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추측이 맞지?”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김 작가에게 내가 쓴 글을 보여주었다. 김 작가에게 내가 끼적거린 것들을 보여준 건 생전 처음이었다. “되는 일이 없다더니 아예 미쳤구나. 이런 거 쓰느니 차라리 마시던 술이나 더 마셔라. 차라리 그게 낫지.”
김 작가가 발톱 사이에 두툼한 솜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너도 확실하게 왜 죽었는지 추측하지 못하잖아. 경찰도 못 밝혔고. 왜 아예 이걸 경찰한테 갖다 주지 그러니.” 두 다리를 의자 위에 올린 김 작가가 이번엔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기 시작했다. 김 작가의 얼굴 색깔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어디 한 번 다시 보자.” 김 작가가 갑자기 안경을 꺼내 쓰고 내가 쓴 걸 다시 읽기 시작했다.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넌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재미없게 쓰니? 넌 정말 재주가 없어. 내 딸이 맞기나 하니 너? 진짜 의심스럽다.” 나는 김 작가의 말에 몹시 화가 났다. J 작가도 어느 정도는 인정한 부분이 있는 글쓰기 실력인데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여자들 데리고 요리책이나 만드는 주제에 재주는 무슨 재주야!” 나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 작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뭘 쓰려고 하기 전에 그 잘난 척하는 태도부터 고쳐. 글 쓰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구. 도대체 뭘 믿고 넌 그렇게 시건방진 거니?”
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 나면 뱃살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부르르 떨리는 뱃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 그래서? 그래서 어쩔 건데? 내가 시건방져서 뭐 피해준 거 있어?” 갑자기 김 작가가 의자를 뒤로 빼며 벌떡 일어났다. “어쩌긴 뭘 어째 이 지지배야, 그 말도 안 되는 글이나 쓰레기통에 처넣어 지지배야.”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김 작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쓰레기들만 잔뜩 썼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지금까지 쓰레기들이나 잔뜩 써왔지. 내가 쓴 게 쓰레기가 아님 뭐겠어. 그렇게 말해버리자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입술이 저절로 열리며 웃음이 미어져 나왔다. 내가 좇던 것들이 다 우습고 시시했다. 만약 똑같은 충고를 J 작가가 했더라면 나는 아마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 작가였기 때문에 절대로, 절대로,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날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안채 할머니네 부엌에 앉아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김치 부침개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할머니는 늘 부엌 찬장에 소주병을 한 개 숨겨놓고 있다가 가끔씩 나를 불러 한 잔씩 나눠 마셨다. 우리가 술병을 든 채 다 먹을까, 남길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부엌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우리가 하는 짓을 말없이 쳐다봤다. 할아버지가 가고 난 뒤 할머니가 말했다. “귀신인 줄 알았네.” 할머니가 술을 많이, 그리고 오래 마실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아마 알코올중독자가 됐을 것이다. 김 작가에게 왕창 깨진 날, 그날은 할머니네 부엌에서 마시는 술만으로는 부족했다.
술을 마시는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비가 오니까, 사방이 너무 조용해서, 할머니네가 새 김치를 했으니까, 술이 있으니까, 우리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겨서 등등. 살다 보면 술을 마시지 않을 이유보다 마실 이유가 훨씬 많았다. 맥주를 몇 병 마시면 저 멀리서 이글거리는 바다의 수평선이 보였다. 소주를 한 병쯤 마시면 사막의 오로라가 보였다.
그리고 시간도 텅, 텅 소리를 내면서 구석기 시대 방식으로 굴러가는 것 같았다. 술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경이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기억의 끊김 현상 뒤에 나타나는 어렴풋한 일들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 초반부에 등장하는 토네이도와 함께 기절했다가 깨어난 주인공 소녀의 기억처럼 활기차고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막상 술에서 깨어나면 네 발로 기어다니고 김칫국물이나 마셔댔지만 술에 취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