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키호테』를 읽어주었다. 김 작가는 전보다 색이 더 바랜 듯한 푸른색 환자복을 입고 두 손을 배 위에 올린 채 얌전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읽는 소리를 듣고 있는지, 안 듣고 있는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잠깐 물을 마시는 사이 김 작가가 말했다.
“병원에서 나가면 진짜 제대로 된 걸 써야겠어. 이제 정말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럼 그래야지! 누가 말려, 꼭 써.” 나는 계속해서『돈 키호테』를 읽어주었다. “병원에서 나가면 너한테 잘해줄게. 맛있는 것도 해주고 니 말도 더 잘 들을게.” 이건 또 갑자기 웬 고백 모드일까. 도무지 걷잡을 수가 없다. 김 작가는 더 이상 토하지도 않았고 침을 흘리지도 않았다.
다음 날 아침부터 김 작가는 또다시 뭔가를 쓰고 있었다. 감지 않은 머리는 부스스한 채 그대로였고 수면양말도 그대로 신고 있었다. 푸른색 환자복 위에 병원에서 일괄 지급한 것으로 보이는 핑크색 울 스웨터를 입은 채 침대 위의 식판에 상체를 괴고 앉아 뭔가를 썼다. 순환의 시간이었다.
자기 자신에 관해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조울증의 시간,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지긋지긋한 떨림의 시간, 그리고 아무런 욕망도 갖지 못하게 만드는 무서운 침묵의 시간. 그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침묵의 시간이 제일 무서웠다. 그래도 뭔가를 쓸 때가 쓰지 않을 때보다 나았다. “나 서울 갔다 올게요. 보험회사에 가서 병원 서류를 내고 와야 해.” 김 작가는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환자들이 복도에 나와 다리를 한 짝씩 들었다가 내려놓고 팔을 쳐들어 돌렸다가 내렸다. 느리지만 나름의 활기가 있었다. 몸을 움직여보려는 활기, 더 이상 세포의 경화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활기, 망가지지 않으려는 활기, 너무나도 느려터진 병원 특유의 아침 활기가 있었다.
뉴저지에서 돌아와 쌓인 피로 때문인지 버스에서 내내 잤다. 얼마나 피곤한지 입에 과자를 넣고 우물거리면서도 잠이 왔다. 아침에 서두른 탓에 다시 가평으로 돌아갔을 때는 막 어두워진 즈음이었다. 김 작가는 그때까지도 쓰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침대 아래 떨어진 종이들이 펄럭거렸다.
“그만 써. 지겹지도 않아?” 김 작가가 어깨를 내리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늘 무슨 일 있었는 줄 알아? 유명한 여자 화가가 병원에 들어왔잖아. 정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사람이지.” “왜 또? 누구처럼 살기 힘들어서 알코올 중독이래?” 김 작가는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냐 아냐, 이번엔 치매야.”
다음 날 아침, 김 작가의 편지는 평소보다 한 통 늘었다. 여류화가에게 가는 편지봉투에는 비록 검은색 볼펜으로 그렸지만 예쁜 새도 한 마리 그려 넣었다. 김 작가는 바쁘게 병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거의 간호사들 수준으로 활발하게 돌아다녔다. 너무나 멀쩡해 보여서 다른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렇지만 늘 몇 시간 후에 일어날 일들조차도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불과 몇 시간 후, 환자들이 모두 마당으로 나와 체조를 하는 시간이었다. 느리고 단순한 음악이 흘러나와 병원 건물 전체를 감쌌다. 모두들 두꺼운 방한복에 모자를 쓰고 마스크까지 쓰고 나와 운동 코치를 따라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천천히 운동장을 돌았다. 김 작가의 말이 사실인지 어쩐지 온통 형광색으로 예사롭지 않게 차려입은 한 여자가 운동하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너무 졸렸다.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눈을 뜨면 다시 창밖을 내다보고 또 졸고. 아마 겨우 일 분 정도밖에는 흐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길어도 삼 분 정도였다. 갑자기 창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조차도 느리고 기운이 없었다. 운동의 효과가 있는 모양이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창밖을 내다봤다.
한 사람이 옷을 벗고 대열에서 벗어나 원의 안쪽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미친 사람들이니까 이해해야지, 다들 미친 사람들 아닌가. 너무 졸렸고 그러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다큐멘터리 사진집 속의 기아 소녀 같은 마른 몸으로 사람들의 꼬리를 따라다니며 힘없이 뛰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우리 엄마, 바로 김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