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은 종이컵 밑바닥에 엉켜 가라앉아 있었다. 커피 맛이 없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의사의 방에서 나와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병원에서 거주하는 건강한 노인들이 마당에 서서 건너편 호수 쪽을 쳐다보며 맨손체조를 했다. 벌써부터 모자에 파카 조끼에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햇살이 아직 따뜻하긴 했지만 추운 날씨였다. “지금은 상태가 괜찮아 보이지만 저러다 심각하게 나빠지기도 합니다. 당분간 불편하시더라도 좀 지켜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의사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주변을 돌아봤다. 곧 겨울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병실로 돌아갔을 때 김 작가는 침대의 머리 쪽을 높이 세운 채 등을 기대고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앞에 쓴 종이를 옆에 놓고 자기가 쓴 것들을 확인하기도 하고 종이를 높이 쳐들고 뒤집어보고 또 바로 놓고 읽기도 했다. 뇌종양에 걸린 사람이 쓰는 글은 어떨까, 나는 순간 김 작가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는 들어가 앉아 있을 야외용 튜브도 없고 여기는 뮤즈가 강림했던 뉴저지도 아니고, 라이팅 클럽을 빌미로 한 술 파티도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나는 언제 글을 썼던 사람인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글에 관한 모든 감각을 다 잊고 있었다.
『파울라』의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세번째 편지의 첫 문단은 읽을 때마다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우리 엄마의 인생은 절대 글로 써서는 안 되는 소설과도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50년이 지날 때까지는 엄마와 관련된 미스터리와 그 비밀들을 폭로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나를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후손들이 들어줬을 경우, 아마 그때에는 나도 물고기 밥이 되어 있을 거다.
엄마와 나는 늘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하면서도, 엄마에 대한 내 사랑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내가 잉태되던 날 시작되어 거의 반세기가량 유지되어오고 있단다. 게다가 엄마의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무조건적인 진실한 사랑이지. 아무리 열정적인 연인들이나 효자들도 그렇게는 사랑하지 못할 거다.
지금 엄마는 나와 함께 마드리드에 있단다. 일흔 살의 나이라 하얀 은발에 주름투성이지만, 모든 것을 무채색으로 퇴색시켜버린 요 몇 달 동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 엄마의 초록빛 두 눈은 옛날 열정 그대로를 간직한 채 반짝거린다.
지금 엄마는 나와 함께 마드리드에 있단다. 지금 김 작가는 나와 함께 병원에 있단다. 나도 낳지도 않은 내 딸을 향해 그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 엄마 김 작가는 나와 함께 병원에 있단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니? 너무 늙은 뒤에는 글을 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나도 어쩌면 회고가 가능한 중년의 어떤 시기에 내 딸에게 그런 편지를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김 작가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애정 비슷한 것을 내 딸에게 표현하는 것 말이다.
잠깐씩 우울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세탁소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가기 직전만 해도 김 작가는 명랑하고 쾌활했다. 여전히 계동 아줌마들과 신나게 살았다. 밥도 잘 먹고 수다도 떨면서. 나는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혹시 그 김영철이 찾아와 고등어 굽던 여자가 떠났다며 행패를 부린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찾아와 괴롭히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 실패한 걸까. 왜 머리에 종양이 생긴 걸까?
그날 밤에 많은 비가 내렸다. 후두둑거리며 떨어지는 빗소리가 무섭도록 크게 들렸다. 병실 기온이 낮은 탓인지 김 작가는 환자복 위에 방한용 코트를 걸쳐 입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빗소리가 커지면서 김 작가가 몸을 더 심하게 떨었다. 귀를 막고 얼굴을 찌푸리면서 발끝에 잔뜩 힘을 준 채 가끔씩 빗소리가 들려오는 창 쪽을 쳐다봤다. “귀가 너무 아파. 귀가 없었으면 좋겠어.”
김 작가가 귀를 뜯어내려는 듯 양 손에 힘을 주어 귀를 잡아당겼다. 우르르 쾅, 천둥소리가 들리고 김 작가가 갑자기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귓속에 벌레가 있다니까, 벌레 좀 끄집어내줘, 이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