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노동자들이 늘 맛없는 국수만 먹여주는 사장과 정면으로 맞서는 부분에서 피크를 이뤘다. 아이를 업은 여자 노동자가 사장을 향해 소리를 쳤다. “우리도 인간이란 말이에요.”
그럼 사장은 여느 사장이 다 그런 것처럼 느끼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풀어 여자들에게 겁을 주라고 시켰다.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속에는 사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캐릭터가 조금씩 다 들어가 있었다. 조금씩 실존인물을 카피해 넣는 방식으로 소설을 써나갔다. 짐작하실 것이다. 누가 김영철의 탈을 뒤집어쓴 캐릭터였는지.
결국 사장을 죽이기로 모의한 날 여자들이 청바지를 입고 공장으로 쳐들어오는 게 마지막 장면인 그 소설의 제목은 〈여름 한철〉 같은 방식으로 붙여졌다.
나는 혼자서 그 소설의 결말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흥분 상태에 빠졌다. 열린 결말이라고, 혼자서 자위를 하면서 장하다, 장하다 소리를 반복했다.
다 써보니 놀랍게도 원고지로 칠십 매 가까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소설을 쓰게 한 건 배고픔과 분노였다. 김 작가가 연애에 미쳐 가정경제를 돌보지 않고 돈을 써댄 탓에 쌀을 살 돈이 없었다는 게 배고픔의 이유였고, 이십 장이나 되는 연애편지를 보냈지만 개무시를 당했다는 게 분노의 이유였다.
한밤중에 나는 괜히 헌법재판소 건너편 쪽에 있는 커피숍 주변을 배회했다. 내가 쓴 게 소설인지 아닌지 난 정말 알고 싶었다. 그 후진 커피숍의 창가 자리에 귀신처럼 앉아 있는 소설가 J의 실루엣이 늘 어른거렸다. 누런 봉투에 들어 있는 내 작품을 꺼내 J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도 난 정말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밤 나는 그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고 창가에 앉아 있는 작가 J가 보였다. 나는 사실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커피숍 주인이 먼저 J에게 말을 시켰다. “선생님 누가 찾아오셨네요.”
J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저 계동 사는 고등학생인데요.” 그녀는 책을 들어 책등이 밖으로 오도록 돌려놓은 뒤 말했다. “그런데요.” “J씨께 부탁이 있어서요.”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유명 작가에게 J씨라니, 아니나 다를까 커피숍 주인이 다가왔다. “학생 일단 앉아. 그리고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J씨가 뭐니.” “아 네, 죄송합니다.”
그녀는 거의 한마디도 안 했다. 그리고 완전히 더듬거리는 내 말을 끝까지 다 들었다. “봉투 두고 가요. 그리고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다시 봐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책을 뒤집어놓고 읽기 시작했다.
그게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북촌길이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다른 존재가 된 느낌, 다른 존재로 탈바꿈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나는 정말이지 째깍째깍 시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밤이 와 그 커피숍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