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작가의 멘트는 이런 식이었다. “제가 몇 년 전에 외국에 나가 공부할 때 그 지역의 평범한 여성들, 바로 여러분들처럼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꾸려가는 많은 여성들이 어떻게 모여서 글을 쓰고 토론하고 했는지 많은 스터디를 했거든요.” 그러면 계동 아줌마들은 모두 김 작가에게 주의를 집중하면서 “아, 그랬구나. 맞아 맞아” 하는 식의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한 김 작가는 외국에 나가 공부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선의의 거짓말은 직업상 필요한 것이라고 나조차도 용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자기 얘기를 써오기로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이 주의하셔야 할 점은 반드시 자기 얘기를 써와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교실을 운영해봤는데 처음엔 자기 얘기를 쓰다가 결국 여자들은 다 남편 얘기나 아이들 얘기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어요. 자, 절대 삼천포로 빠지시면 안 됩니다!”
김 작가의 말이 끝나면 그 팀원 중에서 그래도 글 쓰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아줌마 한 사람이 김 작가보다 더 열띤 톤으로 과제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는 식이었다.
“우리 김 작가님도 굉장히 바쁜 분이시고 하니까 우리가 이 모임에 좀더 성의를 가지도록 하죠.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면 저는 정말 제 인생에 이런 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저는 학교 다닐 때 시인이 되고 싶었거든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훌륭한 아내가 되고 싶었다. 모두들 한마디씩 하고 나면 또다시 화제가 일상적인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또 다들 남의 욕을 잔뜩 하고 수업이 마무리되었다. “힘들 땐 남의 욕 하는 게 최고야, 스트레스 푸는 데도 좋고. 그래서 말인데…….”
그런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번에 아줌마들이 뭘 써들고 오는지 김 작가의 노트를 훔쳐 읽어야겠다는 욕망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그 무렵, 취업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나는 더 이상 아무 데나 이력서를 보내고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일대일 면접 방식, 그리고 사람의 인상이나 보고 채용하는 작은 회사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처럼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젊은 애들이 취업하도록 도와주는 기관은 없을까 열심히 알아봤다. 역시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런 거 하나는 참 잘했다.
서울시에서 하는 취업알선센터인지 취업정보센터인지 하는 곳은 구로동에 있었다. 마른 먼지가 풀풀 날리는 구로동의 풍경은 말 그대로 회색 지대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나와 줄을 서 있고 저쪽에 일종의 긴 책상이 놓인 접수원 데스크가 있어서 지원자들의 서류를 받았다.
1930년대 미국의 경제 공황 시기에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던 풍경과 다를 게 없는 절박한 풍경이었다. 서늘한 실내 공기, 차가운 바닥,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롱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조금씩 줄이 좁혀지고 내 앞에 두 사람쯤 남아 있을 때 내 옆줄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봤다. 아까부터 줄곧 옆줄에 서 있었는데 사실 그 사람은 계속 책을 읽고 있었다. 줄이 좁혀지고 그 사람도 나도 접수원 앞에 앉게 되었다. 그가 읽던 책을 자기 왼편의 탁자 위에 놓았고 앞에 앉은 접수원과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접수원에게 서류를 내밀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돌려 그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책을 보았다. 책 표지는 요나의 고래 뱃속 같기도 하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 같기도 했다. 굉장히 거친 판화 그림에 표지 상단에 강렬한 붉은 색깔이 깔린 글자였다. 그 책 제목은 《강철군화》,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작가인 잭 런던이 1908년에 발표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