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가전제품을 잔뜩 실은 리어카가 지나간다. 야채와 과일을 실은 작은 트럭도 지나간다. 발목까지 끌리는 긴 코트를 입고 엄마 손에 매달린 채 학원으로 끌려가는 아이들의 볼따구니가 발갛다. 눈만 내놓은 옷차림으로 폐지를 줍는 남자가 나를 힐끔 쳐다보고 지나간다. 왜 쳐다봤을까. 때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그런 걸 물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저를 왜 쳐다보셨나요? 저는 어떤 사람이죠?
드럼통을 개조한 커다란 군고구마 오븐이 길 한켠에 서 있다. 이천 원에 세 개짜리 군고구마를 산다.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수염이 잔뜩 난 오븐 주인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봉투에 흐리게 인쇄된 사람들 이름과 주소가 보인다. 최근 오 년간 카드를 발급해놓고 이용하지 않은 어느 백화점 고객 명단인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봉투를 들고 하얀 햇볕이 똑똑 떨어져 내리는 계동의 길 한가운데 서 있다. “올 겨울엔 어째 이리 춥냐.” 내가 서 있는 집 앞의 대문이 벌컥 열리고 한 여자가 거리로 나가며 중얼거린다. 나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골목길을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본다.
내가 김 작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꼭 물어보고 싶은 건 김영철과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을까 하는 점이었다. 어느 날 글짓기 교실에 온 김영철은 김 작가와 마주보고 앉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에 나란히 앉았다.
놀라운 건 김영철이 김 작가가 마시던 커피 잔을 자연스럽게 가져가 김 작가와 번갈아 마시기도 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소설은 좀 써보셨어요?” 내가 물으면 그는 그냥 대답 없이 웃었다. “요즘은 어떤 책 읽으세요?” 또 물어도 그냥 웃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사실 책을 읽지 않는 인간이었다.
김 작가는 김영철의 터틀넥에 묻은 실밥을 떼어 손가락에 들고 그에게 보여주며 헤헤 웃었다.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김 작가가 뭔가 화사해지고 즐거워진 것 같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솔직히 표현하면 그게 나쁜 건지 좋은 건지조차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내 마음은 복잡했다. 난 시작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조차 건네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글짓기 교실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를 불러 세워 내가 그동안 쓴 편지를 모은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그는 봉투를 받고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나는 그의 입을 막으려고 그냥 돌아서 뛰어갔다. 그가 집에 도착해 봉투를 열어 이십 장이나 되는 편지를 읽는 모습을 상상하자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게임은 시작되었고 누가 이길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었다.
김영철, 아니 쟝에게 내가 완전히 미쳐 있는 사이 K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애가 글짓기 교실의 문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내가 얼마나 무심했던가를 알 수 있었다. 한동네 사는 남자한테 팔려 사랑하는 사람을 몰라라 하다니.
K는 내가 보낸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를 들고 집을 찾았다고 했다. 한 손에는 진분홍색 케이크 상자도 들려 있었다. K의 머리카락은 공주들처럼 안으로 도르륵 말린 상태여서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무리 봐도 K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애였다.
마침 김 작가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늘어질 대로 늘어진 파자마를 입은 채 방에서 나와 K에게 말했다. “넌 아주 예쁘게 생겼구나. 니가 쟤랑 친구라니 고맙다 얘.” 입을 열어 하는 말이라고는 겨우 그런 식이었다. “니네 엄마? 그 작가라는.” K가 목소리를 낮추며 묻고는 벌떡 일어나 김 작가를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싹싹하기도 하지. 넌 가정교육을 잘 받았구나. 어딜 봐도 넌 쟤 친구하긴 아깝다.” 김 작가는 온갖 산통 깨는 얘기들은 다 하며 입 냄새가 풀풀 나는 줄도 모르고 우리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가서 일 보세요, 김 작가님.” 내가 싫은 티를 내며 말해도 김 작가는 재미있다는 듯 K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 깔깔 웃으며 한마디했다. “고목나무에 매미네. 하하하 하하하. 정말 그렇네. 하하하. 재밌어라.”