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내 머리는 어딘가에 묶여 있었고 내 몸은 묶여 있는 머리를 중심축으로 하여 뱅글뱅글 돌았다. ‘나는 아무 죄가 없어요’라고 소리치는 순간 누군가 내 하체를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사탕에 매달린 막대처럼 안간힘을 다해 사탕에 붙어 있으려고 소리를 질러대는 꼴이었다.
소리를 크게 지를수록 잡아당기는 힘은 더욱 거세졌다. 아무리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봐도 나를 잡아당기는 힘의 정체는 보이지 않았다. 배가 꽈배기처럼 뒤틀리고 다리가 늘어나고 팔이 빠지고 목이 비틀렸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밀려오는 순간에도 나는 다짐했다. 이 꿈을 기록해야만 해! 기록해야만 해! 기록해서 뭔가를 얻어야 한다구!
영감을 얻기 위해 꿈조차도 가만 내버려두지 못했지만, 결국 아침에 일어나서 펼쳐본 머리맡의 꿈 기록장은 이제 막 연필을 잡기 시작한 두세 살배기 아이가 그린 것 같은 희미한 빗금들만 드문드문 쳐져 있었다. 근사한 단어 하나 제대로 건지지도 못하면서 그토록 통증이 심했다니. 잔인했지만 황홀했던 꿈은 다 날아가고 오히려 몸의 통증만 남았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도 없고 누가 그러라고 시키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
《강철군화》와 같이 나타난 남자애는 그날 지하철역 플랫폼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자애를 본 순간 옛날의 그 무모한 용기가 되살아났다.
나는 남자애를 향해 다가갔다. 뚜벅뚜벅, 겁도 없이, 멈추지 않고 다가갔다. 왜 그런 순간에는 단 몇 달 후의 미래조차도 가늠할 수가 없는지, 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듯 걸어갔다. 그리고 말했다. “저기, 뭘 좀 물어보고 싶은데요?”
그는 곧바로 얼굴을 들어 나를 쳐다보는 대신 내 신발부터 보고 하체, 그리고 상체와 얼굴을 차례로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뭐라고 하셨죠?” 나는 손을 내밀어 붉은 표지의 책을 가리켰다. 남자애는 그 순간에도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다른 곳을 봤다.
수많은 남자애들이 나한테 그랬듯이 “제발 좀 가줄래”라든가 “나한테 이러지 마”라고 말하며 엉덩이를 뒤로 빼는 따위의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게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돌아보면 시작이 너무 순조로웠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날 B가 책을 읽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 책은 너무 많은 걸 감춰주는 보호 장치의 역할도 한다. 사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 책을 읽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걸 좋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사 말실수를 하더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책을 읽고 있던 장면으로 모든 걸 덮어버렸다. 머릿속에 각인된 상대방의 첫번째 이미지 속으로 쏙 들어가 숨어버리고는 일종의 판단 정지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덮은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오해이거나 착각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책 때문에 우그러졌다. 그 결정적 증거가 B였다.
스무 살의 나. 면도칼을 씹고 가스관을 타고 수시로 가출하던 R도 아닌 주제에 과감하게 일을 쳤다. 동거라는, 알 수 없는 형태의 삶에 몸을 던졌다. 아마도 그 이유는 ‘동거’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음해보는 순간 벼랑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릴 것처럼 아득한 느낌이 차오르고, 한없이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왠지 폐쇄적이고 세상을 향해 문을 닫고 단 둘이 걸어가겠다는 듯한 느낌의 어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무것도 겁날 게 없었다. 뭐든지 빨리 경험하고 빨리 배우고 싶은 나에게 동거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 면에서 B는 너무나 완벽한 파트너였다. 하지만 B와 내가 명백하게 ‘우리는 이제부터 동거를 시작한다’라고 선언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B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쳐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사랑을 나눌 방이 있었고 나는 그사이 운 좋게 일자리도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