 살라고 별짓을 다합니다.
셋째 딸 이인, 매몰차지 못해서, 사업은 못할 거예요, 그쵸? 만날 벌어다 남 주는 게 일이니까.
셋째 사위 쓸데없는 말을.
사장 아냐, 제 식구 안 걷어 멕이고, 남한테 선심 쓰는 놈처럼 팔불출이 없는 게야. 남 도와주는 것도 제 식구 배 바깥에 있는 거라야지.
셋째 딸 아버지. 이이는, 만날 착하고, 약하기만 해요. 그러고는 ‘어 그랬나, 미안해,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군.’ 그럼 끝이에요.
노동자3 (노동자2에게) 저 봐 보통이 아니잖아요.
노동자2 (노동자3에게) 그럼, 아주 순덱인 줄 알았나?
사장 그래도, 착한 것만큼 귀한 것은 없다. 네가 굶는 것은 아니잖느냐. 물론, 나도, 네 남편에게 회사를 물릴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다마는.
셋째 딸 아버지. 괜한 말씀 마시고, 식기 전에 식사나 하세요.
사장 아니다.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기로 해서, 오면 같이 먹을란다. 이 친구들이 좀체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없는데.
파출부 그래두, 한술 뜨시고. 손님들이 오시면 다시 상을.
사장 아니. 괜찮아요. 그래, 이 집에서 내 생각 해주는 건 아줌마밖에 없군.
첫째 딸 아빠!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저희가 뭘 안 해드렸다고요. 흐흑.
둘째 딸 언니, 진정하우. 아버지 괜히 저러시는 거 다 아니까. 언니만큼 아버지 잘 모시는 사람 있수?
셋째 딸 그래, 언니. 언니 고생하는 거 다 알아.
첫째 딸 흥, 네가 뭘 알아. 얌체 같은 게. 점수만 살살 따놓을라고.
사장 난 도대체, 네 엄마 보낸 뒤로 이 집에서 따스한 기운을 느껴본 적이 없다. 항상 뭔가 음흉하고, 심지어 살벌한 기분까지 들어.
둘째 딸 그거야 아버지가 괜히, 센치해지시니까 그렇죠. 아, 장성한 딸 셋에다 번듯한 사위까지 봤는데, 뭐가 모자라시다고 허하세요, 허하시기를.
사장 넌 평생 내 말귀를 못 알아듣고 사는구나.
둘째 딸 어머, 기가 막혀. 공원들 앞에서 딸한테 하시는 말씀이라니. 아니 셋째 딸이 어디가 그렇게 귀여우셔요? 저희만 한 나이쯤 되면, 번듯하게 사는 것도 효도라구요. 아, 시집을 늦게 갔으면, 잘 살기라도 해야지. 말이 대학 교수지, 아직도 전세에다가, 뭐가 그리 이쁘다고. 저 시원찮은 교수한테 회사 물려주시면 1년도 못가서 망한다고요. 학원이라면 모를까.
둘째 사위 여보!
사장 그래, 니들은 니들이 벌어서 그리 번듯해졌느냐, 고연 것들.
둘째 딸 난, 할 말을 해야겠어, 아버지. 회사 물려주시는 것 아버지 맘대로 하시면 절대 안 돼요, 알았죠?
파출부 그만들 하셔요. 이러시다가 싸우시겠어요, 손님들도 와 있는… 데.
첫째 딸 손님? 흥! 아줌마가 뭘 안다고 그래요.
파출부 그래도 알건 다 알죠. 아가씨 소녀 적부터 이 집 출입했으니까요.
첫째 사위 아니, 아줌마.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요?
노동자1 사장님 그럼 저희는 이만,
사장 아냐, 그냥 있게. 이게 우리 집안 꼴이야. 더 챙피할 것도 없네. 조금만 더, 아 이제들 오는가 보군. 왜 이리 늦었담.
비서 오십니다.
무대 뒤 음성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게.
재벌1, 2, 재벌2의 적자와 서자 등장.
사장 어서들 오시우, 회장님들.
재벌1 하하. 안녕하시죠, 형님?
재벌2 옛날 부하들한테, 회장님이 다 뭐유, 허허. 자네들도 집안 다 평안허지?
적자 (첫째 사위에게) 그래 회삿일은 잘 돼가요?
첫째 사위 (적자에게) 뭐, 정신없지요. 아무래도 한판 벌어질 것 같은데.
적자 (첫째 사위에게) 파업?
첫째 사위 (적자에게) 공장 사람들이 와 있어요, 이따 얘기하죠.
서자 (둘째 사위에게) 그래, 해먹을 만 해요?
둘째 사위 (서자에게) 미치겠어요, 요것도 회사랍시고 사장이 쪼죠, 전무가 으르죠. 윗대가리라고 노동자들을 좆도 모르면서 말예요.
서자 (둘째 사위에게) 처지가 나랑 같군. 난, 형 땜에 미치겠어. 도무지 현장 사정을 몰라. 그러면서 기획실장이라고, 나만 몰아치는 거야. 아, 매출액이 준 것도 내 책임이야? 환장하는 거야, 이건. (첫째 사위에게) 그래, 계획된 일은 잘 돼가나요?
첫째 사위 (서자에게) 예, 조금씩. 서류를 빼내기가 여간 힘들어야 말이죠.
서자 (첫째 사위에게) 너무 서두르면 안돼요. 형님 장인이야 곧 세상 뜰 거고, 우리 집이야 그리 단숨에 될 일은 아니니까. 만만디로 가다가, 기회를 포착해야 돼요.
첫째 사위 (서자에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뒷일은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서자 (방백) 마흔 전에 회사를 수중에 넣어봐? 아버지한텐 미안하지만, 누가 첩살림 두랬나? 사랑에 팔팔 뛰는 씨를 심으니까, 저런 멀대 같은 형보다야 훨씬 똑똑한 이 몸이 나오신 것 아니것어? 후후. 이게 다 운명이고, 나한텐 천운이란 말씀이야, 후후.
재벌1 형님이나, 아우나 자식 사위들은 잘 보았소. 이거, 잔칫집 와서도 사업 얘기인 모양이오, 허허. 따님들도 어쩌면 그리 꽃 같으우.
사장 형님은 무슨 형님, 다 회장님께서 다 돌봐주시니, 이만큼 삽지요. 너희들도 이 은혜를 잊어선 안 된다.
재벌1 원, 천만에. 형님 없구서야, 어찌 제가 있겠소.
재벌2 암은요, 암은요. 제가 비록, 이렇게 뻔뻔시럽게 첩 자식까지 거느리고 살지만, 형님 안 만났더라면.
서자 아버지.
재벌2 그래, 그래. 미안허구나.
사장 괜찮아, 옛날 일인데 그게 뭐 큰 흉인가, 안 그런가?
서자 그래도 첩 아들인 게, 자랑은 아니잖아요.
재벌2 이눔, 그게 무신 말버릇이야. 허허 너그럽게 봐주십쇼, 형님. 저눔이 아랫사람만 상대해놔서. 이눔, 다리몽둥일 부러트릴 테다.
사장 허허. 됐어요, 됐어. 우리 상무를 잘 봐주는 모양이던데, 뭘. 아 자네들도 인사하지. 저희 공장 근로자들입니다. 어이, 비서. 자네는 이제 나가서 식사를 하지.
둘째 딸 (첫째 딸에게) 흥! 우리도 나가라구 하구 싶으실 거야.
비서 퇴장.
재벌1 아, 그래? 오, 이분이 그? 반갑습니다. 실은 저도, 형님 모시고 여러 해 동안 그 일을 했습니다. 자네들 참, 힘든 일 하는구만.
노동자1, 2, 3 뭘요.
재벌2 아냐, 그 일은 나도 해봐서 잘 알어. 온통 덮어쓰고 하는 데야 어디가 비었는지 속살까지 쇳물 튀어대는 거야 다반사고, 나중엔 살갗 자체에 감각이 없어지니까, 날 봐, 얼굴이 타서 딱딱하게 굳었던 게 아직 덜 풀리질 않았는가.
노동자1 그래도, 요즘은 작업 환경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재벌2 그래도, 애당초 궂은 데가 많은 일이지. 난, 자네들 보면 옛날 생각이 나서 좋아.
사장 회장님도 옛날 생각을 하시나?
재벌1 그럼요, 물론이지요. 옛날이란 어쨌든, 아무리 가난해도 그립고 아름다운 거 아니겠습니까?
노동자4 (노동자3에게) 노조 만든다며 계속 이런 데서 있을 거유? 으, 먹은 게 올라오네, 씨팔.
노동자3 (노동자4에게) 가만있어 봐, 임마. 우리가 은제 저렇게 높은 양반 만나 보겠냐.
노동자4 (노동자3에게) 그래도, 이거 몸이 근질거려서, 씨팔. 저런 거 꼴 보기 싫어서라도 빨리.
노동자3 (노동자4에게) 얌마, 노조가 무슨 깡패들 모여서 폭력 집단 만드는 건 줄 아냐?
재벌1 이보게들, 뭘 그리 귓속말로 소곤대나. 자네들 나를 보니까, 괴물 같은가? 허나, 그런 게 아냐, 절대로. 우리도 다 가난하던 사람들이야. 난 아직도 가난했던 시절의 음식을 즐겨 먹네. 어리굴젓 같은 거, 얼마나 좋은가. 가난한 시절 음식은 모두 우리 내장을 닮았지. 하하, 내가 좀 문자를 썼나? 자네들보다야 낫겠지만, 보시다시피 옷차림도 이만하면 수수한 편 아닌가.
사장 그래, 여기 계신 회장님들은 모두 검소하고 소박한 분들이지.
재벌2 우리만 그런가요, 어디. 아, 지금 회장들이 옛날에 됫박쌀 안 먹고 산 사람들이 있어요? 말이 재벌이지. 아, 우리도 옛날에, 전쟁통에는 이를 한 움큼씩 잡고 그랬어. 지금 그런 젊은이들이 있나, 어디?
사장 허허, 지금 애들이야 그런 세상을 아나요. 또 알 필요도 없고요.
재벌1 하하. 자네들도, 열심히 하면 다 성공하기 마련이네. 그리고 재벌이 뭐 그리 행복할 것도 없고. 그저 열심히 일할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야.
둘째 사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회장님, 요번 하청 건은…
재벌1 으응?
사장 나중에 말씀드리게.
재벌1 아냐, 괜찮아요. 그래, 요번 하청이…
노동자2 (노동자1에게) 아저씨, 이제 그만 나가죠.
노동자1 (노동자2에게) 가만있어 좀. 난들 가시 방석 아니겠나. 그래도 우리 사장님만 한 분이 없다구.
노동자2 (노동자1에게) 아, 누가 뭐래요?
파출부 음식이 식는데, 이제 좀 드시지요.
재벌2 아, 그래. 오, 아줌마. 늦게 온 주제에 우리 얘기만 했군. 듭시다.
파출부 (방백) 그래, 니들이 니들 돈 들이고 니들끼리 투덕거리다가 찬 음식 만들었으니, 꼴좋다. 많이들 처먹어라.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