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 주 동안 나는 수많은 러브 스토리를 썼다. ‘적당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에 치아가 고르고 흰 남자였다. 나는 그가 잭 런던이라는 미국 작가에 관해 설명하는 동안 얘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만 쳐다봤다. 이건 운명이야.’
내가 쓰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고 소설과 일기를 구분하기 못한 채 그날그날의 감상을 적어갔다. 그때는 소설을 쓰는 게 일기 쓰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한마디로 그건 다 쓰레기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러브 스토리 속의 남자 주인공은 현실보다 훨씬 부풀려졌다. 여자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내 상상은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어서 연애를 시작하는 말들, 사랑을 완성하는 말들, 사랑을 끝내는 말들, 사랑 후에 닥칠 일들까지 다 떠올라 뒤죽박죽이 되었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뜨거운 연애가 한바탕 시작되고 벌써 비극적인 결말이 나고 있는 중이었다.
소설은 정말 유치했다. “남자애는 어깨를 동그랗게 말고 두 손을 허벅지 아래로 끼워 넣은 채 죄지은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나에게 사랑은 어울리지 않아.”
내가 쓴 러브 스토리는 초반부에는 환희에 넘치다가 중요한 사건도 없이 곧잘 비극으로 변질되곤 했다. 나는 그런 쓸 데도 없는 비극을 너무 좋아하는 게 탈이었다. 초반부만 해도 어느 정도 긴장이 유지되던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비극으로 변질됐다.
상상 속의 러브 스토리는 비극이었지만 우리의 실제 러브 스토리는 비극이 아니었다. B는 아현동의 다세대주택 지하에 살았다. 입시학원과 재래시장 근처에 있던 그 방은 창이 없어서 불을 끄면 완전히 깜깜했다. 아침이 와도 아침이 왔는지 알 수 없었고 거리의 소음도 잘 들리지 않았다. 바로 앞에는 소규모의 쓰레기 하치장이 있어서 냄새도 심했다. 화장실에 가려면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했고 봄인데도 화장실은 늘 추워서 엉덩이를 비비며 앉아 있어야 했다.
지방에서 태어나 그곳의 대학을 나온 B는 서울에서 직장을 찾아 정착하고 싶어 했다. 성격은 온순한 편이었고 나만큼이나 책을 좋아했다. 자세한 것들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서울에 지하 전세방이라도 얻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부모를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B가 부러웠다. B는 성공해서 부모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밤이 되면 B와 나는 끝도 없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잭 런던은 사생아로 태어났지. 웨일스 출신의 엄마가 점성술사인 지식인 남자와 관계해서 생긴 애가 잭 런던이었던 거야. 그런데 남자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어. 불행하게도 엄마는 아이를 낳고도 점성술에 미쳐 아이를 돌보지 않았대. 그리고 재혼했대. 재혼한 남자의 이름이 잭 런던. 길거리 건달이었던 새아버지의 이름을 딴 거지.”
작가의 가족 배경 같은 얘기들은 사실 흥미로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잭 런던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그의 소설도 전혀 몰랐고 B에게서 처음 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사생아로 태어나 신문 배달부터 얼음 배달, 공장 노동자로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으며 미국과 캐나다에서 방랑 생활을 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가 마흔한 살의 나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은 사람. 그 인생으로만 봐서는 소설도 재미있어야 하는데 왠지 그의 소설은 재미가 없었다.
알래스카 체험을 위주로 쓴 일명 북극 소설들, 문명에 길들여진 개가 다시 야성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정도가 재미있을까. 문학성은 뛰어난데 재미가 없는 대표적인 텍스트가 잭 런던의 경우였다. 텍스트의 예술성보다는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뛰어났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기에 꼭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바로《강철군화》가 그랬고 그 책이 B와 나를 연결해주는 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