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순결을 지키고, 과부들을 보호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나 고아들을 구제하는 일을 맡기 위해서지. 이런 기사의 한 사람이 여기 있는 바로 나라는 사람일세.” 나는 말을 끝내고 청중의 반응을 살폈으나 모두들 묵묵부답이었다. “웃기지, 웃기지 않아? 돈 키호테는 늘 여자들의 순결과 처녀들에게 관심이 많았어. 너무 웃기지 않아?” “뭐가 웃기고, 뭐가 재밌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 언니야, 그래서 돈 키호테가 처녀들의 순결을 어떻게 지켜주는데? 어떤 여자들이 돈 키호테한테 순결을 지켜달라는데?”
L은 말끝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고 N은 한쪽 팔에 얼굴을 기댄 채 졸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친 거지. 돈 키호테와 딱 한 번이라도 얘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렸어.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시절에 기사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며 처녀들의 순결 어쩌구 하는 이 사람이 미쳤다는 걸 한눈에 알아봤어. 미친 사람이 지껄이는 얘기니까 재밌잖아.” 아쉽게도 L과 N은 딴 곳만 쳐다보고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출입문 쪽, 비즈 장식 너머의 차도와 그 건너편 거리는 완전히 깜깜했다. 가끔씩 자동차만 노란색 불빛을 뿜으며 휙휙 지나갔다. 나의 북 그룹 멤버들은 그놈의 생계 때문에, 미국에서 어렵게 시작한 공부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했다. 그걸 이해 못 할 내가 아니었지만 왠지 기운이 빠졌다. 하기는 내 두 다리도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부어올라 손가락의 압력조차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 역시도 몹시 피곤했다. N은 그대로 자고 L과 나는 거울 앞에 가 서서 기지개를 켰다. 마스카라가 다 퍼져 눈꺼풀 아래쪽이 검게 물들어 있었고 얼굴은 짙게 그늘져 보였다. 거울에 보이는 나는 마치 기름을 뒤집어쓴 오염 지역의 물새 같은 몰골이어서 왠지 처량하고 또 우울했다.
그리고 어느 휴일의 일이었다. 나는 쇼핑센터에 가서 결국 그놈의 야외용 튜브를 사고야 말았다. 처음 본 건 야자수잎이 너무 크고 천해 보여서 싫었고, 어떤 건 바닥 두께가 너무 얇아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아갈 정도로 불안정해 보였다. 내가 산 건 흰색 토끼와 검은색 토끼가 번갈아 그려진 푸른색 튜브였다. 지름이 일 미터도 넘는 크기였고 높이만 해도 꽤 높아서 정원에서 물을 받아놓고 들어가 앉아 팔을 내놓고 있으면 꽤나 편안할 것도 같았다. 내가 굳이 실물을 보겠다고 해서 박스에서 꺼내 펴보긴 했지만 그걸 일일이 접어 박스에 다시 넣는 종업원의 얼굴을 보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두고 새것으로 받아 가지고 나오며 혼자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이런 걸 생일 선물로 주다니. 내가 무슨 십대 애들도 아니고 더구나 가정주부도 아니고.’
나는 세탁소 남자를 욕하고 있었다. 아니 욕하고 싶었다. 사람을 데려와놓고, 또 뉴저지까지 오게 해놓고 그 흔하디흔한 안부전화 한 번 안 하는 그런 인간은 설사 같이 살았다고 해도 심심하기 짝이 없을 게 뻔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자가 준 튜브를 가져오지 않고 미친 듯이 구겨버린 게 후회스러웠다. 어떤 디자인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이라도 난다면 저질 안목을 폄하하고 품질을 탓하고 저주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뭐든지 버릴 때는 단번에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게 그 순간의 교훈이었다. 손으로 접고 발로 구긴 채 집 안에 버리는 것조차도 싫어 큰길까지 나가 버스정류장에 있는 커다란 쓰레기통 속에 넣었을 때만 해도 손뼉을 칠 만큼 속이 다 시원했었다. 나는 솔직히 전체적으로 개구리 빛깔이 진하게 돌았던 그 야외용 튜브 따위가 내 마음 속에서 풍선 부풀 듯 다시 떠오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튜브에 바람이 빠질 때마다 수시로 채워 넣기 위해 전용 펌프까지 구입하고야 말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