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요.” “네 선생님.” 나는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붉은색 사인펜이 들려 있었고 그 손 아래 노끈으로 묶은 내 소설 원고가 놓여 있었다. 커피 잔이 두 개, 물 잔이 한 개 안경집 한 개가 장식물처럼 우리의 탁자 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J 작가는 내 앞으로 원고 뭉치를 밀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도무지 내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무슨 주술처럼,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바탕 연설이 끝나고 나는 괜히 커피숍 안을 둘러봤다. “학생도 커피 좀 줄까?” 커피숍 주인이 물었다. 커피가 나오고 한 모금 마시자마자 가슴이 더 뛰었다. 사실 하루 종일 굶었고 물 한 잔도 제대로 마실 수 없는 심리 상태였기 때문에 커피의 효과가 금세 나타났다.
“원고를 열어봐요.” J 작가가 말했다. 첫 장부터 붉은색 사인펜으로 쫙쫙 줄이 그어져 있었다. “내가 줄을 그은 부분들은 일단 오문이거나 비문이에요. 문장이 안 된다구요.”
나는 파르르 떨며 원고 몇 장을 더 넘겨봤다.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한 지경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오줌이라도 쌀 것 같았다. 맞춤법이 틀린 글자들은 J 작가가 고쳐 쓴 글자 밑에서 오그라들어 있었고 원고지가 온통 그냥 붉은줄 투성이였다.
“학생은 이다음에 뭐가 되고 싶어?” J 작가가 나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 쓰는 사람요.” J 작가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어떤 글? 소설? 시? 아니면 뭐?” 나는 다시 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하면 소설요.”
J 작가는 다시 내 원고를 자기 앞으로 끌어가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뒤로 넘겨가며 훑어보았다. “장점이 없지는 않아. 생각한 대로, 표현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상관없이 그냥 계속 썼다는 거. 그게 장점인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나는 두 손을 꼭 쥔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학생은 왜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해?” J 작가가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냥 재미있어서 그렇지 않나요?” 오히려 내가 J 작가에게 되물었다. “그래, 재미있어서 그래. 재미라는 게 뭘까. 아마 사람들이 소설을 재미있어 하는 건 사람들 사는 모습이랑 소설이 제일 비슷하기 때문에 그럴 거야. 안 그래?” “네 맞아요.” 정말 생각해 보니 J 작가의 말이 다 맞았다.
그 순간 나는 약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볼 때마다 후줄근하다고 생각했던 J 작가의 눈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지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정말 작가였다.
“학생 글에는 주의 주장만 있어. 말만 있다구.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 수가 없어. 누가 학생의 생각을 궁금해할 것 같아? 사람들은 바보가 아냐. 소설을 쓸 때는 자기의 생각 따위는 아예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게 좋아.”
나는 순간 입술이 달싹거리고 말을 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J 작가의 아우라에 취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설명을 하려 들지 말고 묘사를 하라.’ J 작가가 나에게 한 문학수업 제1강의 내용은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