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정겨워 보이던 계동 언저리도 중늙은이처럼 늙어버린 노쇠한 지역일 뿐이었다. 그때까지 멀쩡하게 보이던 도시는 야만성을 숨긴 또 다른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도시 밖으로 나갔다. 곳곳을 밟고 걸어 다녔다. 사람들이 떠나버린 서울 외곽의 텅 빈 슬럼 지대, 국도변의 짓다 만 러브호텔, 일하던 사람 수십 명이 암에 걸렸다는 경기도의 유명한 공단지대, 공항 근처, 공동묘지까지. 왜 그렇게 싸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나는 도시의 뭘 보고 싶었던 걸까. 내가 뭘 보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몸은 훨씬 가벼워졌다.
나는 그때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탐구하고 집중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감각적으로 알게 되었다. 공간을 제대로 설정하라, 그러면 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써지고 훨씬 더 힘 있게 진행된다!
바로 이게 내가 환자라는 증거였다. K의 자살이 내게는 한낱 글쓰기 노하우를 배우는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싸가지 없는 인간이었다. 항상 그랬다.
그때부터 도시를 배경으로 글을 썼다. 스쳐가되 만나지 못하고, 만나되 먼저 이별을 통보해버리고 마는 고독한 사람들의 일상을 쓰기 시작했다. 당연히 얘기는 늘 도시의 어느 특정한 공간에서 시작됐다. 패스트푸드점, 공항의 콩코스, 쇼핑센터, 서점, 미장원, 원룸 오피스텔의 현관, 기차가 지나가는 밀집 거주지역의 옥상, 노래방, 비디오방, 병원, 사무실까지. 공간이 정해지고 나면 나도 모르게 그 안에서 인물들이 불쑥 튀어나와 내 눈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전화를 걸고 밥을 먹고 혼자서 기둥 뒤에 숨어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공들은 늘 혼자여서 고독한데 막상 사람들과 부딪치는 걸 싫어하거나 두려워했다. 설사 누군가와 마주치더라도 절대로 돌아보지 않고 손에 든 비닐 쇼핑백을 꼭 쥔 채 키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저 사람 누굴까.” “혹시 같이 식사하실래요?” “여기, 사세요?” 집에 있는 동안 내내 복도에서 만난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프라이팬에다 달걀 오믈렛을 만들면서, 커피를 내리면서, 돌아가는 세탁기 속을 응시하면서 내내 헛것을 봤다. 그러다 나중엔 결국 물건과도 대화를 나눴다. 물건에 이름도 붙이고, 얘는, 쟤는 하는 식이었다.
다시 한 주가 시작될 때까지 그들은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나온다 하더라도 우연히 스칠 뿐 만나지 않았다. 나는 순간 알아버렸다. 현실에 밀착해, 현실에 지치고 아파해본 사람일수록 쉽게 환상을 본다는 것을. 환상은 현실과 결코 먼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K의 병은 환상이 현실을 압도해버린 데서 온 것인지도 몰랐다.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가 사람과 세계의 관계를 마치 “달팽이와 달팽이 껍질의 관계처럼 결속되어 있다”고 한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는 실존의 성격을 “세계-내-존재”라는 잘 알려진 말로 표현했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 외로워해도 결국 혼자가 아닌 셈이었다.
죽지 않는 인간 레이몽 훠스카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그는 피렌체를 향해 쳐들어오는 제노아인을 상대로 싸움을 한 전쟁 영웅으로, 훠스카 백작으로, 미아로, 감옥에 갇히고, 혁명가로 살았다. 그는 사랑도 했고 전쟁도 했고 아픔도 겪었다. 불사의 인간이 자신의 긴 인생을 고백하고 어딘가로 떠난다. 인생 고수인 그가 레진느에게 한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레진느가 묻는다.
“그럼 나는요?”
나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훠스카가 대답한다.
“조만간 종말이 옵니다.”
그리고 그는 “문 앞의 계단의 층계를 내려 성큼성큼 마을 밖으로 통하는 행길로 나갔다. 그는 저쪽 지평선 안에서 무엇인가가-얼음 모자 밑에 파묻힌 인간도, 생명도 없는 새하얀, 벌거벗은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매우 빠른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레진느가 본 레이몽 훠스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