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처음 다섯 페이지
“영인아, 내 얘기 좀 들어볼래.” 김 작가가 나에게 한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파울라』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파울라, 엄마 얘기를 들어보겠니.” 그러나 파울라는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고 엄마는 딸이 깨어나길 바라며 끊임없이 얘기를 했다. 누워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김 작가였지만 언젠가 김 작가도 잠결에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술에 취해 들어왔을 때 발로 이불을 걷어차며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분명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뉴저지에서 네일 아티스트로 잘 커가고 있는 사람을 왜 오라고 부르고 난리야, 짜증나고 귀찮아 정말.” 나는 툴툴거렸다. 툴툴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 김 작가의 몸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손마디가 갈퀴처럼 여위고 살갗이 몹시 얇아 보여서 김 작가의 손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손을 잡게 되었다. 사람이 훌쭉해져서 얼굴과 몸에는 뼈만 보였다. 물기라고는 없는 마르고 건조한 죽은 나무 같았다. 그나마 윤기 있게 움직임이 살아 있는 곳은 눈동자뿐이었다.
복도에서 보이는 병실 창은 반쯤이 반투명의 줄무늬로 가려져 있어 안이 잘 보이지 않았고 김 작가가 누워 있는 방에는 실제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종이로 만들고 물감으로 손잡이를 그려 넣은, 입체감이라고는 없는 가짜 옷장, 종이를 붙여 만든 가짜 전화기, 검정종이로 만든 가짜 텔레비전 화면이 벽에 붙어 있었다. 오로지 철제 다리가 붙은 침대와 난방용 라디에이터 그리고 벽에 붙은 비상벨, 보조의자 한 개만 진짜였다. 운동 능력이 떨어지는 환자들이 가구에 부딪쳐 사고가 날까 봐 취한 조치라고 했다.
김 작가는 지금 약간 색깔이 흐리게 바랜 푸른색 환자복을 입고 손을 배 위에 올린 채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마른 입술 주변에 가는 주름이 자글자글 잡혀 있는 게 보였다. 가구들뿐만이 아니라 그 방 안에 있는 김 작가조차도 또 금방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나조차도, 흰 옷을 입고 왔다 갔다 하는 간호사들조차도 다들 가짜 같았다.
뉴욕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병원까지 오는 동안에도 나는 김 작가의 상태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 한번 보러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얼굴을 본 지 오래였으니까. 전화통화를 하긴 했지만 김 작가가 아프다는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늘 그랬듯이 황당한 얘기들만 했다. 비유로, 거짓말로 구질구질한 실존의 고통을 비켜 지나갔다. 그게 우리 모녀 사이의 오래된 스타일이었으니까.
영화를 몇 편이나 연속해서 보고 음악을 듣고 또 신문을 계속 보고 잡지를 보고 영화를 다시 봐도 여전히 비행기 안이었다. 김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이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입안이 마르고 눈은 따가운데 잠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비행기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깨어 있었다. 창 덧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잠깐 잠이 들었다가 퍼뜩 눈을 뜨는 순간 해캔섹의 라이팅 클럽 생각을 했다.
시월의 어느 일요일 밤에 정말 그 라이팅 클럽이 열리기나 한 걸까. 다들 술을 마시긴 했지만 나중에 지영 씨가 이메일로 보내준 라이팅 클럽 회원들의 사진은 뭔가 좀 이상했다. 사선으로 그어진 불빛은 보이는데 정작 사람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면 불빛 저 안쪽에 숨어 있는 장미자 씨의 휠체어 바퀴가 언뜻 보일 뿐, 차가 흔들린 탓인지 카메라가 흔들린 탓인지, 다들 귀신처럼 어둠 뒤에 숨어 있어 전체적인 윤곽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없어도 라이팅 클럽은 계속되겠지, 난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인천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한 시간 남짓 달린 후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렸고 거기서 다시 시외버스를 탔다. 가평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렸고 앞쪽에 작은 깃발을 매단 택시를 탔다. 김 작가가 있는 시설까지는 택시로도 이삼십 분은 더 가야 했다. 택시가 가평 시내를 벗어나 좁다란 도로로 달리기 시작하면서 앞 유리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빛 때문인지 피곤이 확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잠깐 졸았던 것 같다.
머리가 심하게 흔들리는 순간 눈을 떴고 택시는 돌길 위를 달리며 투덜거렸다. “손님이 가자니까 가는 거지, 진짜 우린 이런 데 가고 싶지 않지!” 어디다 대고 반말이냐고 오랜만에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대꾸할 힘도 없었다. 돌길 오른쪽은 저수지였고 왼쪽 산등성이 아래로는 야트막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어떤 집들은 짓다 만 중이었고 붉은 흙이 드러난 채 반쯤 부서진 집들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