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걸 들고 어디 가서 파는 거야? 설마 길거리에서?” 속사포처럼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그 코맹맹이 소리를 하던 여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여자는 드디어 우리가 할 일을 알려주었다. 무조건 팔아야 한다.
친구는 기본이고 삼촌, 고모, 옆집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뒷집 사는 사람까지 모두 찾아간다. 매일 하루에 한 개씩, 그러면 월급은 더 오른다. 팔면 팔수록 누진된다. 못 팔면? 월급은 없다. 그때 뒤에 앉았던 누군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런데 난 영어를 못하는데 어떡하죠?” 대답은 간단했다.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요.”
그 사무실에 일주일 정도 출근했던 것 같다. 유니폼을 입고 커다란 책상 위에 모여 앉아 상자부터 포장했다. 포장이 끝나면 사람들은 명단이 든 수첩을 펼쳐놓고 전화기를 앞으로 끌어온 뒤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가 다 똑같았다. 처음 몇 분 동안은 안부를 묻고 나중엔 본론을 꺼내는 식이었다.
그렇게 전화 몇 통 걸다 보면 오전 시간이 다 갔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근처 분식집으로 몰려가 떡라면을 먹고 들어와 있다 보면 오전에 나간 선배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들어와 칠판에 있는 자기 이름 아래 별딱지를 추가했다.
놀라운 건 우리 신입들은 하루 종일 친구나 아는 사람들에게만 전화를 걸었지만 선배, 그녀들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화를 건다는 사실이었다. “저기 언니, 언니가 오늘 금메달 딴 분은 누구예요?”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짧았다. “모 그룹 비서실장.” 사실일까. 정말 믿기 어려웠다. 난 그 사무실에 백 년을 앉아 있는다고 해도 단 한 개도 팔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믿거나 말거나, 사실은 나도 딱 한 개를 팔기는 팔았다.
선배 중에 한 사람이 매일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부르더니 전화번호 한 개를 건네주었다. 매일 별 한 개씩을 다는 아주 능력 있는 선배였다. 밝은 피부에 목소리도 좋고 짧은 커트머리에 유니폼도 잘 어울려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너무 바빠서, 이 사람이 옛날에 살 것처럼 그러다가 안 샀어. 한번 만나봐.”
대낮 커피숍에 중년의 남녀들이 왜 그렇게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지 나는 그때 처음 이유를 알았다. 그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 거의 대부분, 보험이든 물건이든 앞에 앉은 사람에게 뭔가를 팔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생존의 현장이었던 셈이었다. 글짓기 교실에 앉아 꼬맹이들 글짓기나 가르치고 살아온 김 작가나 나 같은 사람과는 앉아 있는 자세와 사용하는 단어도 달랐다.
나는 태어나 생전 처음으로 고객이라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커피숍에 앉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루를 묘사해보는 쓸데없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때 내 고객이 나타났다.
“왜 만나자고 했는지 얘기해봐.” 아예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그냥, 저, 아니”를 차례로 발음했지만 말이 안 나왔다. 나는 그냥 들고 간 테이프 상자를 고객의 허벅지 옆자리로 옮겨버렸다. “아, 얘기를 하시라구요 이 아가씨야.” 그러더니 고객이 껄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상체를 일으켜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마디 했다. “계약서 꺼내! 나 바빠.”
그렇게 싱겁게 한 세트를 팔다니. 난 너무 깜짝 놀라서 고객이 계약서를 쓰는 내내 식은땀을 흘렸다. 고객은 너무나 젠틀했다. 지금까지 만난 중년의 남자 중에 가장 멋있었고 가장 훌륭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여러 차례 인사했고 고객은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가버렸다.
막상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내가 딴 별을 축하해줄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 구석에 앉아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신입들 몇 명이 일어나 가볍게 박수를 쳐주기는 했다. 그게 나의 첫번째 세일즈 실적이었고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그 사무실을 그만두게 된 게 실적 때문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