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집에 들어가면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김 작가도 나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무슨 고시생들처럼 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그 허접한 김 작가 친구들도 내 친구들도 다들 단체로 여행이라도 떠난 것처럼 아무도 글짓기 교실에 오지 않았다. 가끔 안채에 사는 할머니가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아무와도 얘기를 안 하고 그냥 지나가는 날도 있었다.
“그 귀여운 애는 왜 안 오니?” 오죽하면 김 작가 입에서 K의 안부를 묻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김 작가의 말을 듣자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내린 K의 얼굴이 떠오르고 잠깐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K가 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끝이 쭈뼛거리며 온몸이 죄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김영철은 왜 안 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만 순간, 분위기는 저 혼자 달아올랐다. 김 작가가 나한테 읽고 있던 책, 두루마리 휴지, 머리빗, 볼펜, 감자칩 봉지 등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나도 뭔가를 던지고 싶었지만 던질 것도 없었고 그래도 엄마한테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한 나 자신이 몹시 비참했다. 말 한마디로 내 모든 속내가 다 드러난 셈이었다.
화가 난 나는 김 작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노려봤다. 김 작가도 나를 노려봤다. 김 작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를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김 작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어깨를 떨고 머리를 뒤로 넘겨가면서 한참을 웃었다.
“너 요즘 뭐 하느라 그렇게 싸돌아다니니? 진짜 바쁜 것 같던데.” 웃음 끝에 김 작가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비밀스런 일을 하다 들킨 것처럼 아무 말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뭐 하긴 뭐 해. 대학도 안 가는데 직장이라도 얻어야 할 거 아냐. 밥값은 해야지.”
그 말을 하는 순간 어깨 위로 차가운 시베리아 바람이 한바탕 지나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그 나이의 어떤 여자애가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자기가 먹는 밥값을 알아서 벌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러고 보면 김 작가는 자식 하나는 제대로 키운 셈이었다. 어릴 때부터 뼈 속속들이 박힌 독립심, 경제적인 독립이 선행되지 않으면 진정한 독립이란 없다는 그 잘난 이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어린 여전사. 소설이고 뭐고 자정이 되어 한순간에 호박 덩굴로 만든 마차에서 굴러 떨어진 공주 꼴이 된 기분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현실, 현실이 문제였다.
그날도 계동길 끝자락의 중앙고등학교 건물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북촌길을 가로질러 걸었다. 연필과 노트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채 무엇이든 건져보겠다고 열심히 걸었다. 그러면서도 내 발걸음은 어느새 김영철의 뒷모습을 본 듯한 창덕궁 담장 옆길의 원서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길이다. 디지털 카메라 속에 담긴 원서동의 깊은 겨울을 나는 어디서 다시 꺼내보기 위해 이렇게 여러 컷의 사진을 찍어대는 걸까. 낮은 지붕 위에 덧댄 방열재 위에 켜켜이 쌓인 흰 눈, 버려진 집 대문 앞에 세워놓은 줄 끊어진 기타도 보인다.
일본식 건물을 머리에 올린 듯 근사하게 리폼한 원불교문화원은 너무 멋져서 오히려 내 기억을 방해한다. 불교미술박물관도 인사미술공간도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너무나 멋스럽고 너무나 모던하다. 계동이, 원서동이 이렇게 완벽하게 근현대가 조화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 자체가 낯설다.
겁이 난다. 나는 다시 길을 내려와 길거리 커피숍으로 들어간다. 커피를 주문하고 또 하는 일 없이 커피를 마시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앙증맞은 작은 장식물들이 흰색 에나멜 장식장 위에 놓여 있다. 초록색, 파랑색, 주홍색의 직조된 천들이 지갑으로 필통으로 파우치로 만들어졌다.
공정무역이란 형태로 네팔에서 서울로 바로 날아온 물건들을 구경하고 잡지를 보고 또 커피를 마신다. 시간, 두려움, 상처를 가능한 한 멀리 떠나보내야 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