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사단이 난 건 그날 밤이었다. 한 아저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허접한 김 작가 아는 사람 중 한 사람이려니 하고 대충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 아저씨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는 자기를 R의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R이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데 연락이 되면 바로 전화를 걸어달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딸을 걱정하는 목소리였고 순간 나도 남자애들과 인파 속으로 걸어가던 R의 안부가 걱정스러워졌다.
나는 어떡하든 책을 좀 읽어보려고 글짓기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 삼십 분쯤 지났을까 정말 R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난 빨리 오라고 했고 R은 금세 우리 집으로 왔다. “오늘은 니네 집에서 자고 갈게. 니네 엄마도 없는 것 같은데.” R이 말했다.
순간 나는 무슨 첩보원처럼 민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라면을 사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R의 아버지는 전화를 받은 지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아 글짓기 교실 앞에 도착했다. 정말이지 검고 빛나는 커다란 자가용이었다.
그 순간부터 R은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담력 있고 멋있는 애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잡힌 상태로 글짓기 교실 문짝을 꼭 잡고는 놓을 생각을 안 했다. 유리문짝이 떨어질 듯이 흔들리고 R의 비명이 계동 골목을 꽉 채웠다.
결국 아버지의 힘에 못 이겨 차 안에 몸을 반쯤 구겨 넣은 R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너도 타. 빨리 타라니까. 니가 타면 가고 너 안 타면 나도 안 가 씨발.” 순간 R의 아버지가 나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제발 타라. 이러다 우리 애 죽이겠다. 제발 부탁이다.”
R은 차 안에서도 입을 닫지 못했다. 발을 구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차 유리창을 탕탕 때리고 정말이지 말이 아니었다. 난 글짓기 교실의 문을 열어놓고 온 것 같아 계속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조용히 운전을 하고 있는 R의 아버지 뒤통수를 쳐다보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저게 아버지라는 사람들의 뒤통수로군.’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R이 왜 그 먼 부자 동네에서 안국동까지 학교를 다녔는지 그건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차로도 꽤 시간이 걸리는 아주 넓은 아파트촌에 그녀는 살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가정부 언니가 차려주는 저녁밥을 먹었다. 반찬 가짓수가 너무 많고 알 수 없는 음식들이 아주 많았다. 무엇보다 집 안의 조명이 너무 환해서 몸 둘 바를 알 수 없이 불편했다.
밥을 다 먹을 즈음 날아갈 것 같은 긴 잠옷을 입은 R의 엄마가 방에서 나왔고 가정부 언니가 오렌지주스 한 잔을 갖다 주었다. R의 엄마는 그저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스위트홈이 따로 없었다.
“야 들어와.” R이 나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갔다. 화장대, 피아노, 흰 옷장, 전신거울, 커다란 봉제 인형 여러 개가 놓인 침대 등 정말이지 사람 주눅 들게 하는 방이었다. “넌 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왜 매일 입에 욕을 달고 다니니?” 침대에 걸터앉으며 내가 물었다. 침대 쿠션이 너무 좋았다. R이 책상에서 의자를 빼내어 앉으며 말했다. “그렇게 좋으면 니가 와서 살아봐 씨발, 이건 집이 아냐.”
“나 또 집 나간다. 너 한 번만 더 우리 아빠한테 꼰질렀다간 죽을 줄 알아.” 그리고 R은 내가 보는 앞에서 의자를 딛고 창문을 통해 다리를 한 짝 내놓은 채 밖으로 나가는 훈련을 했다. 다행히 삼 층 정도 되는 높이여서 떨어져도 안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R의 아버지는 내게 데려다주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때까지도 R의 엄마는 전화를 걸고 있었고 가정부 언니는 현관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정작 나를 그곳까지 데려간 R은 코빼기도 안 비쳤다.
아파트 밖으로 나간 나는 R의 방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오래 쳐다보고 서 있었다. 주홍색 불빛이 켜진 방에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투명 상자곽 속처럼 환한 불이 켜진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