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년 만인가. 장정일(소설가, 시인, 극작가 등등)을 만난 게 3개월 전이다. 그동안 교수 노릇을 했다고 해서 그런지, 10년 전에 비해 꽤나 멀쩡해 보이는 그가 반가워 술 한 잔을 샀다. 그때 그는 자신과 김경주(시인, 극작가, 여행가 등등)가 희곡 예술의 진작과 희곡 작품의 잡지 수록 관행을 만드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내게 희곡 한 편을 써 달라고 청했고, 난 새로 쓸 일은 없으나, 예전에 쓴 작품은 있으니 참고해보라 했다. 희곡 치고도, 단행본이라면 몰라도 앤솔로지 성격의 책에 수록하기에는 너무 많은 분량이라(그 긴 『햄릿』의 두 배쯤 된다), 그냥 잊고 말았는데, 연재를 하게 되니 좀 느닷없기도 하다. 이 작품은 약 20년 전, 남한민주화운동의 절정기,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을 겪을 당시에 노동자문화예술운동 단체 대표로서 각 장르 분과 회원들과 1주일에 한 번씩 만나 공부를 하며 쓴 것이다. 4막 16장으로 각 장을 따로 공연할 수도 있게 했고 몇 장은 노동 현장에서 공연된 적도 있다. 그렇게 간간이 단체 기관지를 통해 발표되었으나 독자가 5백 명 미만이고 부정기적인데다 그나마 중간에 끊겼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품 자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딱 한마디다. 이 작품은 내 정신이 가장 치열하게 젊은 날 전망의 파탄을 파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더 치열하게 통과함으로써 새로운 전망에 닿으려 노력한 기록이다. 원래 각 막마다 해설(코러스)역이 등장해,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을 예로 들며 근대성 문제를 제기하는 대목이 있었으나 셰익스피어 희곡 번역서 해설로 쓰였으므로 뺐고, 나머지는 20년 전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