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팔 간호사복 아래 드러난 포동포동한 팔뚝, 가느다란 발목 위에 붙은 오동통한 종아리, 그리고 약간 벌어질 듯 팽창해 있는 가슴 부위의 단추들. K는 만화 속에서 쏙 빠져나온 캐릭터처럼 생기발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K는 늘 충분한 영양을 섭취했고 그 이상한 머릿속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는, 물질적 토대 자체가 나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저기 박사님, 제 친구 소개해드릴게요. 글을 잘 써요. 작가가 꿈이래요.” K는 내 손을 잡고 진료실 앞으로 날 데려가 아버지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래, 뭘 하든 열심히 해야 한다. 혹시 부모님 넘어지시면 병원에 모시고 와라.”
흰 가운을 입고 가운 주머니에 필기도구를 불룩하게 꽂아놓은 K의 아버지는 정말이지 내가 상상했던 의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인사를 끝내고 막 나오려고 할 때 K의 아버지는 K를 불러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 “탱큐 대디.” 그때서야 겨우 아버지라고 한마디 하는 K의 태도는 발칙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너 왜 아버지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니?” 병원에서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릴 때 K에게 물었다. “아버지라고 부를 가치도 없어. 그 간호사하고 진료실에서 난리치는 꼴을 너도 한 번 봐야 하는데. 세상에 그런 볼거리가 없어. 아주 좋아 죽는단다. 그 인간은 세상이 다 자기 건 줄 알아. 그리고 너도 엄마라고 안 부르잖아? 뭐가 이상해?”
K는 전보다 더 거칠어진 것 같았다. 직장을 찾고 있는 내가 얼마나 초조할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저 입만 열면 자기 얘기였다. 돈을 버는 사람이 밥을 사야 한다며 굳이 아저씨들이나 가는 고깃집으로 날 데려갔다. 삼겹살을 얼마나 먹었을까. 왠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담배 냄새며 술 냄새, 썩은 꽃 냄새 같은 것이 계속해서 콧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왠지 그 순간 K와 더 같은 자리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고 내 몸이 먼저 그걸 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단호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K에게 말했다. “내일 면접이 있어.”
그 면접 풍경이란 참으로 끔찍했다.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앞 빌딩에 있는 어느 사무실이었다. 빌딩 일층의 복사 가게에 사람들이 열심히 드나드는 걸로 봐서는 꽤나 괜찮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빌딩이라는 인상이 들어 안심했다. 사층의 그 사무실 앞에는 무슨 ‘개발’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한 아저씨가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의 무릎 위에 올린 채 발바닥을 만지고 있었다. 희고 큰 발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일단 건물 전망은 괜찮았다. 멀리 대방동 쪽 천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앉아.” 아저씨가 나한테 말했다. 나는 소파에 앉았고 아저씨는 책상으로 돌아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박 사장 언제 와? 빨리 와. 면접 보러 사람이 와 있어.”
잠시 후에 박 사장이란 사람이 왔다. 그 사람도 소파에 앉더니 신발을 벗고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올렸다. “그래 취직하려구?” 박 사장이란 사람이 나한테 물었다. 뭔가 얘기가 시작되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처음에 만났던 아저씨가 문 앞까지 달려 나가 손님을 맞았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연락도 없어. 저기 미스, 미안한데 저 뒤로 돌아가면 커피 있어. 커피 세 잔만 타와.”
출입문 쪽에 파티션을 세워놓은 그곳엔 ‘탕비실’이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철제 수납장 안은 완전 불개미들의 놀이터였다. 흘러넘친 커피, 프림, 갈색 설탕 입자들 사이로 개미들이 기어다녔고 씻지 않아 말라붙은 컵이 산더미, 고무처럼 딱딱해진 행주가 흉물스럽게 놓여 있었다. 나는 발밑에 놓인 붉은색 그릇에 커피잔을 담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누군가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역겨운 담배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컵을 씻어 들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