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러는 사이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 회원들은 그 허접한 글들을 모아 버젓이 문집을 펴냈다. 도대체 김 작가의 실체는 뭘까. 그 허접한 책이 나온 날 종로구청 문화복지과인가, 여성복지과인가 하는 데서 공무원이 축하를 해주러 나왔다. 지역 발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며 김 작가와 회원들에게 아크릴로 만든 감사패도 전달해주었다.
김 작가는 공무원에게 인사말도 시키고 회원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서로 악수도 하게 했다. 또 동네 반장인지 통장인지 하는 사람들로부터 찬조금도 받았다. 장례식장도 아닌데 회원들은 모두들 검정색 원피스에 정장 투피스를 입고 나왔다. 옆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일렬로 서서 동창회 사진을 찍는 듯한 분위기도 연출했다. 어렵게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들은 모두 글쓰기의 본질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잿밥에만 관심 있는 인간들이었다.
글짓기 교실 벽면을 따라 위와 아래에 종이를 대고 나일론 끈으로 묶은 문집 덩어리가 모두 열 개쯤 되었다. 회원들이 가져가고 김 작가가 가져가고 매일매일 권수가 줄어들었다. 제목도 이상하기도 하지, <정열의 시간>이라니. 나는 아무도 없을 때 새 책을 꺼내 라면냄비 받침으로도 쓰고 기어가는 개미나 벌레를 때리는 도구로도 썼다. 또 어떨 때는 두 권 정도 가지고 나가 길거리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했다.
제목만 봐도 웃음이 나고 기가 막혔다. 요리 레시피나 잔뜩 적은 책 제목이 <정열의 시간>이라니, 과대포장도 이런 과대포장이 없었고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었다. 나는 정말 그 여자들을 경멸했다. 글쓰기를 무슨 인생의 레시피쯤으로나 아는 여자들이 정말 싫었다. 나는 그 문집을 볼 때마다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런 쓰레기들을 보았나!
6. 현실과 환상
그 무렵 K를 다시 만났다. 놀랍게도 그녀는 결혼한 상태였다. 짧아진 듯한 헤어스타일과 베이지색 블라우스는 흰 얼굴과 제법 잘 어울렸다. 처음에 난 K가 변했다는 걸, 아니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는 지저분한 나뭇가지로 새둥지처럼 장식을 한 인사동 입구의 한 전통찻집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칠십대 할아버지가 계속 노려보는 가운데서도 태연히 담배를 피웠고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커피 잔 속을 오래 내려다봤다. 만나자마자 핸드백 속에서 노트부터 꺼냈다. “나 요즘 정말 많이 썼어. 니가 한번 봐주면 좋겠어. 가능하면 빨리 봐줘. 시간 괜찮으면 지금 읽어, 여기서!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K를 만나는 순간부터 심장이 거칠게 뛰고 다시 또 모든 게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검은색 펜으로 쓴 글씨는 행갈이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너 결혼했다면서 안 바빠? 신랑은 뭣 하는 사람이냐? 어디서 만났어?” K는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두 다리를 계속해서 떨고 있었다.
“어디서 만나긴, 병원에서, 찜질팩 공급해주던 회사 직원이야. 지금도 찜질팩 팔아. 빨리 읽기나 해. 널 만나서 내가 쓴 걸 보여주고 얼마나 얘길 하고 싶었는지 넌 몰라.” K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목소리에만 잔뜩 힘을 준 채 떠들고 있었다. “알았어 읽어볼게. 그런데 너무 길잖아. 숨 쉴 시간, 차 한 모금 마실 시간은 줘야지. 문장도 좀 유치한 것 같고, 아무튼.”
생각해보면 그 순간 그렇게 말한 게 돌이키기 힘든 실수였다. K는 또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 위로 안약이 떨어지듯이 눈물을 똑똑 흘렸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들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야, 니가 무슨 작가야. 니가 뭔데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 사과를 하거나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았지만 나는 순간 최선을 다했다. “아니, 그건 내 인상이야. 그럼 우리가 그 정도도 솔직히 얘기하지 못하는 사이니? 그럼 이렇게 만날 필요도 없지. 매일 듣기 좋은 말만 할 거면 만날 필요도 없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