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두 마리 토끼
“씨발 머리꼴 하구는.” R이었다. 크고 분명하면서도 냉소적인 톤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애 났냐? 출산했어? 완전히 몸 푼 산모네. 이 동네엔 미장원도 없냐?” R은 나를 쳐다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왠지 R의 독설이 반갑고 시원했다. “따라와.”
우리는 종로까지 걸어 나가 관철동 입구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R은 뭔가 전과 굉장히 달라 보였다. 살도 찌고 긴 웨이브의 머리 스타일도 그렇고 얼굴 전체가 반짝거리고 훨씬 성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나 동거해.”
처음에 난 동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랑?” 하필이면 질문이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럼 남자랑 하지 여자랑 하냐, 내가 너냐?” R도 나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갠 뭐 하냐, 너랑 붙어 다니던 키 작은 애?” R은 빨대로 주스를 쪽쪽 빨아먹으며 물었다. “간호사, 아버지 병원에서.” “그래? 진짜 걔랑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걘 왜 그렇게 멍청해 보이냐.” 그 말에 나도 웃었다. “그래서 엄마랑 아버지도 아셔?”
R은 그 순간 정말 이상한 목소리로 웃었다. “하아!” 웃음도 비웃음도 아닌 그 ‘하아’ 소리 하나만으로 R이 어떤 지경에 처해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 걱정 말고 니 머리나 좀 어떻게 해봐봐. 같이 앉아 있기 쪽팔린다.”
그날 R과 나는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 갔다. R은 살림하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작은 커피잔, 나무로 만든 휴지걸이, 붉은색 테두리가 들어간 액자, 구운 생선을 담는 사각 접시, 포크 세트, 꽃무늬 쿠션 커버 등. 부잣집 출신이라 눈이 높은 걸까. R은 물건을 고르는 눈길이 남달랐다. 터프한 욕쟁이가 어수선한 지하상가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자 어쨌든 R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남들과 다르게 살 바에야 아파트 가스관 타고 가출이나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집에 초대할 거지?” 헤어질 무렵 내가 R에게 물었다. R은 대답은 하는 둥 마는 둥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세월이 너무 빨라 그럭저럭 오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무렵부터 김 작가의 글짓기 교실의 구성원들 성향이 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 작가가 그런 팀을 만든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째 이유는 생활비, 둘째 이유는 김영철에게 느낀 배신감을 같은 여성 동지들과의 연대를 확인함으로써 넘어서려는 안간힘.
주부 글짓기 교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한가해진 계동 주부들을 모아놓고 진행되는 글짓기 교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김 작가는 굳이 그걸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이라고 명명했지만 난 그냥 동네 아줌마들의 커피 수다방이라고 불렀다.
일주일에 세 번, 오전 열시 반이면 어김없이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정독도서관이 쉬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방에 앉아 아줌마들의 수다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커피 냄새가 진동하면 여자들이 지난밤에 남편과 싸웠던 얘기부터 시집 식구들 욕에 아이들 걱정에 아무 얘기나 마구 했다.
한 이삼십 분 정도 그런 시간이 지나고 잠깐 틈이 생기면 우리의 김 작가가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순발력으로 화제를 바꿨다. 그런 순간이면 나는 김 작가가 어느 날 J 작가보다도 더 유명한 작가로 비상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