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드는 투덕투덕하게 생긴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다. “허드슨 강 옆에 있는 쇼핑센터 건축현장에서 일해요.” 그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쳐다보며 웃기만 했다. 우리가 이번엔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한 회원은 그로부터 약 십 분 뒤쯤에 도착했는데 머리를 잔뜩 부풀리고 거의 팬티처럼 작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십대 후반의 여자애였다. “이지영입니다.” 여자애가 머리를 숙여 인사했는데 그 여자애가 마지막 회원은 아니었다. 흰 천가방에 프린트한 종이를 잔뜩 넣어 가지고 들어온 푸른 줄무늬 셔츠의 할아버지 한 분이 마지막 회원이었다.
회원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본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달달 떨며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했다. 괜한 일을 벌인 것 같아서 마구 후회가 되었다. 나는 N을 살짝 불러 수납장 안에 있는 술병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냄새 나면 안 되잖아. 그냥 어떻게 좀 해봐.” N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나는 거울을 보고 앞머리를 두어 번 매만진 뒤 밖으로 나갔다.
내가 주뼛거리며 서 있는 사이 N이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여러분, 오늘 저희 해캔섹 라이팅 클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여기 서 있는 이 듬직한 이 여자 분이 여러분을 여기까지 오시게 한 사람입니다. 인사하시죠. 아 그리고 이 사람 엄마가 한국에서 꽤 유명한 작가 분이세요.” 나는 갑자기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를 부비고 또 손톱을 물어뜯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모두들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사이 우리의 할아버지 회원이 가방 안에서 자기가 지금껏 써온 것들을 꺼내 바닥에 확 풀어놓았다. 이런저런 크기의 노트들이 가방 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내가 1936년생입니다. 지금 칠십이 넘었죠.” 할아버지는 안경을 밀어 올려가며 일장연설을 시작했고 가장 어린 지영 씨는 벌써부터 휴대폰을 꺼내 틱틱 누르고 지루해 죽겠는 얼굴이 되었다.
“나는 어릴 때 전쟁을 겪었고 지금은 미국에 와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노트에 보면 내 또래의 남자들이 겪었던 모든 일들이 다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 세대는 말이죠, 여러분들과 달라요. 이 몸에 말이죠. 전쟁과 산업화 그리고 최근의 정보화 사회까지, 또 이렇게 할 일 없어진 노인네가 된 변화 과정, 그 격한 시간이 고스란히 다 들어 있어요.” “저기요 어르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다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일단 우리가 오늘 호스트인 저분의 얘기를 좀 들어보죠.” 나를 가리키며 할아버지를 진정시킨 건 장미자 씨였고 이제는 정말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네, 저는, 저기, 샐리네일샵에서 일하는, 오늘 너무 감사드려요. 저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아니, 중고등학교 시절에 글쓰기를 좋아했어요. 아무튼 많이 가르쳐주세요.” 아까부터 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레오폴드가 나섰다. “가르치긴요, 저희가 배우러 왔는데. 나는요 진짜 술 마시고 일하고 글 쓰는 일 말고는 하는 일이 없어요. 지금도 굉장히 어색하네요.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얘기를 시작하면 분위기가 훨씬 나아질 것도 같은데. 어떤가요? 제가 차가 있으니까 나가서 좀 사오겠습니다. 저기요, 저랑 같이 마트 가실래요?” 레오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N에게 말했고 N은 엉겁결에 얌전한 처녀처럼 레오폴드를 따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