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모임에서 회원들은 각자가 써온 글을 들고 앞으로 나가 읽기 시작했다. 어릴 때 읽은 책 때문에, 선생님의 영향으로, 알 수 없는 이끌림 때문에, 이력서에 경력으로 저서 한 권을 넣기 위해서. 수강생들이 글을 쓰게 된 동기와 이유는 다양했다.
그때 인상 깊은 발표를 했던 한 여자가 있었다. 검은 치마를 입고 검은 스웨터를 입은 광고회사 직원 L. 그녀는 늘 수업 중간의 쉬는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운 뒤 담배 냄새를 몰고 들어오곤 했었다. 내가 일주일 동안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답이 될 만한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헤맨 뒤 다시 글쓰기 워크숍에 갔을 때, 그녀는 산뜻하게 ‘복수심’이란 단어를 제시했다.
“나를 버린 애인에 대한 복수, 그 이전에 우리 엄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복수, 그리고 나를 버린 애인과 우리 엄마를 버린 아버지를 낳아놓은 이 세상에 대한 복수.” 그녀는 두 눈을 내리깔고 앞에서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치 선언문을 읽듯, 아주 큰 소리로 읽었다.
L은 그해 연말, 보란 듯이 작가로 데뷔를 해서 우리의 늙은 튜터가 일자리를 잃지 않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L은 그후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고 나도 L을 잊었다. 다만 L의 그 목소리와 뭔가에 생채기를 내고 싶어 하는 듯한 날카로운 얼굴은 기억에 남았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그 복수심이었다.
그러나 앞에 나가 L의 글을 읽게 한 튜터는 그녀의 에세이에 대해 칭찬하지 않았다. 그는 “과도한 열정도, 과도한 복수심도 글쓰기에 있어 바람직한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처음에 한두 번은 그런 감정을 바탕으로 글을 쓸 수 있지만 그런 감정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무슨 에너지를 가지고 글을 쓰겠냐고 물었다.
“직업으로 글을 쓴다고 가정해봅시다. 어디서 영감을 얻을 것인가. 먹고살 만해졌다면, 복수심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면, 첫사랑이 지나고 이미 다섯번째, 아니 스무번째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런 것들이 영감을 줄 수 있을까요?”
수강생들은 다들 멍해졌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갖는다는 건 너무나 먼 얘기이기도 했고 “작가라면 영감을 얻기 위해, 진실한 글을 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그럴듯한 당위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튜터는 덧붙였다. “생활과 글쓰기의 관계도 그래요. 18세기 영국에서 소설 독자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봐도, 그래도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계층은 글을 읽을 불빛이 있고 여가가 있었던 입주 하인 계급들이었어요. 하물며 글을 쓰려면 글을 쓰는 일과 더불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죠. 너무 가난해도 너무 부자여도 글을 쓰기 힘듭니다.”
어쨌든, 찬란한 복수심에 불타는 스무 살짜리 작가 지망생은 뭔가 쓰지는 못하고 여전히 세무서 매점에서 커피만 날랐다. 안 그래도 육덕 있는 몸에는 근육까지 붙어서 전체적으로 네모반듯했고 건강미가 넘쳐났다. 글을 쓰기는커녕 책도 읽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도 나는 돈을 벌어야 했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두부를 사서 잭 런던의 신도를 먹여살려야 했다. 불만은 나날이 쌓여갔고 소설도 일기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그사이 B의 독서량은 점차 늘어갔고 소설은 내가 아니라 B가 쓰기 시작했다.
밤에는 둘이 앉아서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밥상을 펴고, B는 책상 앞에 앉아 각자 뭔가를 읽었다. 그전 같으면 세무서 매니저 욕을 두 시간쯤은 하고, 잭 런던 얘기도 했지만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통닭을 먹으러 가지도 않았다. 더구나 우리는 서로의 몸에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가게에 간 사이 내가 그적거린 것들을 B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B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그의 노트를 훔쳐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