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양복을 입은 나이 든 남자 두 명과 똑같은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들 여러 명이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걸어 들어왔다. 한 남자가 단상에 서서 알파벳 C로 시작되던 그 회사의 이름, 회사의 역사를 장황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현대는 커뮤니케이션 사회, 정보화 사회입니다”로 시작된 연설은 지루하게 지속됐다.
연설이 시작된 지 삼십 분이 지나도 도무지 뭘 하는 회사인지 파악이 안 됐다. 남자가 연단에 있는 물을 마시느라 잠깐 연설이 멈춘 사이 성질 급한 지원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해버렸다. “저기 선생님, 그래서 저희가 할 일은 뭐죠?”
남자는 물컵을 내려놓으며 한 손을 들어 흔들며 말했다. “이제 곧 아시게 되니까 잠깐만, 잠깐만.” 연설의 주된 내용은 ‘포부를 크게 갖는 사람이 성공하게 된다’는 아주 상식적인 내용이었지만 어떤 지원자들은 그 대목에서 머리를 끄덕이며 호응하는 눈길을 보냈다.
남자는 연설이 끝난 뒤 지원자들이 앉아 있는 청중석 맨 앞의 빈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 유니폼을 입은 한 여자가 나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부터 번호와 이름을 부르면 앞으로 나오셔셔 자기소개를 하시면 됩니다. 이미 서류 심사는 끝나고 지금 바로 이 절차가 면접 과정입니다. 자기소개라고 해서 딱딱하게 말로만 하실 필요는 없구요. 뭐든 환영합니다. 노래, 춤, 기타 등등. 자, 그럼 접수번호 1번, 멋지게 자기소개 해주세요.”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고 싶었다. 나름대로 좋은 옷을 차려입고 온 여자들이 차례대로 앞으로 나갔다. 대체로 수줍게, 뭔가 얘기는 하는데 조금은 덜덜 떨면서, 이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얘기는 끝났다. 지원자들이 얘기를 하는 사이 앞에 앉은 남자 두 명과 유니폼을 입은 여자 두 명이 서류에 뭔가 표시를 하는 것 같았다.
어떤 지원자는 앞으로 나오자마자 격렬한 엉덩이춤을 추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앞에 앉은 남자들을 끌어내고, 무슨 칠순 잔칫집 분위기도 아니고 다들 깔깔거리고 도무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막 엉덩이를 들어 앞에 놓은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 순간 벽 쪽에 서 있던 유니폼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앉으세요.” 굉장히 강압적인 느낌으로 여자가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내 차례가 왔고 나는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입도 열지 못하고 서 있었는데 앞에 있는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이지 난 약 일 분간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다가 그냥 자리로 들어왔다.
결과는 합격. 아무것도 안 해도 합격을 시켜주는 회사도 있다니, 첫 출근 날 나는 김영철을 기다릴 때 입었던 블라우스를 꺼내 입고 김 작가가 내 나이 때 입었다는 코듀로이 재킷을 입었다. 김 작가는 가까운 곳에 회사가 있어 얼마나 좋으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강당은 삼층, 사무실은 이층이었는데 사무실엔 커다란 칠판과 커다란 책상, 그리고 수많은 의자와 여러 대의 전화기가 다였다. 며칠 전 면접 볼 때 와 있던 수많은 지원자들이 거의 다 와 앉아 있었다. 전원 합격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선배라고 해야 하나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이 칠판 밑 책상에 모여 앉아 붉은색 플라스틱에 든 박스 다섯 개를 하나로 포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뭐 하는 데예요?”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나한테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공장인가?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여자가 구시렁거렸다.
그때 박스 하나씩을 손에 든 여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구호를 외쳤다. “오늘도 성공, 반드시 성공.” 군대 구호도 아니고, 여자들은 칠판 위에 적힌 자기 이름 아래 붙은 별딱지에 뽀뽀를 보내며 당당한 걸음걸이로 일렬로 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몇몇 지원자들이 앞으로 나가 사무실 앞 창가 쪽에 세워놓은 그 박스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수십 개의 영어회화 테이프와 알록달록한 표지의 회화 교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