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등지고 서 있는 삼층짜리 핑크색 건물 앞에서 차가 섰다. “여기가 그 병원이야.” 운전기사는 끝까지 반말이었다. 정신병원과 노인 요양을 겸하고 있다는 병원 입구까지 걸어가는 동안 왠지 기분이 오싹했다. 무서웠다. 저만치 철문이 보이고 움직임이 빨라지며 주변을 뱅그르르 돌고 있는 개 몇 마리가 보였다. 벨을 누르자 한참만에야 목소리가 들렸다. 신분 확인을 하는 동안 내내 개들이 짖어댔다. 미친 사람들이 사는 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기도 했고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간 후에는 출입구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기도 했다.
이층으로 올라갔을 때 김 작가는 다른 환자들과 같이 중앙 거실에 앉아 과자를 먹고 있었다. 고함을 질러대고 울고 까무러치고 전기 충격을 가하고 기절하고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김 작가는 처음엔 옆사람과 떠드느라 나를 보지 못하다가 나를 보자마자 “안녕!” 하고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리고 “먼저 가볼게요” 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내가 있는 복도 쪽으로 걸어왔다. 친절하게도 내 가방을 왼손에 받아들고 얼굴을 잠깐 보고는 내 어깨 위에 오른팔을 둘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복도를 지나 병실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 병실은 일인용이었다.
“영인아, 내 얘기 좀 들어볼래. 며칠 전에 밤에 말이야,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니? 어젯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창밖에서 불빛이 비춰드는 거야. 여기가 이층 맞잖아. 내가 창을 열고 내다봤는데 앞에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색 차들이 여러 대 와 서 있더라구. 깜짝 놀랐지. 의사들이, 노인네들이 죽어 나자빠진다고 해도 절대로 야근은 안 하는 의사들이 나와 도열한 채 현관에 서 있었어.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된다. 검고 긴 리무진 안에서 누가 나왔는 줄 아니, 여왕마마가 실려 온 거야.”
김 작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고 쉬쉬거렸다. “여왕마마가 비척거리며 정원 바닥에 깐 돌멩이 위로 넘어지려는 순간 경호원들이 부축을 해야 했다니까.” 나도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 쪽 창밖을 내다봤다. 김 작가 말처럼 그 병실에서는 병원 현관 입구 쪽이 환하게 내다보였다.
“여왕마마가 누군데? 도대체 누구 얘기 하는 거야?” “누구긴, 우리나라의 최고 여왕이지.” “그래서?” “그런데 여왕마마가 왜 여기까지 실려 왔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말해봐.” “이건 진짜 비밀이다. 너만 알고 있어야 해.” 김 작가는 잔뜩 뜸을 들였다. “아이 진짜, 김 작가님 그냥 말해보세요. 기운 빼지 말고.” “왕실에서 몰래몰래 술을 하도 마셔서 알코올 중독자가 된 지 오래래. 여왕마마가 슬프게 밤새 울어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이런 으슥한 곳에 치료를 하러 온 거 보면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신 게 틀림없어. 새벽녘이 되어서야 울음소리가 그치고 조용해졌단다. 의사들이 아래로 끌고 간 게 틀림없어. 지하에 전기충격실이 있거든.”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 뉴저지에서 돌아온 나를 맞이하는 김 작가의 환영사는 황당했다. 병원에 도착한 첫날밤인데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도 김 작가의 헛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불이야, 불” 하고 김 작가가 소리를 질러댔다. “뭐가 타는 소리가 들리는데, 넌 안 들려? 너 화장실에 물 틀어놓은 거 아냐? 계속해서 물소리가 들리잖아. 빨리 가서 물 좀 잠그고 와.” 김 작가는 밤새 병실 안을 돌아다니며 알 수 없는 말들을 해댔다.
다음 날 아침, 비교적 정신이 말짱해 보이는 김 작가는 계속해서 뭔가를 썼다. 김 작가는 어디를 가든 자기가 쓴 원고가 든 비닐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그럴 때는 도무지 아픈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집중력 있는 표정으로 검은 뿔테 안경까지 쓰고 뭔가를 계속 써댔다. 뭔가를 쓸 때의 얼굴은 완전히 글쓰기에 미쳐 있어서 내가 옆에 있는지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흰 종이는 힘차게 갈겨 쓴 글씨로 빼곡했고 작은 여백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 위에 색깔 있는 펜으로 수정을 하기도 하고 흰 종이 전체가 문자와 색깔과 자잘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층 병실에 있는 모든 환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 아침이면 주머니에 편지를 가득 넣고 방마다 돌아다니며 편지를 꺼내주는 게 일이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허공을 응시하며 가만히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입장인 경우가 많았다. “꼭 답장 보내주세요.” 김 작가는 진지하게 말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실을 순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