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이었다. 떡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들어와 몇은 전화를 걸고 또 몇은 화장을 고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테이프 상자를 포장하던 여자가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면접 때도 노래를 곧잘 불렀던 나와 동갑인 여자애였다. 다른 사람 다 앉아 있는데 혼자 일어나서 테이프 상자 포장을 하며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다.
문제는 그 여자애가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노래를 너무 잘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한 곡만 부르고 끝난 게 아니었다. 부르고 또 불렀다.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노래에 취해 수화기를 귀에 끼운 채 노래를 들었다.
나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내다봤다. 청승도 그런 청승이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게 구질구질하게 느껴졌고 몹시 화가 났다. ‘내가 와 있는 곳이, 여기가 내 자릴까,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바로 그 유명한 노래 라디오 헤드의 <크립>의 가사였다. 그리고 나는 소리쳤다. “그만해, 그만해, 제발 그만해.”
그 말과 함께 나는 C회사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겨우 일주일 만이었다.
감기도 그렇게 독한 감기는 처음이었다. 방바닥에 닿는 몸의 모든 면이 아팠다. 열이 들끓어 오죽하면 김 작가조차도 빤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좁은 방 벽이 모두 다 내 얼굴 위로 쓰러져 내릴 것만 같아서 이불을 머리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눈만 감으면 그 이상한 강당에서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장면이 떠올랐다. 모두들 깔깔대고 박수를 치고 어느 순간 나를 향해 돌아서서 손가락질을 하며 계속해서 웃어댔다.
김 작가가 머리에 수건을 올려주고 미지근한 물을 마시게 해주었다. 까무룩 기절하듯 잠들었다 깨어나면 김 작가의 손이 내 이마 위에 있는 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글짓기 교실이 너무 조용했다. 차라리 김 작가가 김영철과 나란히 앉아 시시덕거리고 있는 꼴을 보는 게 나았다.
글짓기 교실만 계동 골목에서 두둥실 떠올라 혹한 속의 깊은 산 속 벼랑 위에 달랑 올려진 것 같은 그 고요함이 너무 싫었다. 밤에 잠이 깨면 책을 읽어볼까 뒤적거렸지만 우리의 시몬느 베이유도, 나처럼 “심한 두통. 공장문을 나설 때는 완전히 기진맥진, 아니 쓰러질 지경”이었다. 읽기 싫었다. 내 몸이 건강해야만 다른 사람의 고통도 들여다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덥고 있는 이불이 좀 무겁다고 느껴진 어느 한낮, 골목이 시끄러웠다. 김 작가는 보이지 않았다. 눈을 뜨고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 몸을 조금 움직여 글짓기 교실로 통하는 방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창문 뒤에서 공차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꼬맹이들의 몸놀림이 글짓기 교실의 썬팅된 창문 뒤로 재빠르게 왔다 갔다 했다. 봄이 온 것 같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무 배가 고파 글짓기 교실 책상이라도 뜯어 먹을 지경이었다. 겨드랑이와 허벅지 부근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때 할머니네 집 쪽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나는 벌떡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고 한달음에 할머니네 집으로 건너갔다. 두 노인이 밥상 앞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누굴 봐도 정면으로 눈을 안 맞추는 사람이었다. “어여 와라.” 할머니가 마루로 나가 보온밥통에서 밥을 퍼왔다. “어여 먹어.” 할머니가 내 손에 수저를 들려주었다. 반찬이라고는 마른 멸치에 고추장, 그리고 김치, 양념을 거의 안 한 노란색 콩비지찌개가 다였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밥을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콩비지찌개 안에 든 오래된 김치가 혀에 닿을 때 나는 느꼈다. 이제 나을 것 같다는 느낌. 그때 할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나에게 한마디 했다. “영인아, 너 막걸리 한잔 마셔볼래? 우리 집에 진짜 맛있는 막걸리 있다. 너 기운 차리고 일어난 기념으루다가.”
그때 비로소 할아버지가 눈을 위로 뜨고 할머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독백처럼 말했다. “막걸리 먹고 취하면 제 부모도 못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