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B는 늘어지게 잤고 나는 출근했다. 최소한 저녁밥 정도는 해놓아주길 기대했는데 저녁에는 어딘가로 나가고 없었다. 집에 와서 밥을 해먹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너무 길어 먹고 나면 금세 피곤해졌다. 계동 글짓기 교실에서라면 라면을 끓여 먹어도 책은 읽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쓰고 연애도 하는 그런 세상은 나한테 주어지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가 문 밑에 들이 밀어놓은 한 달치 세금고지서가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오래 참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B에 대해 관용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치고 올라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난 참을 수 없었다. 관용이란 단어는 왠지 음흉했다. 저 먼 나라에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딱 한 번 구호기금을 보낼 때만 사용해야 할 것처럼 아주 멀고 추상적이었다. 이건 생활의 문제였다.
“매일 잭 런던만 읽지 말고 이번 달 세금은 오빠가 내.” 나는 입술을 푸르르 떨며 화가 나서 말했다. B는 미동도 하지 않고 책상 위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빠가 좋아하는 혁명, 그거 밖에 나가서 좀 해봐. 집에만 있지 말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B는 무서운 기세로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인간이, 인간한테 이렇게 치사할 수가 있냐? 니가 벌면 얼마나 버는데?”
두 주먹을 맞부딪치며 나를 칠 듯이 달려들었다. 나는 힘이 달렸고 B는 나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한 손을 들어 주먹질을 할 태세였다. 하지만 오히려 먼저 주먹을 날린 건 나였다. 그리고 몇 차례 거친 주먹이 서로 오갔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B는 문이 부서져라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B가 신발 끝을 퍽퍽 차며 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시간이 지나도 B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형광등 아래 서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지진이 길 저쪽에서부터 다가와 몸 한가운데를 통과한 후 도시의 한 지점으로 사라진 것처럼 머리가 흔들리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가렵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그렇다고 슬픈 것도 아닌데 눈물이 조금씩 흘렀다.
거리로 나갔다. 입시학원을 지나고 시장 입구를 지나 B가 있을 만한 PC방, 만화방, 찻집을 다 뒤지고 다녔다. 굉장히 마음이 아팠지만 내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이건 아냐. 이건 내가 생각한 동거가 아니야.’
뒷모습이 다 비슷비슷한 남자들이 가득 모여 있는 오락실 문에 기대선 채 B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딱히 B의 고유한 모습이라고 할 만한 것이 기억나지 않았다. 몸에 힘이 풀린 채 한동안을 헤맸다. 무단횡단을 하고 어느 건물 앞 계단에 한참을 앉아 있기도 하고, 결국 열두시가 가까워오는 시간까지 B를 찾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B가 그적거린 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어니스트는 소설 속에서 늘 연설 중이거나 격론 중이었다.
“여러분은 오늘밤, 열두어 분 모두가,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불가능함을 주장하셨지만, 이제 나는 그 불가피함을 증명해드리지요. 여러분 같은 소자본가가 사라져가는 것만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대자본가들과 독점 재벌 등 역시 불가피하게 사라져가게 마련입니다. 잊지 마세요. 진화의 흐름은 결코 거꾸로 가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앞으로 흘러, 경쟁시대에서 연합시대로, 그리고 작은 연합체에서 대연합체로, 대연합체에서 거대한 연합체로 진행하게 되고, 결국은 모든 연합체 중에서 가장 거대한 연합체인 사회주의에게로 이행하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