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신 뒤 집 안 청소부터 시작했다. N은 부엌 청소를 도와주었고 자발적으로 화장실 청소도 했다. N이 무슨 이유로, 무슨 느낌이 있어서 자기는 아무 관심도 없는 라이팅 클럽을 위해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날 도와주었는가 하는 것은 미스터리였다. 좋게 말해 청소지, 일종의 가구 대이동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들어올 공간이 없어서 가구를 다 치워야 했다.
일단 거실 한가운데 늘어놓은 것들을 벽 쪽에 있는 가구들 앞으로 다 밀었다. 몇 명이 올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최소한 다섯 명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다섯 명도 안 오면 어쩌지? 한 명만 오면 어떡해?”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여자면 손톱이나 다듬어 보내고 남자면 주소가 잘못 됐다고 하고 그냥 보내지 뭐. 아, 일단 잘생겼는지 얼굴은 확인하고.” N은 간단하게 대답도 잘했다.
불안했다. 커피를 마셔도 우유를 마셔도 가슴이 계속 뛰었다. 라이팅 클럽이 시작되기도 전에 심장마비에 걸려 죽을 지경이었다. “노래 좀 불러봐.” N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며 놀렸다. N이 다시 고개를 돌렸고 내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노래야?” 내가 N에게 물었다. “나 노래 안 했는데.” 이젠 환청까지 들렸다. “들어가서 좀 씻어. 언니한테서 아저씨 냄새 나.”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환청이 들렸다.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하는 노래 후렴구가 중저음으로 계속해서 들려왔다.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베이글을 먹고 있을 때 L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라이팅 클럽이 몇 시에 시작하는지 물었다. 나는 “너까지 굳이 올 거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소한 다섯 명 정도는 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후에는 계속 불안했는데 그 이유는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야외용 튜브 속에 들어가 있으면 될 것을 그걸 창고 수납공간 쪽으로 치워두고는 좌불안석이었다. “미안해 난 이게 없으면.” N이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튜브 안에 들어가 앉자마자 파노라마처럼 김 작가가 계동의 글짓기 교실에서 했던 얘기들이 좌르륵 떠올랐다. 정말 대부분이 뻥이었지만 긴장을 푸는 데 주요했던 얘기들은 다시 돌아봐도 타이밍과 내용이 절묘했다. 그 엄마에 그 딸일까? 글짓기 교실을 2대째 운영하다니, 자랑스러운 감정 또한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자기 소개말부터 막혔다. 원래 소개할 것도 없는 데다가 거짓말도 잘 못하고 나는 원래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말을 잘한다기보다 몸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하시나요’, ‘왜 글을 쓰시죠’, ‘글을 쓸 때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따위의 질문을 중얼거리면서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뱅글뱅글 돌면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오죽하면 김 작가와 계동 글짓기 교실 회원들이 함께 만든 그 조악한 문집이라도 갖고 왔다면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벌써 누가 온 거야?” 우리는 현관 쪽을 돌아봤다. N의 엄마가 서울에서 보낸 소포 박스를 들고 온 항공운송 회사 페덱스의 직원이 밝고 보람찬 얼굴로 웃고 서 있었다.
도무지 사고를 치지 않는 날이라고는 없던 시골 영감 돈 키호테의 신하 산초 판자가 영양가 없는 방랑을 계속하고 있는 돈 키호테를 설득하는 대목은 어쩌면 그렇게 그 순간의 내 마음과 똑같았던 걸까. 산초 판자는 돈 키호테를 따라다니다가 객줏집에서 흠씬 두들겨 맞은 뒤라 심사가 매우 복잡했다. “소인이 이런 일을 당하면서 솔직히 얻은 결론은요, 우리가 찾아다니는 모험인가 행운인가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은 수많은 불행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고, 이러다 종국에는 우리 오른발이 어느 발인지도 모르게 될 것이구만요. 소인의 좁은 소견으로는요, 그냥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옳은 생각 같네요. 지금 보리와 밀 수확철이고 농사일이 바쁠 테니까 사람들 말처럼 이렇게 ‘천방지축’ ‘동분서주’ 헤매고 다니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요.”
돈 키호테는 물론 큰 소리를 치면서 신하를 나무랐지만 내 심정도 산초 판자의 마음과 같았다. 돈 키호테도 빨리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나도 이놈의 라이팅 클럽을 당장 그만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