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난 대학에 안 가기로 했어.” K가 말했다. “넌 안 가지만 난 못 가.” 나는 김 작가가 들었으면 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뭐 해?” K가 큰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글쎄, 공장이나 가려구.” “진짜? 나도 따라갈게.” K는 정말이지 바보처럼 눈을 크게 떴다.
“어떤 공장?” K가 또 내 말을 믿는 눈치여서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시계공장.” “넌 뭐 할 건데?” 내가 K에게 물었다. “아빠가 병원에 와서 간호 보조나 하래. 다른 건 다 괜찮지만 그 흰색 유니폼은 정말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생각 중이야.”
계동까지 온 K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내가 사는 꼴을 더 이상 세세하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나는 K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글짓기 교실에 오는 꼬맹이들이 모여 놀고 있는 문방구 앞, 열쇠수도전기 통합 수리점, 목욕탕, 떡집 앞, 수예점 앞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정독도서관 쪽으로 넘어가는 북촌 길은 지나가는 사람도, 달리는 차도 많지 않아 잊혀진 변방처럼 고요했다. 나는 어쩌면 그때 해가 지는 순간의 평화로운 기운을 꼭 K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정독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도서관 건물 한 귀퉁이에 앉아 해가 지는 북촌의 하늘을 보며 나는 생전 처음으로 김 작가와 나, 그리고 글짓기 교실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사실 누구에게도 가족 얘기를 한 적이 없어서 최초로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듣는 K의 얼굴은 왠지 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맞장구를 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질문도 전혀 없었다.
김 작가의 엄마답지 못한 패악스러운 성격을 폭로하고 있을 때였다. K는 머리를 푹 숙이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이상한 울음소리였다. 꺽꺽거리며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목에 뭔가 걸려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었다. 나는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 K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말했다. “무슨 일 있니? 나한테 얘기해봐.” 나는 K의 손을 잡았다. 난로처럼 따뜻한 K의 손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흘깃거리며 우리를 쳐다봤지만 K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K를 데리고 어딘가로 가야 했다. 나는 K를 부축한 채 정독서관을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도 중요한 질문은 빼먹지 않았다. “너 돈 있니?” K는 울면서도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삼청동 길로 접어드는 좁은 골목에서 작은 커피숍을 발견하고 K를 데리고 들어갔다. 사람이 와서 우리를 쳐다보며 뭘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K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는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소리를 질렀다. “보면 몰라요? 지금 사람이 울고 있잖아요. 여기 커피 말고 뭐가 또 있다고 말을 시키는 거예요?”
나는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업원을 데리고 주방 쪽으로 갔다. “죄송해요 정말. 제 친구가 많이 아파요.” 그 남자는 입속에 바람을 잔뜩 넣어 머리칼을 불어 넘기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친구예요? 딸인 줄 알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난 그냥 마음속으로 ‘이 집 다시는 안 온다’는 정도의 결심만 하고 K에게 돌아갔다.
K가 갑자기 소란을 떨며 왼쪽 코트 소매를 올리고 손목 안쪽을 보여줬다. “이걸 보라구. 이걸 보란 말이야.” K는 탁자 위를 오른손 주먹으로 탕탕 내리치면서 연극배우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희디흰 K의 손목 위에 마치 작고 붉은 지렁이가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여러 개의 칼자국이 나 있었다.
“너 왜 이랬니?”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상처는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태여서 일이 벌어진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니가 나한테 연락을 끊었잖아.” K는 입술에 잔뜩 힘을 주고 말했다. 배신감에 몸을 떨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하니? 넌 할 일이 그렇게 없니?” 난 정말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기까지 했다. “넌 사랑을 이해 못 해.” K가 그 말을 하고는 “흑흑흑” 소리를 내며 더 큰 소리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