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시집을 한 권 낸 시인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깜짝 놀라 레오폴드를 주시했다. 나는 그 시인이란 작자들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아는 터라 별로 놀라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한국엔 워낙 시인이 많잖아요!” 초를 치는 발언이었나, N이 내 얼굴을 쳐다보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즘엔 자기가 원하는 나라에 가서 사는 게 훨씬 쉬우니까요. 어르신 말씀대로 알코올도 문제고 사랑도 문제고 돈도 문제죠.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도무지 영감이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뮤즈가 날 버린 거라구요. 난 버려졌어요.” “오, 레오폴드, 당신이야말로 글쓰기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전형적인 사람이군요.” 장미자 씨가 나섰다.
“나는 정말이지 잘나가는 사람이었어요. 부모도 잘 만났고 공부도 많이 했죠. 결혼도 잘했고 대체로 다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사고가 났어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가 제일 많이 다쳤어요. 사고가 나고 한동안 죽는 생각만 했어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는 일을 시뮬레이션했죠.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일기며 가계부,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까지 내 모든 일상이 글로 채워졌죠. 저는 정말이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이상하게 생긴 엄마잖아요. 그런데 우리 애들은 내가 특별한 존재인 줄 알아요.
제가 쓴 편지를 가지고 다니고 친구들에게 읽어주고 그랬다고 할 때, 나는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특별한 사람으로 탈바꿈했죠. 아이들도 다리를 못 쓰는 엄마를 가진 실존을 견디려면 환상이 필요했겠죠. 하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났어요. 섹스는 해결해야 하니까. 나는 남편을 미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사실 성적으로도 그리 문제가 많지는 않았어요. 난 정말 그래요. 가장 뜨거운 말로 남편을 흥분에 이르게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아이들에 비해 상상력이 좀 부족했어요. 순진하지 않았던 거죠. 어쨌든 그게 내가 여기 있는 이유예요.”
“무슨 글을 쓰시죠?” 갑자기 레오폴드가 N에게 물었다. “저요? 전 아무것도 안 써요. 이 좁은 집에서 두 사람이 글을 쓸 수는 없죠. 보세요, 집이 좁잖아요. 저 언니 글 쓸 때 보면 옆에 있는 사람 잡아먹을 정도로 이상하게 보이더라구요.”
“난 뭘 쓰지 않으면 옆자리에 앉은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이게 될 것 같았어요. 어떤 날 보면 노트 한가득 욕만 써 있죠. 또 어떤 날 보면 모르는 단어들만 한가득 써요. 또 어떤 날은 그걸로도 모자라 전자사전을 씹어 먹어보려고 시도했어요. 지영 씨는 가냘파 보이는 외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배통이 커 보여 말술을 마셔도 끄떡없을 것 같은 레오폴드는 그렇다고 치고 지영 씨는 외모와 달리 벌써 노련한 술꾼이었다.
“글쎄요. 일주일에 한 번씩 한국에서 도착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비디오나 보는 게 내 일이지, 얼마 전까지는 차를 몰고 마음대로 다녔는데 재수 없게 사고를 내고는 자식들이 차도 가져가버렸어. 오늘은 며느리 차를 빌려 타고 왔지. 말년이 이게 뭐야! 좀더 다이나믹할 줄 알았는데. 내가 이 라이팅 클럽 전단지를 보고 얼마나 즐거웠는데.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뉴저지에도 뭔가 쓰려는 인간이 있구나! 교양 있는 젊은이들이 많구나, 정말 뿌듯했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