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너의 라이프 스토리를 말해봐
“장래 희망이 뭐야?” 누군가 나에게 물었을 때 조금은 나른한 표정으로 “글을 쓰고 싶어요”라고 얘기하는 장면을 너무 여러 번 상상했었다. 그러나 그런 근사한 삶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졸업 후 몇 달간 나는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거리 전단지, 신문, 심야뉴스, 하다못해 길거리 전봇대에 붙은 종이 광고까지 일자리 정보가 나오면 닥치는 대로 베꼈다. 글짓기 교실에서 나가 독립하는 것이 지상 유일의 선명한 목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거리낄 것도, 주저할 것도 없었다.
백화점 판매 사원부터 스포츠센터 캐셔, 서점 직원까지 난 정말 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고졸 학력이 전부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나같이 이유도 설명해주지도 않았고 어쩌다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해도 정말이지 지극히 사무적이고 쓰나마나 한 내용이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건 포스트잇을 만들어 파는 어느 외국회사에서 보내온 편지였다. 이력서와 졸업증명서 따위의 기본적인 서류들을 보낸 뒤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반듯한 편지 봉투 하나가 대문 안에 떨어져 있었다. 내 이름이 손으로 쓰인 게 아니라 타이핑되어 있는 것도 신기했고 외국회사라 그런지 봉투에 인쇄된 로고며 모든 게 다 신선했다.
떨리는 심정으로 봉투를 열어 인쇄된 글자들을 읽었다. 결과는 ‘우리는 너한테 관심 없다’.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거였다. 그런데 그 표현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다음 기회에 함께 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니. 거절도 거절도 그런 거절이 없었다.
반복해서 자꾸 읽으면 ‘우리는 너와 일하고 싶은데 문제는 너한테 있으니까 다음번엔 좀더 자격을 갖추고 응모해’라고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류를 받고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연락도 안 해주는 회사들에 비하면 정말이지 괜찮은 회사였다.
나는 실패의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설마 이력서 위쪽 끄트머리에 붙은 손가락 두 마디 크기 만 한 사진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은 채 내가 쓰는 이력서의 자기소개서만 뜯어고치고 또 뜯어고쳤다. 내 오른쪽 중지에 박인 굳은살이 그때 생긴 거라는 건 너무나 분명하다. 잉크를 넣은 만년필을 들고 쓰고 또 쓰고.
하루는 K가 일하는 병원에 놀러갔다. 그날 나는 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고야 말았다. 오후 여섯시 무렵이었는데 병원은 환자들로 넘쳐났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K를 낳은 장본인인가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진료실 안쪽, K의 아버지가 있는 곳은 문만 열렸다 닫혔다, 간호사의 흰 가운만 왔다 갔다 했다. K는 물리치료실 입구에 있는 책상 뒤에 앉아 코를 박고 책을 보고 있었다. 책상 서랍 안에서 과자를 한 개씩 꺼내 먹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물리치료실로 걸어 들어가는 환자에게 K가 해주는 거라고는 흰 커튼이 가려진 치료 침대를 배정해주는 것뿐이었다. 친절하지도 않고 동정이 섞인 것도 아닌 버릇없는 목소리로 “두번째요, 아니 세번째라니깐요” 하고 냅다 소리를 지르는 게 다였다. “아이고 아파라.” 침대에 누운 사람들이 끙끙거리며 죽는 소리를 해도 K는 침대에 붙어 있는 기계의 온오프 버튼만 누르고는 커튼을 젖히고 나와버렸다.
“앞에 접수대에 앉은 얼굴에 점 난 여자 봤어?” 오랜만에 만난 K가 나한테 한 첫번째 말이었다. “아니. 못 봤어.” “이리 와봐.” K는 굳이 내 팔짱을 끼고 접수대가 보이는 문가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잘 봐봐. 저기 엉덩이 크고 눈썹 위에 점 있는 여자 보여?” “응 보여.”
우린 다시 물리치료실로 들어왔고 K가 내 귀에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가 우리 아빠 그거잖아.” 그리고 K는 다시 입속에 스낵 하나를 털어 넣었다. 과자를 얼마나 먹었는지 K의 몸 주변에서는 짭짜름한 스낵 냄새가 진동했다. “아빠, 그거라니?” 내가 물었다. “애인.” K가 속삭였다. “일은 재밌니?” 내 질문에 K는 금세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봐라! 니 눈으로 봐! 재미? 재미라구 했니? 세상에 이런 감옥이 또 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