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나는 잠에 곯아떨어진 김 작가를 쳐다보다가 머리 반쯤을 받치고 있던 베개를 확 잡아 빼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카락을 다 잘라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괜히 스타킹들마다 구멍을 내고 자주 바르는 립스틱은 반을 툭 꺾어 짓이겨버렸다. 중요한 메모 노트라고 늘 끼고 다니는 푸른색 노트를 감추기도 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김 작가는 뭔가를 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그런 노트 따위는 찾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나는 그 사랑에 균열을 낼 수 없는 어린 존재였다. 밤마다 계동 골목을 걸어 다니며 애꿎은 공중전화 부스만 발로 찼다. 그것도 모자라 빛나게 닦아놓은 남의 집 장독대를 향해 돌을 던졌다. 콩나물을 팔러 오는 야채 장수 아저씨와 괜히 싸우고 글짓기 교실에 찾아오는 잡상인들을 차갑게 내쫒았다. 어쨌거나 절대로 두 사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내 기본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R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정말 뜻밖이었다. “넌 나 아니었으면 그날 서울 시내를 기어서 집에 왔을 거야. 그런데 나한테 고맙단 말도 안 하니? 진짜 싸가지 없다.”
R의 조금은 허스키하고 방탕한 기운이 섞인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삼만 원만 갖고 나와.” R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소년원에 들락거리는 애들이 주인공이라는 《티보 가의 사람들》이란 프랑스 소설책을 사기 위해 모아두었던 돈을 꺼내 들고 종로로 나갔다.
“머리꼴 하구는.” R이 내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말했고 나는 오랜만에 웃었다. “그러는 넌.” R의 머리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방학 때 죽어나는 건 그저 여자애들의 머리카락인 셈이었다. 파마를 했다가 풀고 또 하고. “돈 가져왔니? 가자.” 나는 또 R을 따라 길을 떠났다. 오늘은 절대로 기어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게 나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R과 나는 관철동에 있는 한 지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꽃무늬 소파가 놓인 레스토랑 안에는 딱 보기에도 고등학생인 애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천장은 담배 연기로 가득했고 어색한 포즈로 앉아 있는 여자애들의 몸에서 나는 스킨 냄새가 코를 찔렀다.
R은 남자애들 몇이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안쪽 좌석으로 나를 데려갔다. “인사해.” R이 시켰지만 어떤 남자애도 나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뭐냐 너?” 한 남자애가 R의 의자를 발로 차며 말했다. “뭐긴, 소개팅이지. 소개팅 해달라며.”
커다란 접시에 담긴 돈까스가 나왔다. 유독 나만 생선까스를 시켜서 다른 애들보다 늦게 나왔다. 내가 생선까스를 반쯤 먹었을 때 그애들은 벌써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배가 부른 남자애들은 기름기로 반들반들한 이마를 빛내며 레스토랑 안에 있는 여자애들을 쳐다보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내 처지가 그런 일로 흥분할 때는 아니었지만 사람이 앞에 앉아 있는데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얘네 엄마가 작가잖아.” R이 말했고 남자애들 중 하나가 푸하, 하며 입안에 있던 커피를 토해버렸다. “아이 씨 진짜.” 남자애가 R을 째려보며 냅킨을 꺼내 입을 닦았다. 나는 뭔가 분위기를 수습할 말을 하고 싶었다. R도 남자애들도 무안하지 않을 만한, 그리고 유머 있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응, 뭐 글 쓸 일 있음 가져와. 내가 도와줄게. 난 모든 문장을 다 쓸 수 있어.” 내가 그 말을 하자 또 다른 남자애가 또 푸하, 하고 웃었다.
‘모든 문장을 다 쓸 수 있다.’
나는 사실 그때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굉장히 놀랐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모든 문장을 다 쓸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었다.
그 레스토랑에서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천장을 쳐다보다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몇 마디 주고받은 게 다였다. 그리고 나는 R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고 R은 남자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광화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게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