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후쯤 R의 아버지가 또 전화를 했다. “또 집을 나갔단다. 너한테 연락할 거야. 꼭 전화해야 한다.” 난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아 R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니 좀 잘 지키시지 왜 그러셨어요.”
R의 아버지가 순간 혀를 차며 말했다. “창문 열고 도시가스 관 타고 나갔다. 방문을 밖에서 아무리 잠그면 뭐 하니. 한두 번이 아니란다. 도망치는 데 미쳐 있는 놈을 내가 무슨 수로 잡겠니. 너만 믿는다. 니가 제일 친구라고 하더라.”
세상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고 나는 생각했다. R은 정말 왜 그러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나면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불만이 뭐냐고, 잘생기고 인자한 아버지, 능력 있는 엄마에 따뜻한 가정부, 좋은 집에 좋은 침대, 끔찍하게 예쁜 화이트 컬러 화장대까지…. 그리고 왜 내가 가장 친한 친구인지도 사실은 물어보고 싶었다.
김 작가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그 며칠 후부터였다. 계속해서 글짓기 교실 밖으로 나가 서성거렸다. 전화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도 하고 빈 벽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도 김영철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 작가는 다시 메모 노트를 찾아 끼적거리기도 하고 마라톤 타자기를 들고 나와 타닥타닥 두드리기도 했다. 탁탁탁, 타닥타닥, 명징한 타자기 소리만 계속해서 들려왔다.
어떤 날 밤에는 얼굴이 꽁꽁 언 채로 돌아다니다가 밤늦게 들어왔다. 밥도 먹지 않은 것 같았고 사람을 만난 것 같지도 않았다. 밤에도 몸을 돌려 벽을 보고 모로 누운 채 잠을 못 자는 것 같았다. 그 좋아하던 커피를 타달라고도 하지 않고 라면을 끓여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인근의 꼬맹이들이 봄방학을 맞아 글짓기 교실에 나오지 않게 되면서 김 작가의 하루는 더 길어졌다. 어떤 날은 이불을 싸맨 채 누워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평소 잘 어울리지도 않던 동네 분식집 의자에 가 앉아 동네 여자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김영철이 글짓기 교실로 찾아왔다. 여전히 핸섬하고 여전히 깔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김 작가가 팔짱을 끼고 일어나더니 나에게 말했다. “너 나가 있어.”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제 편지를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따위의 말들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인 듯한 분위기가 충만했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나가 신문을 펼쳐놓고 시금치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 옆으로 가 앉았다. “할아버지는요?” “바둑 두러 부동산에 가셨지.” “네.” 나는 할머니가 잘 다듬어놓은 시금치를 괜히 이쪽저쪽으로 자리만 옮겨놓으며 글짓기 교실 쪽으로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잠시 후. 와장창 하고 글짓기 교실에서 폭음에 능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있어라 넌.” 할머니가 얼굴을 들어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넌 가만있어.” 할머니가 또 한 번 말했다. “네.” 그리고 난 정말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김 작가의 비명 소리, 아흐, 하는 김영철의 기합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더니 멀쩡한 것들이 공중에서 깨지고 솟아오르고 문짝이 부서져라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김 작가의 길고 서러운 울음소리가 계동 골목 속속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좀 있으려니까 앞집 뒷집 아주머니들이 벌써 골목으로 나와 구경을 하면서 쯧쯧, 혀를 찼다.
나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 골목길에 섰다. 집 앞에 내어놓은 식은 연탄재 하나를 양손에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김영철은 보이지 않았다.
글짓기 교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김 작가는 꼬맹이들 책상 밑에 들어가 머리를 감싼 채 울고 있었다. 바닥에 깨져 나뒹구는 물컵, 자판이 빠져버린 마라톤 타자기, 두 동강이 난 쓰레기통, 싱크대 수납장 위에 꽂아둔 책들이 와르르 무너져 빨래처럼 싱크대 개수대 안에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