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자 씨가 지영 씨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서로 멀뚱하게 앉아 있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지영 씨는 몇 살이야?” 지영이는 눈을 위로 치켜뜨더니 “먹을 만큼 먹었어요”라고 말했고 분위기는 다시 냉각되었다. “그래서 여기 왜 왔는데?” 장미자 씨가 또 지영 씨에게 물었다. “그냥 왔어요.” 나는 레오폴드와 N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사이 장미자 씨와 할아버지가 뉴저지의 집값, 교회 소식, 변비에 좋은 음식들, 선호하는 개 종류 등의 그렇고 그런 얘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레오폴드와 N이 돌아왔을 때 우리는 다 경악했다. 소주와 맥주가 반반씩 들어 있는 커다란 박스가 하나 들어오고 뒤이어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긴 안주거리용 스시가 든 봉투가 들어왔다. “우리가 돈을 걷어서 드릴게요 회비로 처리해야죠.” 장미자 씨가 고맙다는 표현을 하자 레오폴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이구 아뇨, 그러지 마세요. 돈을 벌어도 쓸 데가 없어요. 술 떨어지면 또 나가기가 싫어서 많이 사왔습니다. 남으면 제가 가져갈게요.”
만약 이 세상에 술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되었을까. 술이 남기는커녕, 정말 술이 남을지는 어쨌든 두고 볼 일이었다. 장미자 씨는 우리들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앉아서 우리의 술판을 진두지휘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날쌔게 휠체어를 굴려 달려가 가져오고 누가 뭔가를 흘리면 금세 지적하고 전체적인 반응이 무척이나 빨랐다. 이미 현관 쪽에 쌓인 술병은 박스의 반을 비우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서, 어쩌면 다시 만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더 많은 얘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해캔섹의 라이팅 클럽이 그랬다.
술이 몸속으로 퍼지면서 긴장이 풀리고 나도 모르게 쿡쿡 웃음이 나왔다. 산초 판자가 악당들도 아니고 겨우 약하디약한 양떼들한테 덤벼드는 돈 키호테를 보고 “이런 환장할 일이 있나”라고 통탄하는 대목이 떠올라 배가 떨리며 웃었다. 그리고 강가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와 돈 키호테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갈비뼈뿐만 아니라 멀쩡하던 이빨도 부러졌다. 돈 키호테의 입을 벌리고 입 속을 들여다본 산초 판자가 하는 말. “나리 이빨이 어금니 두 개 반밖에 안 남았는데요.”
그리고 우리의 돈 키호테가 그 순간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명언을 남긴다. “어금니 없는 입은 절구돌 없는 방아지 뭐겠는가. 그래서 이빨 하나를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하게 치지 않는가 말일세.” 턱뼈가 아픈 돈 키호테가 턱을 달달 떨며 산초 판자에게 말했다. “이 친구야, 말에 올라 길을 인도하게. 나는 자네 가는 대로 따라갈 터이니.” 의리의 산초 판자는 불쌍한 돈 키호테를 재미있게 해주려고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라고 고백한다. 이빨 하나의 소중함을 아는 돈 키호테, 후줄근한 돈 키호테, 얼마나 멋진 인간인가.
“자 무슨 이야기라도 해보세요. 글쓰기에 관한 얘기가 아니어도 좋아요.” 내 혀가 꼬부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많이 꼬부라졌던 것 같다. 발음에 신경 쓰느라 지나치게 입에 힘을 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까부터 사실 계속 소주발을 세우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지영 씨였다. 나도 속으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미국에 왔는데 와서 얼마 안 가 엄마 아빠가 헤어졌어요. 언닌 공부를 잘해서 예일로 갔고 저는 한동안 엄마랑 살았어요. 지금은 혼자 살아요. 그리고 엊그제 엄마가 결혼했어요.”
“저기 말이야, 지영 씨. 내가 나이 든 사람이라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고 자네가 말이지, 진정으로 말이야, 늙어서도 글을 오래 쓰고 싶으면 말이지 알코올을 멀리 해야 하네. 헤밍웨이를 비롯한 유명한 작가들이 남긴 명작은, 대부분 말이야 그들의 뇌가 알코올에 찌들기 이전에 쓴 것들이야. 그러니까 젊을 때 쓴 거지. 그렇게 먹다가는 명작은커녕 시집도 못 간다!” 다혈질인 할아버지는 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