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무서운 여자들과 빨래터에서 죽은 남자에 대해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자의 몸에서는 피 한 방울 나지 않았고 때려서 맞거나 부딪친 흔적도 없었다.
다만 죽은 남자의 입에서 꼬깃꼬깃한 종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입 안 한가득 들어찬 종이를 핀셋을 이용해 계속 꺼냈다는데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둔기로 맞아 머리가 터졌다거나 칼에 찔려 죽었다는 것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흰 종이를 입에 가득 물고 죽었다는 것 때문에라도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과연 그 종이는 뭘까. 나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글의 제목은 <계동 살인사건>이었다.
남자는 길거리에 가래침을 뱉은 뒤 연이어 두 번 기침을 했다. 평범한 사파리 차림에 특징이라고는 없는 외모였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옷깃을 여미고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습기가 많은 날씨는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춥게 느껴졌다. 남자는 발걸음을 조금씩 빨리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상체가 후들후들 떨렸다. 낮은 기와집들 위로 목을 빼고 서 있는 가로등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번쩍였다. 가로등불이 있음에도 거리가 평소보다 무척 어두웠다. 남자는 순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엉덩이를 흔들며 무심한 듯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던 비원 담벼락 위의 어둠이 너무 짙어 쳐다보고 싶지가 않았다. 집까지는 좀더 걸어야 했다.
남자는 조용필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갈래길이 시작되고 남자가 왼쪽 골목으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노래가 나와? 얼굴도 보이지 않는 검은 덩어리들 여러 개가 남자 앞을 가로막았다. 머리까지 뭔가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고 희뿌옇고 넓적한 얼굴 실루엣만 언뜻 보였다. 남자는 깜짝 놀라 벽으로 붙어 섰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느낌이 몹시 안 좋았다. 무엇보다 다리에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검은 덩어리들이 물었다. 남자는 순간 본능적으로 갈래길의 오른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게 남자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유명한 화가가 살았다는 오래된 한옥의 대문 앞에까지 한달음에 뛰어간 남자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대문 옆 바위 뒤에 숨었다. 검은 덩어리들이 식식거리며 올라와 사방으로 흩어져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어,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어디 있어, 이 개 같은 자식. 남자는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남자는 잔뜩 상체를 낮춰 살금살금 기어가듯 걷기 시작해 원서동 언덕 끝에까지 이르렀다. 사람들이 옛날에 장희빈이 살았던 집이라고 부르던 큰 집 앞에 선 남자는 오도 가도 못한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남자의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잡았어 이 쓰레기 자식! 이내 검은 덩어리들이 모두 달려와 남자를 에워쌌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남자는 손이 발이 되게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검은 덩어리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죽을 줄 모르고 그 지랄을 하고 다녔어. 니가 그렇게 말쑥하게 차려입고 회사 다니고 멋있는 척할 수 있었던 게 다 누구 덕인 줄 알아? 니 아내가 니 와이셔츠 빨아 입히고 밥해 먹인 덕이라구.
검은 덩어리들이 마구 웃기 시작했다. 지랄이라뇨, 갑자기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지. 닥쳐. 검은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소리쳤다. 여러 명이 달려들어 장갑을 낀 손으로 우악스럽게 남자의 상체를 잡았다. 그리고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옛날에 신선원전이 있다고 했던 터의 담장에 바로 맞닿아 있는 빨래터까지 끌고 갔다. 내려가! 빨리 저 안으로 내려가! 검은 덩어리들이 소리쳤다. 남자가 뛰어내렸다. 앉아! 검은 덩어리들이 소리쳤다. 흐르는 물은 없었지만 차가운 기운이 도는 돌로 만든 사각의 빨래터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고개를 들어 검은 덩어리들을 쳐다봤다. 우리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거기서 나오지 마! 검은 덩어리들이 말했다. 네에. 남자는 순순히 응했다. 담장 너머 궁궐에 살았을 왕의 이름을 고래고래 부르며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단 한 명의 왕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고양이들이 빨래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 보고 있었다. 검은 덩어리들이 몇 명인지, 검은 덩어리들 속에서 튀어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검은 덩어리들은 빨래터 안에 푹 꺼져 들어가 앉아 있는 남자와 끊임없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총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남자의 비명이 들리지도 않았고 때리고 맞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검은 덩어리들은 단지 말로만 행해지는 의식을 차례차례 집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양이들은 자기들만의 신호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빨래터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고양이들의 검은 눈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